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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06.25 01:44
<김춘수평전 (12);>
청년 시인 김춘수의 열정과 마산문단의 초석
-김춘수 시인의 마산 시절(2)
양 왕 용
20대 후반에서 30대로 진입하는 1950년대 초반의 김춘수 시인의 열정은 그의 조용하면서도 차분한 어조와는 딴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천상병(1930-19930 시인 말고도 마산중고등학교 시절의 제자 문인들은 많다. 우선 천성병과 동기로는 부산의 시조시인 김두만(1927-2015)을 들 수 있다. 그는 천 시인과는 한반 급우로 생전의 유일한 시조집 『들국화 마지막 향기』(2014,세종출판사)의 머리말 「시조집을 내면서」에서 그 당시의 젊고 패기 있는 김 시인과 학생 천상병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고교시절, 김춘수 은사님은 입지立志의 고개를 넘었을까? 패기 넘치는 젊은 교사였다. 선생님은 통영 부잣집 아드님으로 여름이면 날 세운 흰 바지를 입고 흰 구두를 신은 아주 멋쟁이셨다. 시를 창작함에 있어 직접 체험을 강조하신 선생님께서는 예를 들어 죽은 자에 관한 시를 쓰려면 직접 시신을 만져가면서 체험을 해야만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 말씀이 끝날 무렵이면 ‘체머리’를 약간 흔들면서 열변을 토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천군은 수업시간이면 고개를 숙이고 일본문학 서적을 뒤적이며 탐독에만 무아지경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귀국한 귀환동포였는데 ‘우환동포’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나는 의령 산간오지에서 자란 전형적인 시골 촌놈이었다. 나와는 동병상련으로 우정을 나눴다 (김두만 『들국화 마지막 향기』pp5-6)
<마산고등학교 역사관>에는 김두만 시조 시인(2005년 ⟪현대시조⟫ 데뷔)은 천상병 시인과 같이 10회 졸업생(1945년 입학 1951년 졸업)문인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 외 11회(1947년 입학1952년 졸업)에 지난 호에 소개한 황하수(1933-) 시인이 있다. 그는 중학시절 김춘수 시인에게 배웠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는 중학 6년의 전 과정을 졸업하지 못하고 6·25 전쟁기 군에 입대하여 육군 중령으로 예편하였으며 근년에 마산고등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았다고 한다. 군에 있었던 1965년 12월호, 1966년 2월호,10월호 ⟪현대문학⟫에 신석초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하여 12편의 작품을 ⟪현대문학⟫에 발표한 과작의 시인이며 현재 부산에서 오랜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11회에는 역시 ⟪현대문학⟫출신 이중(본명 이명중) 시인, 12회(1950년 입학 1953년 졸업)에 최절로(1935-2012) 시인, 13회에 정재관(1931-1986) 평론가 등이 있다.
1953년 9월 김 시인이 마산고등학교를 떠난 그 해 4월에 입학한 1학년 생(15회) 가운데는 유달리 문인들이 많다. 소설과 시를 쓰고 있는 이제하(1937-). 소설가 송상옥(1938-2010), 시인 강위석(1937-), 숭실대 국문과 교수를 지내다가 근년에 작고한 권영진(1937-2017) 시인 등을 들 수 있다. 강위석 시인의 회고에 의하면 김 시인은 고학년 국어 담당이라 그들 자신은 직접 배우지는 못했으나, 그 무렵 성지여고에서 문학을 사랑하는 마산 시내 고등학생과 시민을 위한 마산문인들 강좌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김 시인의 김소월과 정지용의 시에 대한 강좌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으며 그 감동의 영향으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김 시인은 마산고등학교 연극반도 지도하여 마산연극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한정호 「김춘수의 문학과 마산 살이」,마산문학관 특별기획전<5> <시!꽃의 이름으로... 김춘수 유품전> 해설집<2006.11><p31>). 아마 연극지도는 해방직후 통영에서의 통영문화예술협회의 연극공연 참여의 체험이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김 시인은 시 창작 지도뿐만 아니라 연극도 지도한 열정적인 교사였다.
마산고등학교를 나선 우리 일행은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마산문학관으로 차를 몰았다. 그곳에서 김춘수 시인의 마산문단의 활약상도 알아보고, 오후에는 김 시인의 처조카 명유진 사장을 만나기로 약속해 두고 있었다. 시인이자 창원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조재영 학예사의 배려로 전시실을 둘려보기 전 가까운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배달해 온 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해결하였다. 조 학예사가 제공한 자료 가운데 주목할 것은 마산문학관 개관(2005) 이듬해에 개최된 <특별 기획전.5> ⟪시! 꽃의 이름으로... 김춘수 유품전⟫의 해설 도록이었다. 이 도록과 전시기획은 지금은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긴 한정호 학예사에 의하여 기획되었다. 한 교수는 1990년 ⟪한국문학⟫에 시가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하였고, 경남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지역문학연구 전문가였기 때문에 이러한 기획전이 가능했다. 그 도록은 황철곤 마산시장의 발간사에 이어 1.김춘수의 삶과 문학, 2.김춘수의 문학과 마산살이, 3.주요 전시 자료, 4.발굴작품(전집에 빠진 작품), 5.관련 자료 죽보기 등으로 구성된 68페이지의 소책자이다. 그 가운데 한정호 학예사가 쓴 「김춘수의 문학과 마산살이」는 김 시인의 마산 시절 전반의 작품 활동과 문단활동을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어 필자의 <마산 탐사>의 안내서 역할을 제대로 하였다.
6·25 전쟁기인 1951년 6월 임시수도 부산에서 열린 전국문화단체 총연합회에서 마산지부로 승인받고 7월에는 마산지부가 결성되면서 김 시인이 지부장으로 선임된다. 1953년 10월에는 이 단체가 발전적으로 개편되고 3대 지부장에 김 시인이 다시 선임되면서 종합예술제, 음악회 ,미술전, 시화전 등을 개최하고 동인지 ⟪낙타⟫(1953년), 기관지 ⟪마산문총⟫(1954) 등을 발간한다.(한정호; 앞의 글 pp31-32) 이상으로 볼 때 김춘수 시인은 30대 초반의 나이로 마산문단 나아가서는 마산 문화예술계 전반의 대표자로 지역문단과 문화예술 진흥에 앞장섰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후배 시인 지망생에 대한 동인활동의 지원도 앞장섰다. 그 가운데 특기할 만한 일은 국립마산결핵병원 환우들이 1952년에 창간하여 네 차례나 만든 동인지 ⟪청포도⟫의 지도교사 격으로 참여한 점이다. 이 동인지와 동인들에 대하여 김 시인은 여러 차례 글을 쓰고 있다.
국립 사나토리움에 내가 처음으로 발을 디딘 것은 1952년 초춘初春이었다. 정문을 들어서자 현관 옆 마당에 키가 내 어깨에 닿을까 말까한 어린 목련화 한 그루가 먼저 눈에 띄었다. 그것이 난형卵形의 단정한 꽃봉오리를 맺고 있었다. 화판花瓣은 이미 황백으로 물이 들어 있었다. 나를 맞아 준 사람은 이, 박, 김, 남, 민 등 제형諸兄이었다. 이 제형은 그 성자姓字가 각색이듯이 얼굴 모습도 모두가 각색이다. 그러나 꽃들이 제각기 다르면서도 한데 어울리면 그대로 아름답듯이 그들도 또한 그러했다. 양지바른 현관 앞에 나란히 나서는 그들은 그대로 난데없는 꽃밭이었다. 건강인인 나보다도 오히려 싱싱하니 참신했다. …중략… 그들이 나를 여기까지 불러낸 이유인즉 그 이름은 ⟪청포도⟫라는 제호로 시동인지를 저희들끼리 내겠는데 그것의 편집을 의논할 겸 문학담文學談으로 한때를 같이 지내자는 것이다. (김춘수;「사나토리움과 ‘청포도’」 제1산문집 『빛속의 그늘』1976,예문관,pp168-169)
이 글은 앞에서도 여러 차례 소개한 1990년대 초반에 쓴 「나의 예술인 교우록」에는 「청포도 동인들」이라고 개제하여 소개되고 있다. 여기에 성들만 열거한 사람들은 결핵을 완치하고, 나중에 시단에 데뷔한 사람들이 여럿 있다.
이동준은 일찍 죽었고, 박철석(1930-2016)은 ⟪현대문학⟫ 1955년 7월호에 「까마귀」가 초회 추천된 뒤에 1958년 ⟪자유문학⟫ 8월호에 「순수시 비평론」으로 등단하여 시작과 평론을 겸하였다. 그 후 해동고 교사와 부산여대 교수를 거쳐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정년하였다. 시집 『까마귀』,「하단의 바람』 등 7권, 평론집 『한국현대시인론』,『한국현대문학사론』 등 5권의 저서가 있다. 김윤기는 1953년 9월호⟪문예⟫에 「광야」외 2편이 추천되기도 하였다. 그에 대해서 김 시인은 「나의 예술인 교우록」 가운데 <기인열전>이라는 항목을 설정하여 ‘김윤기’ 편에서 그와의 인연을 길게 언급하고 있다. (강현국 편 『시인 김춘수의 문학과 삶-우리 어느 둑길에서 다시 만나리』,학이사,2019.p305-307), 남윤철은 1955년 11월호 ⟪문학예술⟫에 「고목枯木」이 추천되기도 하였다. 님윤철 역시 김 시인의 <기인 열전>(강현국 ;앞의 책pp302-305)에 소개되고 있다. 그는 의사였으며 한쪽 폐를 절제하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웅식(1930-) 은 동국대 국문과 출신으로 1955년 10월호 ⟪문학예술⟫에 「거울」,1957년 3월호에 「 붕괴」가 추천되었으며 1958년 12월호 ⟪사상계⟫ 「달밤」외 3편이 당선 되는 등 제대로 데뷔하였다. 그는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하여 공인회계사로 조흥은행, 한국신탁은행 등에 근무하였다. 시집 『붕괴』를 엮기도 했다. 또 다른 동인으로 김대규가 있다고 원로 독일문학 번역가이기도 한 송영택(1933-)시인이 회고하고 있다. 그 역시 1954년 1월 ⟪문예⟫통권 20호에 시「상심·밤」이 추천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 만년까지 제대로 시작활동을 한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고 김 시인은 언급하고 있는데 그가 부산에서 주로 활동한 박철석 시인이다. 김 시인은 ⟪청포도⟫제2집91952,12)에는 평론을, 제 3집(1953.5)에는 발문을 쓰고 있다.
그리고 이 당시의 특이한 또 다른 일은 김세익(1924-1995) 시인의 시집 『석류』(1953)의 발문을 쓴 점이다. 김세익 시인은 1943년 함흥의 함남중학교를 졸업한 함경도 홍원 출신인데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1949년 마산여자고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마산에 정착하였다. 그는 ⟪문예⟫1953년 2월호에 「언덕에서」 10월호에 「5월에」가 추천되었다. 그 해에 시집을 내는데 김 춘수 시인이 발문을 쓴 것이다. 김세익 시인은 1960년에 창립된 마산문인협회 초대 사무국장으로 회장인 김춘수 시인과 호흡을 맞추어 마산문단의 바탕을 마련하였다. 그는 1962년 이화여대 도서관학과 교수가 되어 마산을 떠났다.
이렇게 김춘수 시인은 다양한 후배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작품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으며 마산문단의 초석을 쌓았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시창작 작업에도 열정을 쏟아 경향각지의 문예지들에도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였다.
우선 그 당시의 서울에서 발행되는 문예지에도 빈번하게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 첫 작품으로는 1945년 12월 1일 소설가 김송(1909-1988)의 주도로 창간한 종합지 ⟪백민白民⟫통권 17호(1949.1)에 「산악」을 발표한다. 이 잡지는 통권 21호(1950.3)부터 중앙문화협회가 발행소가 되면서 민족진영을 대변하는 문예지로 바뀌게 되는데 그 호의 ‘시단27인집’이라는 특집 형식에 김 시인은 「비탈」을 발표한다. 이 두 작품은 그의 두 번째 시집 『늪』(1950.3.20. 문예사)에 수록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그 당시의 유일한 월간 문예지인 ⟪문예⟫(1949년 8월 창간 1954년 3월 통권 21호로 종간)에 3편의 시를 발표한다. 「사蛇」(1949.8 창간호),「기旗」(1949.10,제3호),「모나리자에게」(1950.2,제7호) 등이 그것인데, 앞의 두 편 역시 시집 『늪』에 수록되어 있으나 「모나리자에게」는 전집에 수습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문예⟫에는 시보다 평론류의 산문을 많이 발표하고 있다. 1949년11월호(통권 4호)에 평론 「아네모네와 질풍노도기」를 발표한 후에 「릴케와 천사」(49년12월 제5호), 「소묘집」(1950.3 통권8호),「릴케적 실존-시 <향수병>에 대하여」(1952.1통권13호), 「유치환론」(53.6, 통권16호), 「엣세이와 현대정신」(53.9 ,통권17호),「문학이란 괴물」(53.12. 통권19호) 등 6편의 산문을 발표한다. 이 가운데 가장 본격적인 시인론이라 할 수 있는 「유치환론」은 1958년 해동문화사에서 발간한 김 시인의 첫 시론집 『한국현대시형태론』(pp186-196)에 수록되어 있다. 이상의 ⟪문예⟫발표 양상으로 볼 때 이때부터 그는 시인이면서 동시에 시 비평 혹은 시 이론가로서 나아갈 그의 앞날에 대한 트레이닝을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김춘수 시인은 서울의 문예지 말고 이 시기에 발표한 다른 지방 문예지 혹은 동인지로는 우선 대구에서 발간된⟪죽순⟫(1946년5월 창간 1949년 제11집으로 종간)을 들 수 있다. 이 동인지는 대구의 이윤수(1914-1997) 시인의 주도로 김동사 ,박목월, 유치환, 이영도 ,이호우 등 여러 문인들과 함께 조직된 <죽순구락부>에서 임시증간호를 포함하여 12집이 발간되었다. 이 동인지에 시 「꽃」(대표작「꽃」과는 다른 작품임,제4호1947.5), 「온실·춘심」(제8호,1949.7),「상아의 집<어느 시인에게>」(제10호,1949.4), 「노라에게」(제11집1949.7) 그리고 산문 「시인에 대한 소묘」(제10호,1949.4),등을 발표한다.
다음으로는 시인 설창수(1916-1998) 주도로 개최된 <영남예술제>(1949년 창시 1959년부터 개천예술제로 명칭 변경)의 기념호 격으로 진주의 영남문학회에서 발간한 ⟪영문⟫에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 문예지는 1946년 진주시인협회 기관지 ⟪등불⟫로 창간되어 4호까지 내고 1948년 5호부터 진주시인협회가 확대 개편된 영남문학회에서⟪영남문학⟫으로 개제되어 6호를 내었으며, 1949년 4월에 발간된 제7집부터 ⟪영문⟫으로 개제되어 1960년11월 제18집으로 종간되었다. 김 시인이 통영시절 여기에 발표한 작품에 대해서는 앞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바 있다. 마산으로 이주 후의 작품으로는 시 「소묘 4제 ;구름, 산악, 담, 혼」 (제7집,1949.4) 「거리에서」(제8집,1949.11),「위문행」(제9집,1951.11),번역시「죽음」(R.M릴케)(제10집,1952.11),번역시 「고독」(R.M 릴케) 등이다. 그리고 마산고등학교를 떠난 이후에도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데 그 목록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시 「죽음」,「하늘」(제12집,1954.11) 「나목』(제13집,1955.11),「가을」(제14집,1956,11),산문「어떤 얼굴」(제15집 1957.11),산문「손」(제16집,1958.11)등이다.
이상의 열거된 작품 가운데는 시와 산문 모두 전집에 수습되지 않은 작품들이 많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앞에서 언급한 한정호 교수가 발굴해 놓은 것들도 여럿 있다. 전집 미수록 작품들의 경우 많은 것들이 김춘수 시인 생전에 마음에 들지 않아 버린 작품들이다. 그러나 연구자들에게는 그것들도 소중한 작품이다. 후원자를 마련하여 전집 보유편으로 시와 산문을 엮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산대학교 강사시절이나 1961년 대구로 옮겨간 후에도 그 지역에서 찾아야 할 많은 미발굴 작품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찾아내어 그 지역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전집 미수록 작품집 발간과 그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앞으로의 큰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작품 활동의 결과 김 시인은 제2시집 『늪』(1950.3.20. 문예사, 4×6판 75면 말미에 서정주 시인의 「서에 대하야」라는 글수록) 제3시집 『기旗』(1951.7.25.문예사, 4×6판 80면, 말미에 저자의 후기 수록), 제4시집 『인인隣人』(1953.4.6.문예사, 4×판 51면 말미에 후기 수록) 등을 이 시기에 엮게 되었다.
간단하게 중국음식으로 식사를 끝내고 마산문학관 사무실로 내려가니까 김춘수 시인의 처조카 명유진 사장(대현기업주식회사 대표이사)이 와 있었다. 마산문학관에서는 2020년 6월13일부터 7월19일까지 명 사장의 할아버지이자 김춘수 시인의 장인인 허당 명도석(1885-1954) 애국지사의 유작 한시 전시회를 창원통합10주년 기념으로 전시회를 가졌기 때문에 이곳이 친숙하다고 명 사장은 말하였다. 우선 함께 마산문학의 역사가 전시된 상설전시실에서 앞에서 언급한 1950년대 초반과 60년대 초반의 마산문단에서의 김춘수 시인의 활약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후 명 사장으로부터 김 시인이 1948년부터 1965년 솔가하여 대구로 이사한 16년 동안의 마산거주지 중성동 58번지의 설명을 들었다.
중성동 58번지의 현재의 지적도 상의 지역은 너무 광범위하고 자기가 기억하는 김 시인의 집 위치와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말을 빌리면 현재의 지적도 58번지 인근에 있는 50의 8번지가 자기 고모님과 고모부(명숙경 사모님과 김춘수 시인을 가리킴)와 고종사촌들이 살던 곳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마산문학관의 조해영 학예사의 증언에 의하면 몇해 전 마산의 원로 문인들이 김춘수 시인 댁을 찾지 못하여 포지석이라도 세울 기념사업을 못했다는 것이었다.
마침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일기에도 불구하고 명 사장님의 안내로 김춘수 시인의 마산 거주지와 그 근처의 명 사장 본인의 옛집이자 김 시인의 처가 집터(중성동 64의 2번지)를 찾아갔다.
큰 길가에서 다소 떨어진 뒷골목에 사람은 거주하지 않은 것 같은 대문에 자물통이 잠겨져 있는 집 앞에 도착하였다. 여기가 김 시인이 거주하던 곳이라 하였다. 대문 사이로 들어다 보니 기와집이 있는 것 같고 나무들도 여럿 보였다.
이 집은 김 시인의 회고에 의하면 해방 직후 토지 개혁으로 몰락한 선친께서 정부로부터 받은 지가증권은 물론 갑자기 줄어든 재산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로 착수한 고무신 공장, 멸치 어장 사업 등을 모두 사기꾼들에게 사기를 당하여 실패한 가운데 김 시인이 마산으로 직장을 옮기자 그 규모가 너무 작아 미안해하면서 구해준 고가에 가까운 기와집이었다.(김춘수 자전소설 『꽃과 여우』,1997,민음사 pp234-235)
이 집에서 그는 마산중고등학교 교사, 1954년부터 1960년까지 부산대학교, 연세대 부산분교, 진해 해군 사관학교, 진주 해인대학 등으로 오가며 한 시간강사, 1960년 해인대학 조교수 발령 1년 만에 경북대학교 전임강사로 옮긴 미안한 마음 때문에 몇 년 동안 마산과 대구를 오르내리며 양쪽 학교 강의를 하던 시절을 보냈다. 그 동안 명숙경(1926-1999)사모님은 제대로 고정적 수입이 없던 강사 시절, 요즈음과 비교되지 않는 박봉인 대학교수 봉급으로 가계를 꾸리고 2녀 3남의 자녀들을 길렀다. 6.25전쟁의 와중에 그의 바로 밑에 동생이자 경기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학교 의대를 4회로 졸업한 전도가 양양한 젊은 의사 김규수(1925-1954)씨를 마산고등학교에 마련된 부상병원에서 군의관 복무를 마치고 부산의 가족을 찾아간다고 보낸 곳도 여기다. 그런데 김 시인의 6.25 상처 중 가장 충격적인 소식인 김규수 씨가 부산의 서대신3가 294번지에서 부상병동에서 겪은 터라우마와 암울한 시대상황에 절망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도 이곳에서 들었다.(김춘수; 앞의 책 pp225-226) 물론 한참 뒤인 1960년 3월15일 4·19혁명의 도화선인 3·15마산의거의 현장을 직접 겪은 것도 여기서이다.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김춘수 시인이 1948년부터 1965년까지 거주한 공간이 아무 기념물 없이 버려져 있다는 것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한국문협 부이사장 시절인 2018년 5월 말 해외문학심포지엄 행사로 찾아간 영국문학기행 중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작가 제인 오스틴)(1775-1817)의 유적이 생각났다. 그의 고향 햄프셔 주 스티븐슨은 물론, 중간에 5년 동안 머문 목욕탕의 도시 서미싯 주 바스, 만년에 머문 고향 인근 원체스터, 그리고 묘지가 있는 원체스터 대성당 등 곳곳이 각기 다른 이름으로 제인 오스틴을 기념하고 있었다.
마산도 분명히 김춘수 시인에게는 유의미한 공간이다. 따라서 이렇게 방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춘수 시인의 집을 나와 명 사장과 함께 대로변에 있는 그의 옛 집 중성동 64-2번지를 비속에서 먼발치로 바라보고 사진을 찍은 후 명 사장과는 일기 좋은 뒷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우리 일행은 부산으로 돌아왔다.
(*양왕용; 시인, 부산대 명예교수,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동북아기독교작가회의 한국 측 차기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