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가요산책

가요산책

이미자- 내 삶에 이유가 있음

작성일 : 2020.03.19 11:15 수정일 : 2020.05.17 09:11

인생은 짧고 노래는 길다
―시가 있는 가요 산책

이승주 (시인)

▣ 연재를 시작하며

  이 글은 시와 가요의 산책을 통해 내가 쓴 나의 평전이다. 이 글을 쓸 때 나는 행복했다. 한 편 한 편씩 써낼 때, 어떤 때는 피그말리온처럼 내가 쓴 나의 평전에 내 스스로 감동 받기도 했다. 그럴 때, 이 작업 자체가 나의 꿈이 되었다. 처음에는 하루에 한 편씩 썼다. 하루는 두 편 쓴 날도 있었다. 하루라도 쓰지 않은 날은 그 하루가 무척 길었다. 이 글을 쓰면서 더러는, 나는 어쩌면 시인이 되기보다 우리 가요사의 주옥같은 가요를 애틋하고 절절하게 부르는 가수가 되어 생장산노병사(生長産老病死)의 이 한 생을 건너는 게 더 운명적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한 편 한 편을 쓰고 나서 다음 편을 쓰고자 할 때 가장 고민스러웠던 것은, 쓰고자 마음먹은 가요에 짝이 될 만한 시를 찾는 것도 그렇고 또 그 가요들의 정서와 분위기를 온전히 나의 삶으로 적절히 녹여낼 만큼의 요량과 재주의 모자람도 그렇지만, 그보다 내 심금을 울리는, 내가 좋아하는 가요들이 너무 많아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소소하지만 이 글은 내 삶과 내 삶을 그렇게나 적셔주었던 우리 가요와 시에 바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헌사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의 내 삶도 내가 사랑하는 가요와 시와 더불어 동행할진대, 내 삶의 자취와 흔적이 설령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부질없이 마멸된다 하더라도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노천명의 「사슴」) 내 생애는 그래도 가요와 시로부터 과분히 위로 받았다 할 것이다.
  시와 가요를 통해 비누처럼 조금씩 나를 녹여내는 이 즐거운 작업이 작은 결실이나마 맺을 수 있게 된 요인은 두말할 것 없이 좋은 시와 좋은 가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문화적 사조와 경향이 기성의 것을 시류에 뒤진 낡은 것으로 치부하고 새로운 것을 첨단의 것으로 여겨 다투어 추종하는 현실 속에서, 서정에 뿌리를 둔 시를 애송하고 흘러간 우리 가요에 살뜰히 관심을 갖고자 하는 이 작업이 대장장이의 수작업처럼 언젠가 귀하게 돌아볼 날이 있으리라 믿는다.


인생은 짧고 노래는 길다
―시가 있는 가요 산책 (1)

 

이미자, 내 삶의 이유 있음은
이승주 (시인)

  종일 바람이 불어서 이미자의 「내 삶의 이유 있음은」을 들으며 종일 ‘그 사람’을 생각한다.

나 이제 노을 길 밟으며 나 홀로 걷다가 뒤돌아보니
인생길 구비마다 그리움만 고였어라
외롭고 고달픈 인생길이었지만
쓰라린 아픔 속에서도 산새는 울고
추운 겨울 눈밭 속에서도 동백꽃은 피었어라
나 슬픔 속에서도 살아갈 이유 있음은
나 아픔 속에서도 살아갈 이유 있음은
내 안에 가득 사랑이
내 안에 가득 노래가 있음이라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뜨듯이
나 사는 외로움 속에서도 들꽃은 피고
새들이 노래하는 푸른 숲도 있으니
나 슬픔 속에서도 행복한 날이 있었고
나 아픔 속에서도 당신이 거기 계시니
내 안에 가득 사랑이
내 안에 가득 노래가 있음이라

  “내 안에 가득 사랑이 / 내 안에 가득 노래가 있음”으로 해서 “나 슬픔 속에서도 행복한 날이 있었고 / 나 아픔 속에서도 당신이 거기 계”셨으니……. 외롭고 쓸쓸한 삶에 따스한 위로의 마음 한 등(燈) 켜 주는, 인생에 대한 회상과 관조가 저릿하게 배인 노래이다.
  내 또한 쓰라린 아픔 속에 있을 때도 아침이면 산새는 와서 울고, 내 또한 추운 눈밭 속에 갇혀 떨고 있을 때도 동백 가지는 꽃을 피우고 다시 봄은 찾아왔다. 하여, “내 안에 가득한 노래”야말로 외롭고 고달픈 인생길의 길동무요, “내 안에 가득한 사랑”이야말로 슬픔 속에서도 내가 살아야 할 이유임을 다시금 수긍한다. 내 인생도, 들꽃이 피고 새들 노래하는 푸른 숲이 있는 이 세상에 왔다가 그리움의 노을 길 밟으며 나 홀로 걸어갈 때 이런 노래와 같은 사랑, 시 하나쯤은 남기고 가야지.

  이미자의 「내 삶의 이유 있음은」을 들으며 간신히 잠들었다 한밤중에 깨어난다. 비 냄새가 난다. 스무 해 전의 ‘그 사람’이 비에 젖어 머리맡에 와서 울고 있다. 베란다 창문에 매달린 바람의 머플러가 밤비 속에 길게 휘날리고, 그 사람의 긴 울음의 머플러는 내 마음 창문에 걸려 비바람에 날린다. 오늘밤 또다시 하필이면 이런 바람 불고 궂은비 내리는 이 한밤에 문득 박인환은 어디서 어쩌자고 불쑥 튀어나와 내 잠든 그 옛날을 한사코 깨운단 말인가.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 「세월이 가면」

  ‘그 사람’. 불란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뿌연 수은등 불빛이 안개의 입김 속으로 녹아드는 그 몽환적인 가로등 그늘의 밤이 아니더라도, 꽃들조차 목이 메어 슬프게 울음을 참는 밤, 사랑을 보내고 목이 메어 돌아설 때의 그 ‘붉은 눈시울의 나트륨등’(졸시, 「잘 가라 사랑, 봄밤들이여」)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사람을 생각할 때, 이마 위에 흔들리던 그 잎새들의 반짝임조차 그 사람의 웃음소리마냥 가슴을 설레게 하던 그 옛날의 벤치. 노을과 함께 눈앞에서 아득히 배경이 모두 사라지던 그 어스름의 강가와 스펀지처럼 자꾸만 발이 빠지던 어둠의 뱃속으로 함께 손을 잡고 들어서던 그 옛날의 두근거림의 낡은 극장. 아,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이 시에서 내게 가장 와 닿는 시구라면 ‘세월은 가도 사랑은 남는 것.’이라고 하지 않고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이라고 한 이 구절. ‘사랑’은 흘러가는 것이라 하더라도, ‘세월’은 흘러가는 것이라 하더라도, ‘옛날’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사랑도 세월 따라 흘러가고 그 사람의 이름도 세월 따라 잊었지만, 흘러가는 강물에 비치는 산그림자이듯이 그 “옛날”은 그대로 내 가슴에 남아 덧없이 흐르는 세월의 강물에 고스란히 비친다.
  ‘그 사람’. 나 이제,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어 그 눈동자 입술은 더 이상 내 눈에 있지 않고 내 입술에 있지 않고 내 가슴에 있는 그 사람. 내 삶의 이유 있음으로 인하여, 내 마음 한겨울일 때도 밤마다 쌓이는 그리움의 눈밭은 한 자씩이나 더 깊어질 그 사람.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언제 읽어도 서른한 살에 요절한 박인환이 그때 나이에 어떻게 이런 시를 남겼을까 싶은 절창이다. 멋있다…. 저릿하다…. 찌르르 어디가 아프다. 어떤 파동 하나가 온몸을 휘감았다 천천히 사라진다. 박인환. 그는 비록 이립(而立)에 비애와 고뇌에 찬 삶을 마감하고 우리 곁을 떠났으나 지천명의 심금을 울리는 이와 같은 시를 남겼으니 문학과 예술이란 이름으로 부럽다고 할까.

 

☐ 이승주 : 1995년 ⟪시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물의 식도』 『위대한 표본책』 『내가 세우는 나라』 『꽃의 마음 나무의 마음』이 있으며, 시 창작 이론서로 『현대시창작백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