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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06.04 11:42
1-6. 역지사지 견물생심
무슨 까닭인지 학창시절 내내 고전문학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국어2>에 포함된 그쪽 공부를 너무 소홀히 해서 성적평가가 ‘가’로 나온 적도 있었다. 아마 평생 성적표에 최하 점수 ‘가’를 받은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사범대학 국어과, 대학원 국문학과를 다니면서도 사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당연히 현대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했고 고전문학 전공자들이 하는 대화는 늘 외계인의 것들로만 여겼다. 시간을 거슬러 사는 자들의 심리가 낯설었고 별 이유 없이 반갑지가 않았다. 헌책방을 뒤지며 옛날 책을 사서 모으는 친구들을 볼 때면 신기하기까지 했다. 대학원 졸업 논문을 쓸 때도 연대를 현대 쪽으로 올려 잡았다. 김동리, 최인훈, 이청준 세 작가를 대상으로 삼았다. 더 아래로는 시기를 내리고 싶지 않았다. 당시는 20년대, 30년대가 주로 학위논문의 대상 시기였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박사논문도 황순원으로 했다. 황순원 선생은 내 작품을 최초로 인정해 주신 분이다. 처음으로 선고(選考)에 든 신춘문예 최종심의 심사위원이셨다. 전광용 선생과 함께 두 분이 본심을 보셨다. 당선은 되지 못했지만 공식적으로 내 이름이 예비작가로 지상에 거명된 것이 그때가 처음이라 기분이 아주 좋았다. 황순원 선생을 대상으로 한 박사논문이 나오지 않은 것 같아서 보은의 심정으로 박사논문을 썼다. 고전소설에 잠시 눈을 돌린 것은 교육대학에 와서 소설교육론 강의 필요에서 연암소설을 잠시 들여다 본 것 빼고는 없었다. 연암은 글쓰기론에서도 독보적인 성취를 이룬 분이어서 꼭 한 번 볼 필요가 있었다.
고전과 한문의 세계에 관심이 가기 시작한 것은 30대였던가? 김용옥 선생의 <절차탁마 대기만성>을 우연히 접하면서부터였다. 계간 문예지에 연재될 때 읽었는데 책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읽었을 정도로 재미가 있었다. 그러다가 또 우연찮게 논어나 장자 같은 고전을 읽는 독회에도 참여를 하게 되었다. 그 무렵에 『열하일기』를 다룬 책들도 몇 권 읽게 되었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 읽은 ‘호곡장론(好哭場論)’ 부분은 그동안의 나의 폭 좁은 독서를 꾸짖는 좋은 채찍이 되었다. “내 오늘에 처음으로, 인생이란 본시 아무런 의탁함이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돌아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라고, 대륙의 그 광활한 평원을 보고, 그 스케일에 압도되어, 연암이 스스로 그렇게 내뱉었었고 나중에 추사 김정희가 다시 「요동벌판(遼野)」이라는 시를 써서 연암의 호곡장론(아, 참 좋은 울음터로다. 가히 한 번 울 만하구나!)을 메타하였다는 내용이 참 좋았다. 인간에게 역사(歷史)는 어떤 식으로든 역사(役事)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육사의 「광야(曠野)」와 그것들(호곡장론, 요동벌판)을 한데 묶어, 작가에게 가해지는 문화사적인 압력에 대해 몇 마디 했다.
연암의 문장론도 눈길을 끌었다. 젊어서 누군가가 그 부분을 논문에서 다룬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읽지는 않았다. 단순한 지식에 머물렀다. 고문(古文) 무용론자이기도 했지만, 한창 글발이 올라있다고 스스로 여겼던 탓에(젊을 때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 남의 글쓰기 소론(그것도 고문서에 적힌)에 작심하고 눈길을 돌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팔이고 다리고 할 것 없이 제 몸의 기운들이 슬금슬금 다 새어나가고, 눈까지 침침해져 마지막 남은 ‘보는 힘’마저 믿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상대의 칼이 보였다는 어느 노검사(老劍士)의 이야기처럼, 글발도 다하고 무엇 하나 자신을 믿을 구석이 없어진 그즈음에 들어서야 연암의 글쓰기론이 속속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연암의 문장론은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궁극의 ‘글쓰기 방책’을 제시한다. 문장(문학)은 언어가 스스로를 넘어서는 방책, 혹은 언어가 자살하는 데 쓰는 무기와 같다라고 토도로프가 말했는데, 연암의 문장론이 이미 오래전 그 요체를 설파하고 있었다. 좋은 문장(문학)은 보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이분법에 이의를 제기하는데 연암은 그러한 문장(문학)의 소명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억양반복이라는 것은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이는 것이고,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 다시 묶어 주는 것은 성벽(城壁)을 먼저 기어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라는 말, 그리고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다”와 같은 말들은 그야말로 ‘완벽한 언어의 자살’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벽을 먼저 기어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다’와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인다’는 말이 특히 울림이 컸는데, 아마 그 글을 읽었을 때의 내 처량했던 신세(초로에 들면서 이것저것 억울하게 막히는 경험을 많이 했다)가 그 함의와 크게 공명했던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소위 글 쓰는 자들이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이는’ 자들의 운명에서 자신의 몸을 빼낸다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한 일인 듯싶다. 일단 글쓰기에 들어가면 아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진다. 오직 완성된 글, 완전한 문의(文意)의 창출과 전달에만 매진한다. 언제나 ‘현재’만 붙들고 싸운다. 그래야 글쓰기가 인생의 위로가 된다. 과거에 연연하고, 타인의 시선에 굴복하면 그건 글이 아니다. 그런 사실을 확실히 안 것도 초로에 들면서였다.
그건 그렇고, 학창시절에 왜 그렇게 고문서에 대한 박대(薄待)를 자행했을까? 왜 나는 그토록 어린 현실주의자였을까? 그런 의문과 후회가 들 때가 있다.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이 가는 바가 전혀 없지는 않다. 아직 단정하기는 이르지만, 가난한 피난민의 아들로 태어나 성장기 내내 ‘어린 피난민’이었던 나는, 아마도 ‘역사(歷史)의 역사(役事)’를 종내 믿기 어려웠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얼핏 들기는 한다.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평소 글쓰기 공부를 하면서 느낀 점들을 간단히 정리해 본다. 글 제목은 ‘글쓰기 오계(五戒)’다.
* 글쓰기 오계 : ‘꿩 잡는 게 매다’라는 속담이 있다. 생긴 것이 아무리 매 같아도 꿩 하나 잡지 못하면 그건 매가 아닌 것이다. 글쓰기 공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그럴 듯해도 좋은 글쓰기가 되도록 돕지 못하는 것은 좋은 이론이 아니다. 아무리 현란한 고담준론(高談峻論)이라도 그 끝이 허무하다면 그것은 올바른 이론이 아니다. 그저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지식의 유희에 불과하다. 속된 말로 ‘놀고 있는 것’에 그칠 뿐이다. 젊어서 자칫 잘못 길을 들면 영영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글쓰기 공부를 할 때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들을 간단하게 정리해 본다.
① 글쓰기는 몸 공부다 : 글쓰기는 표상적 지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절차적 지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일종의 실기(實技) 영역으로 몸 공부의 측면이 무엇보다도 중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지식도 중요하다. 그러나 ‘아는 것만으로는 항상 부족한 것’이 글쓰기다.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를 연주할 때처럼, 생각이나 느낌을 내 손(手)이 정확하게 실어 나를 수 있어야 한다. 손이 따라가 주지 못하면 ‘백방(百方)이 무효’인 곳이 바로 글쓰기의 세계다. ‘아는 것’과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철학자 김영민 교수가 “글을 쓸 때 나는 손가락으로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뜻이다. ‘손가락으로 생각한다’라는 말은 생각보다 빠른 추리나 연상, 직관적 언어선택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흔히 장인(匠人)들의 세계에서 “기술이 몸에 붙었다”라고 표현하는 경지도 그와 비슷한 것일 것이다. 몸에 붙은 기술로서의 글쓰기에 숙달되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이리저리 마음껏 굴려볼 수 있다. ‘내 안에서 구르는 지식’들은 물방울들처럼, 일종의 표면장력(表面張力)과 응집력(凝集力)의 원칙에 의해 서로서로를 밀어내거나 잡아당긴다. 자기만의 ‘동그란 모양(模樣)’을 갖추기 위해 내부 결속에 들어가거나 비슷한 것들을 끌어당겨서 몸집을 키워나간다. 그런 작용이 거의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손가락 글쓰기(사고)’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작업을 ‘생각을 통해서’, ‘머리가 손가락을 시켜서’ 하겠다고 한다면 이미 한 발 늦은 것이다. 기대하거나 원하는 만큼의 글쓰기 성과를 낼 수가 없다. 아무리 아는 것이 많아도, 재미있고 유익한 글을 마음껏 써낼 수 없다. 가장 중요한 ‘주제의 발굴’이 능수능란하게, 적재적소에, 속전속결로, 볼 만하게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농부가 땅을 파고 씨앗을 뿌려야 새싹이 나고 풍성한 결실이 마련되듯이, 글 쓰는 자는 반드시 직접 글쓰기의 씨앗을 뿌려서 수확해야 한다. 스스로 문리를 터득하는 경험을 쌓아나가야 한다. 글쓰기에서 “통째로 눈치껏”이 강조되는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이다. 어떤 공부에서든 피해야 할 것이 ‘분절적 사고’이다. 이를테면 “알아야 보인다”라든지 “먼저 알고 행해야 한다”라든지, “책으로 먼저 알고 개념을 잡아 실천에 옮긴다”라든지 하는 말들은 믿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것들은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라는 미혹(迷惑)에 들도록 할 때가 많아서 가급적 피해야 한다.
② 맥락이 전부다 : “통째로 눈치껏” 많이 읽고 써야 한다는 것은 결국 ‘맥락’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읽고 쓰는 일에서는 맥락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맥락적 독서, 맥락을 살리는 글쓰기에 매진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주제의 현현(顯現)’과 ‘수사(修辭)의 묘(妙)’가 오직 맥락 안에서 발(發)하고 몰(沒)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그 역시 ‘몸으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통째로 눈치껏, 그렇게 ‘맥락의 파도’를 타고 문의(文意)가 자활자재(自活自在)로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몸소 체득해야 한다. 법(法)은 항상 때(時)에 순응할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문화적, 역사적 환경으로서의 맥락이 자신의 몸속을 관류하지 않으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유익하고 재미있고 공감 가는 글을 끝내 쓰지 못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특성이 바로 탈맥락적 삶의 태도이다. 그들은 “나 혼자 산다”라는 신념 때문에 결국 제대로 살지 못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글쓰기는 늘 ‘친환경적’이다. 시를 공부하면 “새와 짐승과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게 된다”라는 공자의 말(논어 양화편)은 우리 주위의 약하고 여린 것들에 대한 지극한 관심이 글쓰기(문학)의 본령에 속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친환경적이지 못한 글, 그저 자기현시적인 수사만 넘치는 글은 겉만 글이지 속은 아무 것도 아니다.
③ 기본기 연마에 충실하라 : ‘기본적인 기술’에 항상 비중을 두고 글쓰기 연습을 해야 한다. 이를테면 “일도(一刀)가 만도(萬刀)다”라는 신념을 버려서는 안 되는 곳이 글쓰기의 세계라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크게 치는 한 칼”에서 승부가 난다. ‘크고 아름다운 기술’은 기술을 쓰는 자의 ‘크고 아름다운 몸(삶의 태도)’에서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의 기본기는 말이나 글을 다듬는 수사적(修辭的) 차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미음과 행실을 닦는 수신적(修身的) 차원에서 연마되어야 한다. 자기 반성을 부르는, 부단히 읽고 쓰는 기본적인 행위(연습)를 통해서 자기만의 (글쓰기에서의) 득의기(得意技)를 습득해야 한다. 동시에 내가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해서도 늘 숙고해야 한다. 위로인지, 공격인지, 수단인지, 목적인지, 봉사인지, 밥벌이인지가 명확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그것이 나에게 필요한 기본기를 잊지 않는 방법이다. 그도 저도 아닌 상태에서 마구 글을 쓰다 보면 결국 민폐가 되어 패가망신(敗家亡身), 끝이 허무하게 된다. 해방이면 해방, 실천이면 실천, 수단이면 수단, 목적이면 목적, 글 쓰는 동기가 분명해야 한다. 스스로 글쓰기의 세계에 입문할 때 의도했던 ‘목적에 부합하는 글쓰기’에 몰두해야 한다. 꾸준히 그렇게 기본기에 충실하다 보면 언젠가는 일도만도(一刀萬刀), 사통팔달의 글쓰기가 가능한 ‘불기(不器)’의 경지에 들 수 있다.
④ 역지사지 견물생심이다 : 기본기 습득이 마무리 되고 글쓰기가 원숙한 경지에 들려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역지사지, 견물생심(易地思之 見物生心)’의 체득이다. 역지사지는 나를 버리는 것이고 ‘견물생심’은 ‘순순히 사물을 받아들여 편견 없이 생각한다’라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self)를 해체하고, 수시로, 자유자재로, 때에 맞게 중심 이동이 가능해지도록 수신(修身)해야 한다. 상허하실(上虛下實), 상체는 가볍게 하고 하체는 무겁게 해서 이동 시 중심이 흐트러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결국 최종 승부는 여기서 난다고 보면 된다. 많은 어중이떠중이 글쟁이들이 평생토록 그 문턱을 넘지 못하고 속절없이 그 앞에서 주저앉는다. 꼴에 분석가니 문장가니 평론가니 하며 아무리 나대어도 ‘역지사지 견물생심’이 안 되면 그 역시 끝이 허무하다. 도하 신문이나 인터넷에 글께나 쓴다는 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그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견물생심’은 ‘때에 맞게 생각하는 힘’이다. 자기 안에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물(物)에 즉하여 ‘생심(生心)’하는 능력이다.
⑤ 하던 대로 열심히 하라 : 위에 든 모든 것들을 꾸준히 계속해야 한다. 글쓰기 역시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라 조금만 노젓기를 멈추면 저만치 떠내려가고 없다. 불철주야 노력해야 한다. 하루를 쓰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을 쓰지 않으면 가까운 이들이 알고, 사흘을 쓰지 않으면 세상 모든 이들이 다 아는 것이 글쓰기의 세계라 여기고 꾸준히 써나가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하이퍼그라피아(글쓰기 중독증)가, 의식의 수준에서 언제든지 입출(入出)이 가능하도록 연습해야 한다. 한 자리에 앉아서 대여섯 시간은 꼼짝 않고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그것만 되면 누구나 늙어서 죽기 전에 반드시 대가(大家)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이상 다섯 가지의 계율(글쓰기 오계명)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다 실천해 낼 수 있으면 명실공히 자타가 공인하는 글쓰기 전문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스스로 글쟁이로 자처하며 여기저기 나대면 안 된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글쓰기 오적(五賊)’의 신세로 추락할 공산이 크다. 식자들에게 ‘글쓰기 오적의 신세’는 늘 가까이 있다. 그래서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이기도 하다. 공연히 무용지식에 휘둘리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 글쓰기의 텍스트적 수준, 수사학적 수준, 담론적 수준, 해석학적 코드, 의미론적 코드, 문화적 코드, 상징적 코드, 행동적 코드, 호출되는 독자, 환기되는 독자, 투사적 독서, 해설적 독서, 시학적 독서, 믿을 수 있는 화자, 믿을 수 없는 화자, 발견 학습, 문제해결로서의 글쓰기, 문화적 생산, 맥락적 배치, 토도로프, 롤랑 바르트, 데리다. 푸코 등등 온갖 ‘말들과의 전쟁’만 치르다가는 결국 사문난적(斯文亂賊), 혹세무민(惑世誣民) 하다가 글다운 글 한 편 못 남기고 우주의 먼지로 사라질 것이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그런 것들은 나중에, 글을 좀 써본 뒤에, 읽어보면 다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부터 머리 싸매고 읽을 것들은 결코 아니다. 지금 당장 해야 될 일은 좋은 글들을 부단히 골라서 읽고 그것의 뜻과 표현을 본 받아서 한 번이라도 직접 글을 써 보는 일이다.
<소설가/ 대구교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