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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평전 >11. 마산 이주와 천상병과의 만남, 그리고 「꽃」의 탄생 -김춘수 시인의 마산시절(1)

작성일 : 2023.06.18 02:09

<김춘수평전11>

 

마산 이주와 천상병과의 만남, 그리고 의 탄생

-김춘수 시인의 마산시절(1)

 

양 왕 용

 

 

통영중학교 교사를 하면서 청마의 영향권 안에 있던 김춘수 시인은 그의 처가가 있는 마산중학교(6년제)로 직장을 옮기면서 일단 청마 곁을 떠난다. 김 시인의 기억과 연보에 의하면 1949년부터 1951년까지 마산중학교에 근무하였다 하고 있으나 그 기억의 정확성과 마산에서의 삶의 모습과 흔적을 찾아보기 위하여 202177일 장마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권오주 시인의 차로 아내와 함께 마산에 갔다. 마산고등학교와 마산문학관, 그리고 김 시인의 처조카인 명유진 사장님의 안내로 중성동 58번지 김 시인의 집과 처가(중성동 642번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방문의 결과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들과 다른 점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임채환 마산고등학교 교장의 친절한 안내로 마산고등학교((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심온길 33) 해방 직후의 발령대장에서 김 시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단기 42519184단계의 호봉으로 경남도지사의 명에 의하여 교사로 발령받아 마산공립중학교 근무를 명함>( 이 사실은 임미란 마산중학교 교장이 사진으로 보내온 마산중학교에 보관되어 있는 또 다른 기록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 있음)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4251년을 서기로 바꾸면 1948년이다. 따라서 김 시인의 기억보다 1년 혹은 6개월 전에 통영중학교에서 마산중학교로 옮긴 것이다. 물론 그 당시는 아직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되기 전이고 신학기 시작이 미군청청의 교육제도가 청산되기 전이라 9월 학기였다. 그리고 나서 195191일에 학제 개편된 시기에는 김 시인은 6년제의 하급 학년이 분리된 중학교 즉 마산서중학교(1955년 마산중학교로 개명)와 마산고등학교 겸무를 명하면서 14호봉으로 호봉이 개편된다. 마산고등학교 발령원부에는 다시 단기 4285(1952) 33115호봉으로 마산고등학교 근무를 명하고 있다. 따라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개편된 195191일부터 마산서중학교에서 중학생을 가르치다가 7개월 뒤에 마산서중 겸무를 면하고 마산고등학교 발령을 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마산고등학교 16(1954-57) 졸업생인 윤재근(1937-) 평론가의 개편된 마산고등학교에 김 시인은 오래 근무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는 증언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 시기의 동료로는 이석(본명 이순섭)(1927-2000)시인(1948-62년까지 근무)이 아직 시단에 데뷔하지 않은 채(현대문학19556월호,7월호,19561월호 3회 천료) 있었고, 김남조(1927-)시인(1950연합신문데뷔)19526314호봉 교사로 임명되어 16개월 같이 있게 된다. 김춘수 시인은 1953915일 김남조 시인과 같은 날 <교육 공무원법 제53조로 준하는 국가공무원법 제44조 제 3호에 의한 일반적 감원에 의하여 그 직을 면함>이라는 요건으로 마산고등학교를 떠난다. 김남조 시인은 서울의 숙명여고로 떠나고 김춘수 시인은 1960년 진주에서 마산으로 옮긴 해인대학(경남대학교 전신) 조교수로 발령 받을 때까지 부산대학교, 연세대 부산 분교, 해군사관학교, 진주의 해인대학 등에서 강사 생활을 하게 된다. 김 시인은 그 때 고등학교 교사를 그만 두게 된 경위와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고등학교 교사를 몇 년 하고 나니 진이 다 빠지는 듯 맥이 풀리고 한없는 권태가 왔다. 그래서 나는 대학에 진출하여 전공의 과목을 맡아 심신의 활기를 찾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한시도 교사라는 직책에 붙어 있기가 힘겨웠다. 나는 사표를 냈다. 그때 마침 부산대학에 시간을 얻어 출강하게 돼 있었다. 요산 김정한 선생께서 주선해 주셨다. (김춘수 자전소설 꽃과 여우p235)

 

윤재근 평론가(1937-)와 부산에 있는 마산고 출신인 황하수(1933-)시인 등에 의하면 이들 말고도 이원섭(1924-2007), 김상옥(1920-2004) 시인들에게도 수업을 받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러나 발령원부와 마산고등학교 역사관에는 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아마 이들은 경남도지사 발령의 교사가 아니라 학교장 발령의 강사로 근무한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본다. 이상과 같이 김 시인은 19489월부터 19539월까지 5년 동안 마산중고등학교에 근무한 셈이다. 아마 중간에 6·25 전쟁기라는 혼란기가 들어 이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 시인이 간직하고 있는 마산고등학교 시절의 사진으로는 4285(1952)3월 제1(통산11)졸업기념 사진과 그 무렵의 교직원 사진이 있다. 졸업사진에는 1936년부터 2002년 개축하기 전까지의 마산고등학교 본관을 배경으로 앞에서 둘째 줄 왼편에 두 손을 깍지 낀 채 옅은 색의 양복 윗저고리와 검은 색 바지를 입고 김 시인이 단정하게 서 있다. 이 시절의 교장은 이상철(1913-1961) 교장으로 마산고등학교 교가의 작사자이다. 교가의 작곡자는 윤이상(1917-1995) 작곡가이다. 이상철 교장은 통영초등학교 17회 출신으로 윤이상(22) 김춘수(25) 두 분의 선배이기도 하다. 윤이상은 그 당시 부산고등학교 음악교사였는데 김 시인과는 해방직후 통영문화예술협회에서 막역한 사이였다. 마산에도 작곡가가 있었을 것인데 윤이상을 택한 것은 이상철 교장과 김 시인이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당시의 일화를 오래 전 노재봉(1936-) 총리(마산고 12)의 글에서 읽은 적이 있다. 노 총리는 모 주간지에 훌륭하신 은사를 소개하는 글에서 이 교장을 소개하고 있다. 이 교장은 1950216일부터 1956327일까지 근무한 제 9대 교장으로 195191일 중고등학교가 분리된 뒤의 첫 교장으로 마산고등학교를 명문고교로 만든 훌륭한 교육자로 알려져 있다. 노 총리는 1953년 마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정치학과를 진학하여 1957년 졸업하였다. 따라서 이 교장 시절의 우수한 제자이기도 하다. 그가 전한 일화의 내용은 이러하다. 이 상철 교장이 어느 날 아침 교무회의 석상에서 지각이 잦은 교사들을 질책하자 어느 교사가 일어나 불면 소리로 김춘수, 이원섭 선생도 지각이 잦은데 왜 우리만 야단칩니까?”라고 항의하자 이 교장은 한마디로 그 사람들은 시인아니가!” 로 일축했다고 한다.

 

김춘수 시인의 마산고등학교 시절의 제자 가운데는 천상병(1930-1993)시인과의 관계가 특별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김 시인은 직접 글로 밝히고 있다.

 

49년 통영중학에서 마산중학으로 전근하여 나는 5학년의 담임을 맡게 됐다. 그 때는 중학이 6년제다. 고등학교로 갈라져 나가기 전이다. 내 반에 천상병이란 학생이 있었다. 한눈에 곧 인상에 남는 그런 학생이다. 어딘가 돋보여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 반대다. 너무 못나고 하도 꾀죄해서 그렇다. 그런데 이 학생과 나는 이내 특별한 교분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서는 나를 상병이 막아섰다. 뭐냐는 표정을 짓자 그는 절을 한번 꾸벅하고는 더듬거리면서 어렵게 어렵게 말을 끄집어낸다. 뭔가 나에게 부탁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얄팍한 노트 하나를 내 손에 잡혀 준다. 읽어봐 달라는 눈치다. 일본말 억양이 가시지 않은 말솜씨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때 그는 일본에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호왈 귀국 동포다. 일본에서 중학을 다니다가 갓 전학했을 때다. 내가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을 어디서 들었는지 혹은 내 시를 어디서 봤는지 하여간에 나를 시인을 알고 나에게 습작들을 평가받고 싶었는 듯하다. 나는 교무실에서 그가 나에게 느닷없이 잡혀 준 그 얄팍한 노트를 펴보며 첫 장부터 긴장하게 됐다. 그의 시구들은 날카롭고 신선했다. 열 댓 편 되는 시들을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건 하나의 발견이랄 수 있었다. 그처럼이나 어줍던 그의 말솜씨와는 전연 딴판이다. 나는 이들 시중에서 몇 편을 골라 청마 선생께 보내드렸더니 곧 간단한 독후감과 함께 문예에 추천하겠다는(본인만 승인한다면) 전갈이 왔다. 문예는 그 당시의 유일한 문예지다. 나는 곧 상병을 불러 청마선생의 뜻을 알렸더니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꾸벅꾸벅 나에게 몇 번이나 절을 다 했다.(강현국 편 우리 어느 둑길에서 다시 만나리-시인 김춘수의 문학과 삶 <2019,학이사>p310-311)

 

김춘수 시인은 마산중학 5학년 학생 천상병과의 만남을 그 때의 기억을 이렇게 되살려 실감나게 밝히고 있다. 이 글은 1990년대 중반 대구에서 발간된 계간지 시와 반시에 발표된 글이라 김 시인이 50년 전의 체험을 밝힌 글이다. 그래서 다소 그 정확성이 문제가 될 수는 있다. 천상병은 1949년 대구에서 발간된 문예지 죽순(통권11,1949.6.7.월호)공상,피리등이 추천되었고 마산중학을 졸업(195173)한 직후인 19521월호문예강물이 청마의 추천으로 다음호인 5,6월호에 갈매기가 모윤숙의 추천으로 등단한다. 마산중학 시절에는 죽순에 추천되고 그 뒤에 대학 신입생 시절문예에 추천되었으며 이 둘 다 김 시인과 청마가 관여한 것은 틀림이 없다. 어쩌면 작품은 마산중학 졸업 전에 보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발표는 천 시인이 피난지 부산에 와 있던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한, 대학 1학년 시절이다. 어찌됐던 천상병 시인은 마산중학 5학년 시절 김춘수 시인을 담임교사로 만나 시단에 일찍 데뷔한 것이다. 김 시인의 앞의 글에 의하면 학생 천상병은 시를 인정받은 뒤에는 방과 후 교사 김춘수의 가방을 들고 중성동 58번지 김 시인의 집을 수시로 드나들었으며 졸업반 때에는 6·25 전쟁 중 마산에 주둔한 미군부대의 통역을 하면서도 자주 김 시인의 집을 찾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진주농림학교 재학 중인 1949-5010대 소년으로 문예(1949.12<비 오는 날>,1950.4<코스모스>,1950.6<강가에서>)에 데뷔한 이형기(1933-2005) 시인이 데뷔 후 마산으로 김춘수 시인을 뵙기 위해 갔더니 마산중학 재학 중인 천상병 시인을 소개하여 만난 바 있다고 1980년대 초반 이 시인의 부산산업대학교(경성대학교 전신) 교수 시절 필자와 강은교 시인 셋이서 만난 사석에서 들은 바 있다. 이 시인은 그 때부터 천상병 시인의 천재적 기질을 발견하였다고 술회하였다.

 

김 시인이 마산고등학교 교사 시절에 이룩한 성과로 문학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 하나 있다. 그의 대표작이자 한국인의 애송시이기도 한 을 이 무렵에 창작한 것이 다. 이 작품의 창작 과정에 대하여도 역시 그가 글로 밝히고 있다.

 

이 시는 1950년대 초에 씌어졌다. 내가 중학교(6년제)의 교사로 있을 때다. 군에 교사를 내주고 임시교사인 판자 교무실에서다. 그날은 남은 일거리가 있어 나 혼자 교무실에 늦게 남게 됐다. 해가 다 지고 책상머리가 어둑어둑하다. 저만치 누구의 책상일까, 책상 한쪽에 놓인 유리컵에 하얀 꽃 한 송이가 꽃혀 있다. 그 빛깔이 너무도 선명하다. 그러나 그 빛깔은 곧 지워질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순간 시상이 떠오르고 시의 허두 한마디가 나왔다.(김춘수 자전 소설 꽃과 여우p233)

 

여기서 김 시인이 언급하고 있는 6년제 중학교 교사로 있을 때는 사실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1950615일 개정된 교육법의 고등학교령에 고등학교가 3년제로 개편되고, 195191일 중고등학교가 분리되어 앞에서 살펴본 대로 김 시인은 1952331일자로 마산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된다. 그리고 이 무렵인 6·25 전쟁기에 마산고등학교 교사는 1950715일부터 1955716일까지 부상병 수용병원으로 징발되고 5년 동안 가교사에서 수업하게 된다.

이 시의 창작경위에 대한 다른 이야기로는 그 당시의 동료인 여교사 책상에 문예반 학생들이 아침마다 꽃 한 송이를 컵에다 꽂아 두었는데 그 꽃이 모티브가 되어 이 시가 탄생되었다고도 한다.

의 첫 발표는 625전쟁이 끝나지 않은 1952115일 대구에서 발간된 시와 시론에서였다. 이 책은 대구시 동인동 대학당이 인쇄하고, 삼덕동 전선문화사의 발행으로 돼 있다.(부산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이순욱 교수 자료 제공) 발행인은 유치환 시인이고 편집은 구상 시인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시와 시론>동인회의 동인지로 김 시인의 시에 대한 첫 산문인 시 스타일 시론試論도 여기에 발표하였다. 이 동인회가 결성된 계기는 그 당시의 지방 유일의 종합예술제인 진주의 영남예술제(1959년 개천얘술제로 개칭)에 모인 설창수, 구상, 이정호, 김윤성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고 대구에서 언론계에 종사한 구상 시인이 주도하여 동인지를 내게 된 것이다. 동인지에 시를 수록한 시인으로는 박두진, 이호우, 김윤성, 박목월, 김요섭, 조병화, 이설주, 유치한, 김춘수, 이원섭, 이덕진(게재 순) 등이었다. 이 동인지는 창간호가 종간호가 되고 몇 해 후에 같은 이름의 동인지가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나오기는 했다.

그런데 여기에 발표된 첫 작품 은 뒷날 시집에 정착된 작품과는 다소 차이가 난다. 그 원형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 당시에는 세로 편집 체재였다.

 

1.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물상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2.

 

내가 그이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3.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意味가 되고 싶다

 

이 시는 김 시인의 시집 꽃의 소묘素描(1959.6)와는 몇 군데 다른 곳이 있다. 우선

중간에 아라비아 숫자로 1. 2. 3. 번호를 매긴 것이 다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2.에서 셋째 연과 넷째 연이 한 연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다음 시집인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1959.12)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한 연으로 정착되었기 때문에 시집 꽃의 소묘 에서 분리된 것이 잘못 된 것이라고 보아도 될 것 같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차이는 첫 연 셋째 행의 물상이라는 시어이다. ‘물상의 사전적 정의는 자연계의 사물의 형태혹은 사물이다. 따라서 꽃을 지극히 감정이나 정서가 배제된 자연계에 존재하는 물건으로만 보고 있다는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 바로물상이라는 시어이다. 그러다가 앞의 두 시집에 정착하면서 물상이 몸짓으로 개작되어 미세하나마 감정이나 정서가 개입될 여지를 보여준다. 달리 말하면 존재론적이라는 철학적인 시로만 이 시가 끝나는 것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해주고 싶은 꽃, 혹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이름을 불리어지고 싶은 설레임의 시편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데까지 이른다. 그러다가 맨 마지막 연의 마지막 행에 있는 시어 意味눈짓’(1974년 민음사 오늘의 시인총서 處容부터)으로 바뀐다. 1960년대 중반 연작시 타령조에서부터 시작되는 無意味詩경향에서 볼 때 意味라는 이 시에 들어 있는 두 번째 한자어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 자신이 의도적으로 눈짓으로 바꾼 것이다. 이 시의 확정된 텍스트로 김 시인의 생가와 가까운 통영의 남방산 입구에 세워져 있는 을 다시 인용해 보기로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자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렇게 물상몸짓으로 意味눈짓으로 개작되면서 이 시는 본래의 주제인 사물의 존재에 대한 사유라는 존재론적 시로부터 사랑의 시편으로 확장되어 대한민국 국민의 애송시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창작 시기가 김 시인이 3년제 마산고등학교로 발령난 1952331일부터 그 당시의 책의 출판 사정으로 보아 시와 시론이 발간되는 11월의 상당한 이전에 창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김남조 시인이 마산고등학교에 부임한 195263일과도 겹친다. 따라서 앞에서 제기한 동료 교사의 책상에 놓인 꽃병의 꽃에 등장하는 교사가 김남조 시인일 가능성도 있다. 필자는 대학원 시절 김 시인으로부터 김남조 시인과 옆 자리에 앉았으며 꽃병 이야기는 듣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은 정황으로 볼 때 마산고등학교는 본교사가 아닌 가교사에서 시가 창작되었지만 1936년 개교 당시부터 지금까지 그 자리에 있는 마산고등학교는 문학사에 남을 김춘수 시인의 의 탄생지이고 김 시인의 제자인 천상병 시인이 시인으로 데뷔하게 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산고등학교 탐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임채환 교장에게 2022년이 스승 김춘수 시인 탄생 100주년이니 그것을 기념하여 과 제자 천상병 시인의 대표작 시비를 나란히 세우는 것도 뜻깊은 일이라고 건의하였다.

비록 지난 2022년에는 스승과 제자 시비건립이 무산되었으나 김춘수 시인 탄생100주년을 기념한 시비가 마산고등학교 교정에 20238월말까지 완성할 것이라는 임채환 교장의 전갈이 왔다. 한국시문학사상 최초의 스승과 제자의 시비라는 점에서 건립 후 지역 명소가 될 것이라 기대가 된다.

 

*양왕용;시인, 부산대 명예교수,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동북아기독교작가회의 한국측 차기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