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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06.18 02:06
1-8. 패자부활전의 윤리
/양선규
나이 들면서 용모가 변한다. 노화 현상으로 전체적으로 볼품이 없어진다. 피부에 탄력이 떨어지고 주름이 잡히면서, 덩달아 표정도 어두워진다. 내면의 피부도 탄력을 잃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혹, 나이 드니까 오히려 얼굴이 보기 좋아졌다는 말을 듣는 이들도 있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내 경우가 그렇다. 젊을 때 워낙 사납게 살았던 터라, 오랜만에 만나는 이들에게서 “많이 부드러워졌네, 오히려 지금이 낫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래서 한술 더 떴다. 수염을 조금 길렀다. 좀더 부드러워지자는 거였다. 일단 성공적인 것 같다. 학과 후배 여교수님한테서 “다른 남자들은 수염 기르면 꼴볼견인데 선생님은 훨씬 더 보기 좋아요”라는 말도 듣고, 평소 설명 욕구가 강한 학과 후배 남교수님한테는 “하관이 짧아서 그 점을 보완하시려고 턱수염을 기르시는 거죠?”라는 말도 듣는다. 내가 봐도 그런 것 같다. 본디 작품의 의미는 작가의 손을 떠나면 독자의 것이 되는 법이다. 독자들의 작품평을 작가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요즘은 수염을 깎고 싶어도 못 깎는다. 독자들이 이미 판정을 내린 작품을 다시 고치는 것은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기분이 좋다. 마치 패자부활전에 출전해서 시원하게 한 판 이긴 기분이라고나 할까?
패자 부활전이라는 말이 나와서 그쪽에서 한 번 생각을 해 보면, 소설은 주로 패자 부활전을 다룬다. 소설의 주인공은 흔히 하는 말로 문제적 개인(問題的 個人)들이다. 그들은 항상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구박받고 고군분투한다. 또 그들 중에는 영구히(소설 안이지만) 사는 이도 있고, 잠깐 소설 속으로 나들이를 나왔다가 (독자의 망각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이도 있다. 전자는 둥근 인물(입체적 인물)이라고 부르고 후자는 납작한 인물(평면적 인물)이라고 부른다. 보통은 전자는 장편소설의 주인공이고, 후자는 단편 소설의 주인공이다. 물론 꼭 그렇다는 건 아니다. 보통은 그렇다는 말이다. 예외 없는 법칙은 없는 거니까 너무 일반화(법칙화)할 필요는 없다. 또 보통 좋은 소설이라면, 소설 속의 주인공이 소설 속에서 한 번 이상 변한다. 두 번 세 번은 시간 관계 상 좀 어려울 때도 있다. 안 변하고 그냥 제 모습으로 나대는 이들은 성격이나 행동이 특별히 유별나면 모르되, 독자들에게 큰 재미를 주지 못한다. 스테레오 타입의 인물(‘착하지만 가난한 성냥팔이 소녀’처럼 상투적인 반대짝으로 구성된 성격 등)은 그 중에서도 가장 값싼 인물유형이다.
주인공이 소설 속에서 변한다는 것은 무언가 작가 쪽에서 독자 쪽으로 강력하게 보내는 메시지가 있다는 것이다. 독자들에게 등장인물처럼 ‘너도 좀 변해라’라는 주문일 때가 많다. 물론 뒷북을 치는 경우도 왕왕 있다. 독자들은 이미 다 변해 있는데, 작가가 그제야 변화의 조짐을 읽고 ‘나는 변했다(변한다)’를 남발할 때도 있다. 그러면 시대착오적이다라는 평가를 받고 퇴물이 된다. 그래서 작가들은 항상 독자보다 조금 일찍 변해야 한다. 젊을 때 재미있게 읽은 소설 중 「달밤」(김주영)이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 역시 패자부활전을 다루고 있으며 한 번은 변하는 둥근 인물이 등장하고 작가가 독자에게 ‘너도 좀 변해라’라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고 있는 소설이다.
「달밤」은 흔히 하는 말로 민중적 삶을 옹호하는 소설에 속한다. 민중들의 삶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고 그들의 삶이 좀 더 나은 것으로 상향 조정되기를 바라고 요구하는 소설이다. 독자는 주인공 화자와 함께 민중을 이해하는 탐색의 도정에 나서야 한다. 그 과정이 참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는 소설이다. 독자는 그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다가 삶의 한 중요한 ‘비밀’을 발견한다. 찾을 ‘비밀’이 많은 것은 (주인공 화자 ‘나’ 같은) 순진하고 미숙한 독자다. 「달밤」은 그 ‘비밀’을 찾는 과정을 소설적으로 잘 보여준다. 경험의 구체성을 동반한 소재의 힘, 반전이 있는 구성의 힘, 주제의 건전성 같은 것으로 단편소설로는 보기 드물게 크게 성공하고 있는 수작(秀作)이다. 주인공 ‘나’는 순진한 공무원이다. 무연탄 저탄장에서 자주 발생하는 ‘탄 빼돌리기’를 막는 검수원으로 문제의 공간으로 파견된 인물이다. 그가 정득수의 처를 만나고 ‘비밀의 문’으로 들어선다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 줄거리다. ‘나’의 시선에 의지해 줄거리를 파악하던 순진한 독자들은 정득수의 처가 어떤 인물인지 전혀 모른다. 그냥 화냥기 있는 여자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소설의 후반부로 진입하면서 인물들이 바뀌기 시작한다. ‘나’가 비로소 주인공의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한다. ‘나’는 여인네들의 ‘달밤의 작업’에서 충격을 받으면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 난다. 한 밤중에 벌이는 그들의 도둑질, 일사불란한 단체 노동이 온몸으로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민초들의 무용(舞踊)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저탄장의 노무자들은 기차로 실어가는 탄을 빼돌리고 거기다 그 무게만큼의 물을 쏟아 붓는다. 그것은 ‘작은 사람들(petites gens)’이 기지를 발휘해 ‘큰 사람들’이 마음대로 그어놓은 생존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그들 나름대로 지지 않고 살아나가는 방법이었다. ‘나’는 그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띠고 파견된 ‘큰 사람들’의 하수인이다. 그러나 ‘큰 사람들’의 입장에서 (실을 때는 정량이었는데) 목적지에 도착하면 탄이 줄어드는 까닭을 밝히기 위해 비리를 캐던 ‘나’는 오히려 달밤에 아낙네들이 하는 그 ‘작업’에서 아름다운 삶의 동작, ‘무용’을 본다. 그 과정에서 저 역시 ‘작은 사람들’이며, ‘작은 사람들’의 생존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건강한 도둑질을 나무랄 일이 아니라는 각성을 하게 된다. 민중으로 산다는 것의 그 아름다움과 ‘깊고 깊은 의미’에 눈뜨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입에서 나온 ‘무용’이라는 말이 그런 인식의 변화를 암시한다. ‘나’에게 그 새로운 인식의 눈을 선사한 것은 정득수의 처다(그녀는 그 집단에서 ‘행실 나쁜’ 문제적 개인으로 지목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집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숨은 영웅이며 이 소설의 실제적 주인공이다). 그녀는 눈치를 챈 ‘나’를 강가로 불러내 그녀에게 부여된(공동체가 부여한) ‘작업’을 성실히 완수한다. 몸으로 ‘나’를 매수한다. 그러한 작품 속의 맥락은 그녀를 공동체의 일체적인 연대감 속에서 그 존재성을 부여받는 ‘신성의 전문가(specialist of the sacred)’로 이해하게 만든다. ‘신성의 전문가’는 자신의 신열(ecstasy)을 집단공동체의 문화적 갱신을 위해 활용한다. 정득수의 처는 자신이 지닌 신열, 곧 ‘에로티즘’으로 집단공동체의 위기를 막아낸다. ‘나’는 정득수의 처에 의해 이미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된 자신의 처지를 알고 사표를 내지만, 소설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의 백미는 마지막의 반전이다. 정득수의 처, 그녀의 역할이 작가에 의해서 하나의 상징, 즉 제 한 몸으로 감싸는 상징으로 의미가 부여되는 마지막 장면이 진짜 마지막 반전이다. 정득수의 처를 찾아간 ‘나’에게 그녀가 한 말은 독자들을 향한 작가의 일침이기도 하다.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픈 메시지, “너희도 좀 변해라!”라는 요구가 거기서 함축적으로 드러난다. “이 양반, 나한테 재미붙였는가봐”, 정득수의 처가 내뱉은 그 한 마디가 이 소설을 양보 없는 민중소설로 만든다. 「달밤」은 어쩔 수 없이 명불허전(名不虛傳), 우리시대의 수작(秀作)이 되고 만다.
어느날 누가 다시 내 목덜미를 가만히 잡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였다. 그러나 그녀는 예전처럼 내게 <저리로 갑시다>라고 말하진 않았다. 그녀는 내 등을 툭툭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양반, 나한테 재미붙였는가봐.」
여자는 입술을 실쭉하며 저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러나 난 사표를 내던진 것을 결코 후회하진 않았다. 나는 저탄장으로 올라가는 여자의 건강한 두 어깨와 다리와 팔을 한참이나 어둠 속에서 쳐다보며 서 있었다. 또 달이 뜰 것이었다.
<소설가/ 대구교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