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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06.25 01:40
1-9. 커뮤니케이션의 두 가지 다른 방법
/양선규
부모들의 흔한 고민 중의 하나가 "왜 우리 아이는 늘 같은 책을 반복해서 볼까?"이다. 자라나는 키만큼 우리 아이의 독서 수준도 쑥쑥 자라주면 좋겠는데 이상하게도 책 읽기만큼은 제 자리에서 맴돈다. 옆에서 보면 늘 고만고만한 책들을 들고 있거나 내용 없고(?) 보기 쉬운 만화책만 보고 있다. 고학년이 되었는데도 그림 없는 글자로만 된 책은 아예 상종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아이들도 꽤 있다. 우리집 아이도 그랬다. 서점에 같이 가면 으레 만화책 주변만 맴돌았다. 내가 권하는 책 한 권, 자기가 고르는 책 한 권으로 타협을 보자고 비굴하게 굴어도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아버지가 권하는 책을 다 읽어야 하는 부담이 싫은 것이다. 언젠가 한 번 대오각성 하는가 싶더니(뒷부분에서 설명된다),나이 들어서도 그 독서취향과 고집은 여전하다. 어디서 판타지 무협소설을 빌려다가 남몰래(우리는 모르는 척한다) 밤새워 읽는 눈치다. 아마 그곳에 자기만의 우배산(牛背山)이 있는 모양이다(우배산은 영화 <동방불패>에서 주인공 영호충이 가고 싶어 하는 이상향이다)
“그들은 우리와는 다른 시간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세계에 대한 다른 차원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 조니가 저녁 시간에 늦었을 때 우리는 “도대체 너 지금까지 어디 있었니?”하고 묻고 조니는 “아무데도 없었어요”라고 대답한다. 혹은 우리가 “도대체 너 지금까지 뭐하고 있었니?”하고 묻고 조니는 “아무 것도 안 했어요”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은 시간과 시계와 시간표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 대한 일종의 미묘한 위협이기 때문에, 우리는 당혹스러워진다.“
소년기의 반복적 독서는 다음의 몇 가지 요인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① 본능 : 모든 반복은 쾌를 선사한다. 예술적 쾌의 태반은 반복에서 온다. 낯선 것을 거부하는 것은 본능이다.
② 서사 규범 훈련 : 정해진 이야기 법칙을 익힌다. 몇 가지 중요한 플롯을 익혀서 후일의 확산적 응용에 대비한다.
③ 내부 정보 환기 훈련 : 정보 획득은 외부에서 얻는 것과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 두 경로를 통해 이루어진다. 정보의 내부 환기는 어린 독자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것이지만 숙달된 독자의 재독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같은 것을 읽어도 늘 다른 생각을 떠올리는 창의적 독서도 여기에 해당한다.
④ 애정 행위 : 반복적 독서는 일종의 페티시즘이다. 좋아하는 내용, 좋아하는 장정(裝幀)에 대한 강박적인, 반복적인 애정 표현이다.
인간 사회는 ‘반복하는 것들’ 없이는 한 시도 존립할 수가 없다. 그것을 포괄적으로 ‘규범(canon)’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루틴(routin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이들의 독서물 중에 동화(유사한 플롯으로 기술된 위인전기류 포함)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데 그것들은 흔히 모노 미쓰(mono-myth)라고 부르는 <분리-시련-귀환>의 플롯을 가질 때가 많다. 비슷한 사건에 비슷한 결말, 비슷한 교훈이지만 아이들은 그 ‘반복하는(뻔한) 이야기들’에 열광한다. 그 이유를 <규범적 예술양식>과 <비규범적 예술양식>으로, 예술적 형식 자체의 이원적 속성을 들어 밝히고 있는 글이 있어 소개한다(그 관점에 따르면 동화나 판소리는 규범적 예술양식에 속한다). ‘반복적 독서’의 세 번째 요인, <내부 정보 환기 훈련>에 대한 설명도 된다. 현대예술에서는 새로움(실험정신)이 강조되지만, 규범적 예술에서는 규범을 지켜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커뮤니케이션의 두 가지 다른 타입이 있다. 일반적인 타입과는 반대로 바깥에서 받아들여진 정보는 일부분에 불과하며, 그것보다는 오히려 수용자의 마음속에 있는 정보를 증가시키도록 자극하는 타입이 있다. 이러한 자가 증폭은 수용자의 두뇌 속에 산재되어 있는 정보를 체계적으로 조직한다. 이 때 수용자는, 고정된 사실을 옮기는 단순한 수용 과정에서보다 훨씬 더 능동적으로 활동한다. 자주 거론되는 가장 기본적인 사례는, 기차 지나가는 소리나 리드미컬한 음악이, 명상이나 기하학적 도형 작업(혹은 규칙적인 패턴에 관련된 작업)을 선호하거나 시의 ‘반복되는 언어’에 매료되도록 자극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케이스에서, 내적인 정보는 조직화된 외부 정보의 영향 아래서 증가한다. 이런 현상이 더 복잡한 형태로 드러나는 경우를 우리는 규범적 예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규범적 예술 텍스트는 전도된 원칙에 따라 만들어진다. 텍스트의 정보적 측면은 통제되는 반면 시스템의 ‘언어’는 비자동적인 메커니즘을 따른다. 우리는 의사소통을 하면서 끊임없이 이 비자동적 메커니즘을 의식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인 것이다. 자연 언어로는 무엇이든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규범적 텍스트의 ‘시스템 언어’는 어떤 특정한 것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물론, 규범적 텍스트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예술적 코드화(codifying), 즉 일정한 약호체계의 도움을 받는 텍스트의 창조는, 우리가 자연 언어를 말하거나 쓸 때처럼 자동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자동적으로 일어난다면 그것은 이미 예술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적 부분은 메시지가 어떻게 형성되느냐에 있는 것이다.
비규범적인 텍스트가 정보의 원천이라면, 규범적 텍스트는 ‘환기시키는 힘’이다. 비규범적 텍스트에서 표면적 구조는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정보 채널 혹은 연결 고리이다. 규범적 텍스트에서 구조는 정보의 본질이다. 구조는 수신자에게 전달되어 그들의 마음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정보를 구성하도록 도와준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아이들의 모험 소설 독서의 예를 상기해 보자. 그들은 지금 읽고 있는 텍스트를 전에 읽었던 모험 이야기와 연결시키고, 비교하고, 대조한다. 물론 이 과정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아이들이 독서하는 동안 행하는 창조적 작업이다. 아이들이 왜 자꾸만 똑같은 책을 고르는지 의아해 할 때, 우리는 이 중요한 과정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물론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아이들의 동화가 규범적 텍스트의 일종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동화 자체가 ‘위대한 장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성장기 한 때의 ‘필수적 장르’라고만 생각할 수도 있다. 소설가인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백고가 불여일부고(고고 백 번 추는 것보다 부루스 한 번 추는 게 낫고) 백동(百童)이 불여일소(不如一小)다(동화 백편 읽는 것이 소설 한 편 읽는 것보다 못하다)"라고 말하곤 했다. 대학 시절에 유행하던 고고춤과 부루스 춤에 빗대어서 그렇게 동화와 소설을 비교했던 것이다. 동화와 소설은, 설혹 비슷한 이야기라도, 인생에 접(接)하는 느낌 자체가 달라서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의 파장도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집아이가 중1때의 일이다. 하루는 놈이 불쑥 내 방에 들어와서 좌우상하로 책장을 쭈욱 훑어내리는 거였다. 너 뭐하냐? 내가 그렇게 쳐다보자, 아이가 창문 턱 아래 깔아놓은 이단짜리 앉은뱅이 책장 위에 엉덩이를 턱 걸치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부지, 이순원 알아요?”
웬, 이순원? 이놈이 지금 누굴 묻는거야? 지금 내 책장에서 이순원 소설을 찾고 있었다는 말인가? 문자 그대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소설가 이순원?”
“넹~.”
“알지. 아버지 (소설가) 후배.”
그렇게 대답했다. 중1이 소설책을 찾다니, 느낌에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에이~, 아부지가 무슨...?”
황당하고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아버지 같은 시시한 인간이 그렇게 존경받는 소설가의 선배를 자처하느냐, 양심이 좀 있어라, 그런 어투였다. 그래서 말했다. 등단도 내가 빠르고(1년), 나이도 한두 살 내가 위고, ('소설도 내가 좀 더 잘 쓰고'는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러면 선배 아니냐고. 아이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그 내막이 궁금하고 벌써 기특했다.
“뭐, 좋은 거 읽었냐?”
“예, 소설요, 소설(이라는 것), 참 대단한 거데요?”
어이쿠, 싶었다(운 좋게 월척한 느낌?). 중1때 소설이 대단한 것임을 알았으면, 복 받은 거다. 크게 좋은 선물을 받은 거다. 나는 대학교 2학년 때 그걸 알았다. 그래서 또 물었다.
“무슨 소설?”
“《19세》요.”
“야 임마! 그건 19금이잖아?”
일부러 그렇게 도발했다. 좋은 성장소설을 읽었구나라고 말하는 대신 그렇게 반어적으로 어깃장을 놓았다. 혼자서 깨친 것을 잘 보전하라는 바람에서였다. 그러자 이놈이 얼굴이 뻘개져서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국어 선생님이 반 아이들에게 읽으라고 주셔서 읽은 거예요.”
알고 보니 기특한 자가 따로 있었다. 20대 후반의 미스라는 국어선생님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과 《19세》, 그 두 권을 자기가 맡고 있는 반 아이들에게 지정 도서로 읽게 했단다(그러면서 아이는 대학 도서관에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좀 빌려다 달라고 했다). 물론 책은 학교에서 공급하는 거였다. 지금은 그렇게 좋은 수업을 할 수도 있구나, 좋은 시절이고 좋은 국어선생님이었다. 내 아이의 책 읽기가 ‘소설이라는 대단한 것’을 깨칠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게 무엇보다도 고마웠다. 아이가 이제 삼십대 중반이니 그 선생님도 지금은, 중년의 원숙한, ‘거울 앞에 선 누님’이 되어 있겠다.
<소설가/ 대구교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