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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평전 > 9.느닷없이 다가온 감방체험과 불령선인으로서의 삶 -김춘수 시인의 동경 시절(3)

작성일 : 2023.06.04 11:45 수정일 : 2023.06.04 11:49

<김춘수 평전 9>

느닷없이 다가온 감방체험과 불령선인으로서의 삶

-김춘수 시인의 동경 시절(3)

 

김춘수 시인이 일본대학 시절의 감방체험에 대하여 에세이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후반이다. 그 뒤에 두 차례 더 썼으며 그것이 모두다 에세이집에 수록되어 있다. 그 첫 번째가 제2산문집 오지 않는 저녁(1979.4.20. 근역서재)에 수록된 달아나는 눈(문장사 김춘수전집<3> 수필pp170-173)이고, 다음은 예수에 대한 에세이집인 하느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1985.12.14.,현대문학사 pp95-103)에 수록된 나를 스쳐간 그<>이다. 그리고 가장 길게 언급된 것이 자전적 소설 꽃과 여우(1997.1.25.민음사)<여우의 장>(4)(pp185-202)이다. 그리고 대담에서도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강현국 편저 우리 어느 둑길에서 다시 만나리2019. 학이사 pp191-193 수록) 이 네 군데가 각각 다소 차이가 있으나 주로 유학생으로 가장하여 가와사키 항구 하역장에서 그에게 접근하여 반일본제국주의 발언을 하게 한 후 그를 일본헌병대에 넘긴 한국인 헌병보조원에 대한 이야기와 감방체험의 고통에 대하여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 네 가지를 바탕으로 그의 감방체험의 전말을 구성하여 보기로 한다.

 

194212월 겨울방학이 막 시작된 어느 날(19404월에 입학했으니 대학 3학년을 마친 시기이다.) 김춘수 시인은 동경 세다가야世田谷 하숙집에서 귀성할 짐을 꾸리고 있었다. 그 때 2층 그의 하숙방에 하숙집 아주머니가 올라왔다. 그녀는 오쿠니노 하도가 소도니 키데이마스(고향사람이 밖에 와 있습니다라고 일러 주었다. 김 시인은 누군가 싶어 곧바로 내려가 보았다. 키가 훤칠하니 큰 그 또래의 청년이 하숙집 현관 맞은편 길가에 서 있었다. 김 시인은 그를 알아볼 수 없었다. 명함을 내 놓는데 야스다安田이라는 일본 성으로 돼 있었다. 그리고 요꼬하마橫濱 현병대 소속 헌병보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는 참고로 물어볼 말이 있으니 잠깐 요꼬하마까지 갔다 와 달라는 것이었다. 김 시인은 방에 다시 올라가보지도 못하게 하여 꾸리던 짐을 그대로 두고 입은 옷차림으로 그를 따라 요꼬하마 헌병대까지 가기 위하여 끌려가다시피 성선省線에 올랐다. 40분 동안 가는 차안에서 비로소 그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명함에는 일본사람으로 돼 있지만 분명히 서북사투리를 쓰는 한국 유학생이었다.

 

동경과는 지척의 거리에 가와사키川崎라고 하는 항구가 있다. 화물선이 거기서 짐을 풀기도 하고 싣기도 하였다. 자주 석탄배가 들어왔다. 그 때 김 시인의 하숙집 근처 이웃에 전남 목포 출신 고학생 둘이 있었다. 그들은 토요일 오후 늦게부터 일요일 오전까지 석탄 하역 작업을 하면 한 주일의 생활비를 벌 수가 있었다. 그런데 사실 김 시인은 그들과는 친한 사이도 아닌데 그해 겨울 그들과 함께 두어 번 하역작업을 하였다. 그럴 필요는 없었으나 귀성할 여비나 마련하고 화물선에 대한 호기심도 있고 해서 우연히 그 일을 하게 되었다. 야간 석탄 하역 작업은 상상외로 고된 작업이었다. 한 시간쯤 일하면 10-20분 정도 쉬게 되었다. 그 때에 한국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 한국말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김 시인은 같이 간 고학생 둘을 포함하여 5-6인이 모여 천황제도, 모국의 총독 정치, 대동아전쟁 양상, 한국 유학생들의 처신 등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일행 중에 성이 안이라는 평양 출신의 중앙대학 다닌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 학생이 이야기를 주도하면서 우리 일행은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선에서 김 시인을 끌고 가다시피하고 있는 야스다 헌병보가 바로 그 유학생이었다.

 

잠깐 물어볼 것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김 시인은 보름 동안 지하의 독방에 수감된 채 아무 기척도 없이 지내야만 하였다. 한겨울의 헌병대 독방은 가만 앉아 있으면 당장 동상이 걸릴 정도로 차가웠다. 그래서 자의반타의반으로 엉덩이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보름을 지내자 김 시인을 불러내어 심문을 시작하였다. 그 자리에 현병 보조인 안가는 보이지 않았다. 헌병군조의 첫마디가 넌 오오모노巨物이야였다. 김 시인 앞에는 그 동안 수집한 그의 편지, 습작 뭉치, 심지어 신문에 한 낙서까지 오려놓고 있었다. 그러면서 심문과 갖가지 고문이 이어졌다. ‘너는 노동판에 나갈 필요가 전혀 없는 형편인데 유학생과 노동자를 선동하기 위하여 일부러 나간 배후라는 것이 심문의 요지였다. 갖가지 고문을 하면서 무슨 결사 조직 같은 것을 가지고 있거나, 두 고학생들에게 돈을 주면서 조종하고 있다고도 하였다. 각각 다른 장소에서 같이 간 두 사람도 김 시인과 같은 심문과 고문을 당했다. 김 시인은 이 과정에서 고문을 견디지 못하여 하기는 고사하고 생각하지도 않은 일을 시인하게 되었다. 이 사실은 그의 평생을 따라다니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이런 일이 보름 동안 계속되어 한 달 동안을 헌병대감방에서 지낸 후 그들 셋은 석방되어 하숙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전광석화처럼 세다가야 경찰서 고등계 형사 세 명이 와 그들을 모두 붙들어 갔다.

세다가야 경찰서 유치장도 지하에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이었는데 얇은 군용담요가한 사람 앞에 한 장씩 배당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밤에 잠잘 때뿐이었다. 아침에는 거둬갔다. 현병대와 달리 독방은 아니었다. 유치장의 방은 여남은 개 되었다. 한 방에 칠팔 명 수감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지하 감방의 하나뿐인 사방 20cm 정도의 창문으로 내다뵈는 언덕배기에 어린 벚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는데 그것이 얼어 있다가 꽂이 피었다가 지고 녹음이 짙어가는 때에 석방되었던 것이다. 1월 중순에 수감되어 여름에 석방되면서 계절의 변화를 세 번 겪게 된 것이다. 이 감방에서도 헌병대 감방에서처럼 겨울에는 콘크리트의 냉기를 이기기 위하여 쉴 새 없이 엉덩이 운동을 했고 무릎 운동을 하여 엉덩이와 무릎이 벗겨지고 멍이 들었다.

이 감방에서 김 시인은 이러한 육체적 고통보다 더한 정신적 상처를 받게 되는 사건과 만나게 된다. 그 전말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김 시인이 영어의 몸이 된지 서너 달 만에 어떤 풍채 좋은 한 노인이 수감되었다. 그는 수염을 길게 기르고 와후쿠和服(일본 옷)을 입고 있었다. 그 노인은 독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간수들도 그에 대해서는 특별 취급을 하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동경제국대학 경제학교수로 그때 한창 시끄러웠던 인민전선파의 한 사람으로 공산주의자였다. 어느 날 김 시인이 조서 작성을 위하여 불려나가 심문을 받고 있을 때였다. 그 노인이 거기 와 외톨이로 앉아 있었다. 조금 있자 사환이 쟁반에 갓 구운 듯한 빵 두 개를 얹어 들고 왔다. 노인 앞에 그것을 놓고 인사를 하고 잡수라고 했다. 노인은 아까부터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전시에 갓 구운 빵은 아무나 먹을 수 없었으나 그 노인의 집에서 사식으로 보내온 모양이었다. 김 시인은 계속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김 시인을 심문하던 형사도 자리를 피했다. 김 시인이 계속 뚫어져라 노인을 주시하였으나 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하면서 끝내 빵 두 개를 다 혼자 먹어치웠다. 노인은 김 시인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형사와 주고받은 대화를 통하여 식민지 유학생임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공산주의자이고 제국대학 교수이면서 교단에서는 식민지와 민족을 무시한 진보적 사상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김 시인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고 빵 두 개를 혼자 먹어치운 것이다. 김 시인은 이러한 포리부동한 공산주의자를 목도하면서 이데올로기를 혐오하게 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공산주의도 배고픔 앞에서는 휴지조각이 된다는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이 회고담에서 김 시인의 뇌리에 박힌 또 한 사람은 유학생을 위장한 헌병보 안가였다. 생계를 위하여 영혼을 팔아 동족을 밀고한 그를 잊지 못하여 김 시인은 감방체험이 꿈에 나타날 때마다 그가 보였으며 그가 두고두고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였다고 한다.

김 시인과 두 유학생은 재판에 회부되지 않고 불령선인이라는 죄목으로 한국으로 강제 송환 되었다. 김 시인은 학생들이라 나이도 어리고 해서 재판에는 회부하지 않았으나 학교에는 연락이 가서 자신도 모르게 퇴학되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동경에서 시모노세끼下關까지 수갑이 채인 채 형사 둘의 감시 아래 압송되었는데 배 안에서는 화장실에도 따라 다녔다. 연락선이 부산에 닫자 부산수상경찰서 형사들에게 세 사람은 인계되었다. 부산 수상서에서 간단한 조서에 몇 마디 답을 해 주고 세 사람은 풀러났다. 그리고 나서 수상서 형사 한 사람이 근처의 여관으로 데려가 주인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당부를 했다. 그 여관에서부터 세 사람은 불령선인으로 남들의 외면을 받았다. 이틀을 부산에 머물고 각자 고향으로 떠나면서 헤어졌다. 그 뒤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고향집에 들어서자 김 시인의 선친은 벌떡 일어나더니 아무 말도 안하고 밖으로 나갔고, 할머니는 학마學魔! 학마! 하고 소리쳤다. 그리고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눈언저리가 젖기 시작했다. 김 시인은 목이 막혀 울지도 못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느닷없이 다가온 김춘수 시인의 감방체험이 막을 내린다. 그는 해방이 될 때까지 불령선인의 딱지로 인하여 사람 구실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배급제도가 실시될 때에는 그 몫의 배급은 없었다.

출감해서 달포가 지나자 김 시인의 몸에 이상이 나타났다. 온몸이 부석부석 붓고 각기입복脚氣入腹 증세까지 와 김 시인의 선친께서 용하다는 의원에게 진맥을 하게 하고 약을 짓게 해서 금강산으로 요양을 떠나게 되었다. 선친과 자당이 동행하여 장안사 근처의 큰 여관에서 한 달 가까이 요양생활을 하였다.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주위의 경관을 탐방하기도 하였다.

 

불령선인으로 쫓기는 삶 속에서도 해방 이전인 1944년 한 여름에 김춘수 시인은 마산의 명문가 집안의 규슈 명숙경(1926-1999)여사와 결혼을 하였다. 그 과정에 대해서도 김 시인은 자상하게 기록하고 있다.(김춘수꽃과 여우<여 우><5>pp203-205)결혼식은 처가의 마당에서 치렀다. 결혼식 사진에 보면 김 시인은 사모각띠를 하고 명 여사는 머리에 화관 꽃부리를 얹고 있다. 제적부에 의하면 19441014일 혼인신고를 했으며 명 여사의 호적은 마산부 포정(중성동) 642 호주 명도석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김 시인의 처가에 대하여 언급하기 로 한다.

김 시인의 장인 명도석(1885-1954)은 마산 중성동 출신의 애국지사이다.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동 산 50-1 마산자유무역지역 2공구 건너편 산기슭에 <허당 명도석 선생 기념비>가 서 있다. 명도석 선생은 1919321일 구마산 장날에 벌어진 마산 3.1운동 시위를 주도하였고 1920년에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박용만의 밀사를 만주 안동(지금의 단동)에서 만나다 체포되어 6개월간 구금되기도 했다. 1927720일 신간회 마산지회 창립대회에서 간사를, 29128일에는 정기총회에서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402월에 실시된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했다. 해방직전인 19448월에 여운형(1886-1947) 주도로 전국에 걸쳐 결성된 건국동맹 경남조직책을 하였다. 1954년 별세했을 때에는 마산시민들이 주도한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따라서 김춘수 시인은 외가와 처가 모두가 애국지사 집안이다. 그것도 보통 애국지사가 아닌 집안으로 통영과 창원에서 이름 나 있다.

명도석 선생은 자녀를 26녀 두었는데 가운데 둘은 일찍 주고 네 딸은 성인이 되었다. 네 딸 가운데 명숙경 여사는 셋째 딸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말 마산여고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44년 여름 19세의 나이로 김 시인에게 시집을 와 가정사에 관여하지 않고 시와 산문 쓰기 그리고 학생들 가르치기에만 힘을 기울인 김 시인을 대신하여 가계를 주도 하였다. 김 시인과는 5남매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첫 자녀인 김영희(1945-) 여사를 해방 되던 해 56일에 마산의 처가에서 출산하였다. 그 뒤를 이어 김영애(1947-), 김용목(1948-), 두 자녀는 통영 김 시인의 생가에서 김용욱(1950-), 김용삼(1952-2016) 두 형제는 마산시 중성동 58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김 시인의 자녀들은 김 시인과 명 숙경 사모님의 보살핌으로 모두 잘 성장하였다. 장녀 김영희 여사는 필자와 경북대 동기(문리대 화학과)인데 은행원 박준석과 결혼하여 서울에서 살면서 1999년 명숙경 사모님이 별세하자 혼자 된 김 시인을 별세한 2004년까지 5년 동안 지근거리에서 모셨다. 차녀 김영애 여사는 경북대 국문과를 나와 필자의 동기인 김원경(문리대 지리과) 신라대 명예교수와 결혼하여 부산에 살고 있다. 장남 김용목 씨는 영남대 공대 건축과를 나와 대기업에 근무하다가 건설회사를 경영하였다. 차남 김용욱 씨는 경북대 문리대 지질학과를 나와 대덕단지에 있는 한국지질자원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있다가 은퇴하였다. 막내 김용삼은 영남대 미술과를 나와 이태리에서 조각을 전공하여 조각가로 활동하였다. 김 시인의 예술적 기질을 가장 많이 닮았고 김 시인의 기념사업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애석하게도 2016년 만성 신장 질환으로 투병하다가 작고하였다

김춘수 시인의 자녀들 가운데 김 시인의 문학적 재질을 이어 받아 문인으로 데뷔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김용욱 씨의 두 딸, 즉 김 시인의 손녀 유미 양과 유빈양이 할아버지라는 이름의 바다(2008, 위즈덤 하우스)를 내어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기록하고 있다. 두 손녀는 모두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였다.

(양왕용;시인, 부산대 명예교수,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동북아기독교작가회의 한국측 차기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