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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06.10 01:56
<김춘수 평전 10>
광복과 귀향 그리고 청마와 다시 만나다
-김춘수 시인의 광복 직후의 통영 시절
양 왕 용
불령선인으로 낙인 찍혔던 김춘수 시인에게는 일제의 패망으로 인한 해방은 감격 그 자체였다. 그는 1944년 여름 결혼 이후 마산 중성동 64의 2번지 처가에서 징용을 피해 숨어 살다시피 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그의 표현대로 진짜 해방의 날을 맞았다. 그날의 감격과 고향 통영으로의 귀향과 통영에서의 활동의 소회를 글로 남겼다.(김춘수 자전 소설 『꽃과 여우』,199.7민음사 pp205-217)
8월 15일, 그날 마산 처가에서 김 시인은 러닝 셔츠 바람으로 온 종일 거리를 쏘다니고 또 쏘다녔다. 그리고 속에 맺힌 응어리를 토해내듯 고함을 질러대기도 했다 그 해 가을 그는 처가에서 낳은 갓난 애기 큰 딸을 데리고 부인 명숙경(1926-1999) 여사와 함께 고향 통영으로 돌아왔다. 본가에는 부모님과 할머니 차신기 (1881-1960)여사가 고향집을 지키고 있었다. 김 시인의 아버지 김영팔(1903-1968)옹은 서울의 명륜동 집을 김 시인이 결혼한 직후인 광복 직전에 시국도 어수선하고 오르내리기도 거북하여 처분하고 통영에 상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 시인의 큰 딸까지 4대가 한 집에 살게 되었다. 집안의 웃어른인 할머니는 손주 며느리를 사랑스럽기도 하고 가엾기도 하여 며느리보다 더 사랑을 쏟았다고 조카 김용일(1951-) 씨는 할머니 허명화(1901-1968) 여사 생전에 들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렇게 시할머니와 시어머니의 사랑 속에서였지만 층층시하의 시집살이를 하며 명숙경 여사는 둘째 딸 김영애(1947-)과 큰 아들 김영목(1948-)을 연년생으로 낳았다.
김춘수 시인이 고향에 돌아와 처음으로 한 일은 광복 직전 만주에서 귀향한 청마 유치환(1908-1967) 시인이 회장으로 광복 한 달 만인 1945년 9월 15일에 발족된 통영문화협회 회원으로 참여한 것이었다. 문화예술협회는 문화동 183번지 청마의 사모님 권재순 여사가 일본사람들이 운영하던 유치원을 인수하여 <문화유치원>이라는 간판을 달고 운영하던 유치원과 그 옆 사택 2층 청마가 ‘영산장’이라 이름부친 서재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협회 산하에 문학부, 연극부, 음악부, 미술부 등 4개 부서를 두었는데 회원 면면을 보면 그 명성이 대단하다. 회장 유치한, 간사 윤이상(1917-1995)작곡가, 총무 김춘수(1922-2004)시인을 중심으로 소설가 김용익(1920-1995), 시조시인 김상옥(1920-2004),시인 배종혁, 극작가 박재성(1915-1947), 연출가 김용기. 허창언, 연극배우 서성탄, 작곡가 정윤주( 1918-1997), 서양화가 김용주(1910-1959), 전혁림( 1916-2010), 문화운동가 옥치정, 김용오, 박유홍, 정명윤 등 많은 젊은이들이 활동하였다. 그들은 향토 민속극 「민족의 밤」을 무대에 올리고 노래와 춤, 민요와 시낭송을 곁들인 잔치마당을 벌리고 향토연극의 부활을 외치고 나선 소인극단 <문인극회>를 창단하여 연극도 하고 이웃 도시에 원정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문화운동가들은 <문화학원>을 개설하여 한글강습회를 열어 일제에 빼앗겼던 한글 되찾기 운동도 하고 문화재를 발굴하기도 했다.
이 인물 가운데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인물은 통영 최초의 서양화가 김용주 화백이다. 왜냐하면 그는 김춘수 시인의 할아버지 김진현 옹의 첫 번째 부인의 큰 아들 김홍수의 큰 아들 즉, 김 시인 가문의 종손이기 때문이다. 김 시인의 할머니가 세 번째 부인으로 시집을 오니 큰 며느리가 더 나이가 많았다는 그 며느리 고도선 여사의 손자인 것이다. 그래서 김 시인보다 손아래이지만 나이는 12세나 많다. 김화백은 어릴 적에 아버지 김홍수를 여의었으나 김진현 옹 종부인 할머니 슬하에 잘 자라 김 1926년 통영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명치학원 중학부로 유학을 떠나 소설가 김동인(1900-1951)이 다닌 적이 있는 카와바다 미술학교 양화부를 졸업(1929-34)하였다. 졸업 후에도 그 학교 인체연구실에서 6년 동안 연구하면서 학생들도 가르치다가 1940년 통영으로 귀향한 정통 서양화가였다. 그는 유치진, 유치환, 유치상 형제 ,시조 시인 장하보 등 주로 김춘수 시인의 선배 문인들과 교류하며 만석군의 손자였기에 항남동 9번지 산언덕에 별도 화실을 마련하여 그 당시의 문화사랑방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김용주 화백은 술은 잘 하지 못했으나 술을 자주 샀으며 일본 유학시절에 배운 유럽 역사와 신화에 대해서도 해박하여 좌중의 대화를 이끌었다고 한다. 그가 문화예술협회의 미술부 책임자였으며 해방공간의 경남미술교육을 주도한다. 그리고 6.25 전쟁기에는 이북에서 피난 와 고생하는 화가 이중섭(1916-1956)을 통영에 초대하고 거처와 화실도 마련해 주었으며 그 당시 김춘수 시인도 이중섭을 깊게는 교류하지는 않았지만 집에서 점심식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는 것을 김용일 조카는 가족들로부터 들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래서 김춘수 시인이 나중에 <이중섭 연작시>를 창작할 기반이 이때에 마련된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해 본다. 김 화백은 양달석, 박생광, 박득순, 이석우 화백들과 교류하였으며 통영 출신서양 화가 김형근, 이한우, 정창수, 박종석 등이 그의 문하생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959년 49세 되는 해에 작고하였다. 그는 300여점의 작품을 남겼으며 국리현대미술관, 호암미술관 등에 많은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그가 김춘수 시인처럼 오래 살았다면 김진현 옹의 손자 김춘수 시인처럼 화단에서 이름을 떨침은 물론 국전 대통령상 수상작가 김형근을 배출한 통영 현대화단이 더욱 빛났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김춘수 시인과 김용주 화백의 기념사업이 통영시의 더욱 중요한 과제가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2021년 6월 14일 필자는 2020년 7월 8일에 이어 두 번째 통영을 방문하였다 2020년처럼 권오주 시인의 차로 아내와 함께 해방 공간 (1945-48년)에 김 시인이 머문 고향 통영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찾아간 <문화유치원>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문덕수 시인이 쓴 『청마유치환평전』(2004,시문학사)을 쓸 무렵에도 흔적을 찾을 수 있었는데 2016년 복원공사가 마무리된 ‘통영통제영 복원공사’로 세병관부터 충무교회까지 확장된 도로와 광장 등으로 인하여 해방공간의 문화유산이자 문화사랑방인 문화유치원과 청마의 ’영산장’은 사리지고 말았다. 다만 몇 장의 사진과 회원들의 유일한 단체사진인 용화사 계곡에서 찍은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김춘수 시인은 이 시절을 비롯한 청마와의 만남에 대하여 여러 번 글을 썼고 심지어 시의 제재가 되기도 했다. 그 가운데 마지막 글이 2002년 9월호 ⟪시문학⟫에 발표된 「행이불언行而不言하는 청마」라는 글이다. 이 글은 문덕수(1928-2020) 시인이 쓴 『청마유치환평전』(2004,시문학사)에 여러 군데 인용되어 있다. 그리고 총체적인 글은 1990년대 중반에 대구에서 나오는 계간지 『⟪시와 반시⟫에 연재된 「나의 예술인 교우록」인데 이 글은 강현국 시인이 엮은 <시인 김춘수의 문학과 삶>이라는 부제가 붙은 『우리 어느 둑길에서 다시 만나리』(2019,학이사)에 전부 수록되어 있다.(pp235-338) 그 가운데 첫머리가 <청마>(pp235-242)편이다. 문덕수 시인의 앞 저서에도<김춘수와의 만남>(pp143-148)이라고 하여 비중 있게 다루어져 있다. 김 시인이 7세 때 21세의 청마 유치환 시인과 권재순 여사의 결혼식 화동을 참여한 1929년으로부터 16년이 지난 1945년의 만남은 통영문화예술협회 회장과 그 실무자 총무로 만났지만 그 만남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 곧 밝혀질 것이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김춘수 시인이 생애 최초의 직장 6년제 통영중학교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하여 수소문 끝에 그 기록이 통영고등학교에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도남로 11번지(봉평동) 통영고등학교를 찾았다. 통영고등학교는 1942년 4월30일 한국인과 일본인이 공학하는 5년제 1학급 공립중학교로 개교하여 해방된 이듬해인 1946년 1월 25일 북신리 현재의 유영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일본인 전용 통영심상소학교 시설로 이전하여 그 해 9월1일 6년제 고급중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51년 8월31일 교육법 개정으로 통영중학교와 통영고등학교로 개편되었다. 김 시인은 1946년부터 1948년 마산고등학교로 전근하기 전까지 근무했다고 알려져 있으니 유영초등학교에서 6년제 통영중학교로 개교한 초창기 시절이다. 점심시간이 끝난 오후에 교장실로 갔다. 전화로 연락한 조카 김용일 선생이 먼저 와 있었다. 김용일 선생의 모교이기도 하고 사전에 연락을 해두어 김재수 교장의 친절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당시의 직원명단이나 근무기록은 보관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개교 당시에 찍은 사진 몇 장과 1946년 9월1일 입학생 학적부가 보관되어 있었다. 이 많지 않은 자료 가운데 김 시인의 족적을 찾을 수 있었다. 선명하지는 않지만 6년제 고급중학교로 개편되면서 당시의 교직원 단체 사진 앞줄에 해방직후 일제에 의하여 시달린 모습이 엿보이는 24세의 김 시인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학적부에 1학년 담임으로 김 시인 특유의 단정한 필적의 한자 이름도 있었다. 김 시인이 보관하고 있던 <4281(1948)년 3월 통영문우회>라는 사진의 20대 준수한 청년으로 변한 모습에서는 해방공간의 김 시인의 면모를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김 시인은 이러한 와중에도 시를 열심히 창작하였고 경남지역 문학행사에도 빠짐없이 참여하였다. 맨 처음의 나들이는 1946년 8월15일 진주의 설창수(1916-1998) 시인이 개최한 「해방기념예술제」에 참석한 것이다. 제주인 설창수 시인이 모시두루마기를 입고 행사를 주재하였으며 자작의 긴 축문도 읽었다. 더운 여름철이라 분지 진주의 폭염에 시달렸지만 밤에는 푸짐한 술잔치상이 차려졌다. 이 분위기에 대하여 김 시인은 「나의 예술인 교우록』 <파성, 동기, 노석, 일영>편 (강현국 편 앞의 책 pp289-299)에 밝히고 있다. 이 예술제는 전국 최초의 지역 종합예술제로 1949년부터 ‘영남예술제’로 1962년에는 개천예술제로 명칭이 변경되어 10월 3일 개천절을 전후한 일주일간 오늘날까지 개최되고 있다. 이 행사에 김 시인은 청마의 권유로 참석했을 것이라고 문덕수 시인은 앞에 소개한 책(『청마유치환평전』p159)에서 언급하고 있다. 진주와는 이렇게 인연을 맺어 진주에서 나오는 연간지 ⟪영남문학⟫(진주시인협회를 확대 개편한 영남문학회의 기관지)5집(1948.6.5.)에 시 「한 송이」를, 6집(1948.10.10.)에 시 「무덤가에서」와 수필「건건록초」를 발표하고 있다. 그리고 마산으로 직장과 집을 옮긴 1949년 이후에도 계속 기고하고 있다. 이 작품들 역시 전집에 수습되어 있지 않은데 이들에 대한 연구 논문 「『영문』 소재 김춘수 미발굴 시연구」(문옥영,『파성 설창수문학의 이해』2011,경진, PP247-270)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는 1946년 초가을 부산에서 개최된 조선청년문학가협회의 경남지부에 통영문인 대표격으로 청마와 같이 참석한 것이다. 해방공간에서 좌익 측의 연합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이 1946년 2월 8일에서 9일까지 ‘전국문학가대회’라는 명목으로 회장은 홍명희(1888-1968)였으나 임화(1908-1953)가 공산당을 등에 업고 장악한 단체가 먼저 결성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두 달 뒤인 4월 4일 3·40대 소장문인들이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하여 종로 YMCA에서 회장 김동리 부회장 유치환, 김달진 으로 결성되었다. 이렇게 결성된 청년문학가협회의 경남지부가 부산에서 결성된 것이다. 부산에서 이들을 처음 맞이한 시인은 김수돈(1917-1966)이다. 그는 후일 마산으로 이거하여 김 시인과 가깝게 교류하지만 이때에는 부산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다. 그 외 마산의 조향(1917-1984) 시인 부산에 머물던 이봉래(1926-1998) 탁창덕 등이었다. 그 뒤에 이 협회에서는 진주, 마산, 부산 등지를 순회하며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광복1주년기념사업으로 국판44쪽의 공동시집 『날개』(1946)를 발간한다. 수록 시인으로는 조향, 김수돈, 탁소성(탁창덕의 필명), 고두동, 오영수, 김달진, 유치환, 정지용, 이봉래, 조봉제 등이었다. 이 시집에 김 시인은 「애가哀歌」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시 역시 전집에는 수습되지 않고 있다.
다음으로는 <魯漫派>라는 동인지를 마산의 조향 시인, 부산의 김수돈 시인과 함께 발간한 것이다. 이 동인지의 결성과정과 내용 등에 대해서 필자는 「조향과 김춘수의 주고 받기」(조향 탄생 100주년 추모문집 『초현실주의 맥과 지평』pp347-363 문학수첩,2017)라는 글에서 자세히 언급한 바 있다. 앞에서 언급한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경남지부 결성 행사에서 만난 세 시인은 조향 시인의 제안으로 동인지 <로만파>(낭만파의 별칭)를 발간하기로 하고 마산에 거주하고 있던 조향 시인이 편집 인쇄 비롯한 제작과 그 경비를 전부 부담하였다. 동인지는 3집(김춘수 시인은 3집으로 기억하고 있으나 조향 시인은 4집으로 기억하고 있다.)까지 내고 종간하였다. 그런데 그 가운데 수습되어 있는 것은 3집뿐이며 막상 그 제목은 『낭만파』이다. 이 3집에 김 시인의 「인형과의 대화」와 「잠자리와 유자」라는 시 2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작품들 역시 전집에는 수습되어 있지 않았다. 이 3집은 경남대학의 한정우 교수가 ⟪지역문학연구⟫5호(경남·부산지역문학연구회,1999)에 <꽃 없는 낭만의 계절>이라는 제목으로 해제를 하면서 공개된 바 있다.
이렇게 김 시인의 초기작 가운데 많은 작품들이 전집에 수습되지 않고 있다. 탄생 100주년을 맞는 내년에는 이것들이 비록 김 시인 자신은 여러 차례 글에서 부끄러운 습작품이라 하고 있으나 연구자나 후학들을 위하여 어떤 형태로든 수습돼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해방 공간의 통영 시절에 김 시인이 한 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 시집 『구름과 장미』(1948.9.1. 서울 행문사 발행 국판 70쪽)를 청마 시인의 서문으로 발간한 것이다. 서울 행문사라는 출판사는 청마의 제2시집 『生命의 書』(1947),3시집 『울릉도』(1948) 4시집 『청령蜻蛉일기』(1949)등을 출판한 곳이다. 따라서 청마의 주선으로 이 시집이 엮어졌을 것이라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서’라는 서문 가운데 일부분을 인용해 보기로 한다.
춘수의 시와 이름은 이미 시에 관심을 가진 이로서는 촉망하고 있는 바이지마는 그는 항상 시작에 있어서 개념적 용어 내지 표현을 피하고 말은 정련함으로써 그로 구성되는 분위기로서 음악이 음악의 세계를 이루듯 시의 세계를 이루려는 노력이 현저함을 알 수 있나니 그러므로 그가 그의 앞길을 스스로 버리지 않는 한 반드시 대성할 것과 시단의 유니크한 자리를 차지할 것을 우리는 믿어 좋으리라.
이 글에서 청마의 예견이 정확했다는 점을 필자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집은 서시 격인 「도상途上」(다음에 발간하는 『제1시집』<1954,문예사>에서는 ‘서시’라고 제목을 바꿈)외 표제작 「구름과 장미」,「소년」 등 28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의 경우 다분히 청마풍이라는 필자의 생각을 1984년 대구에서 개최된 필자와 김 시인의 공개적인 <대담> 석상에서 밝혀 선생님을 당황스럽게 만든 바 있다. 그 전문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가자, 꽃처럼 곱게 눈을 뜨고,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원한의 그
눈을 뜨고 나는 가자. 구름 한점 까딱 않는 여름 한나절, 사방을
둘러봐도 일면의 열사熱砂, 이 알알의 모래알의 짜디짠 갯내를
뼈에 새기며 뼈에 새기며 나는 가자.
꽃처럼 곱게 눈을 뜨고, 불모의 이 땅바닥을 걸어가 보자
-「서시」전문(현대문학사 시전집, P47)
(양왕용;시인,부산대 명예교수,<사>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동북아기독교작가회의 헌국측 차기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