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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평전

<김춘수 평전>8.자유로운 대학 분위기와 독서체험 그리고, 아나키즘

작성일 : 2023.05.26 07:47

<양왕용의 김춘수 평전>8./ 탐사(8); 동경 

자유로운 대학 분위기와 독서체험 그리고, 아나키즘

 

김춘수 시인이 다닌 일본대학의 일제강점기 시절의 학적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전화로 소실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필자도 이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동북아기독교작가회의 일본 측 멤버로 필자와 친분이 있는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二松學舍大學 세리카와 테트수요 芹川哲世 명예교수에게 이 메일로 문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회신을 받았다.

 

말씀하신 김춘수를 비롯하여 그 시기에는 일본대학에서 공부한 작가들이 많은 줄 압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학적부 등을 찾으려고 학교에 문의해 봤지만, 전쟁 때 타 버렸다고 합니다. 이 건에 관해서는 저도 찾아보려고 합니다만, 지금은 대학에 들어갈 수 없어서, 나중에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알아보려고 합니다.

 

여기서 지금의 상황은 코로나 19의 상황이다. 사실 필자도 김춘수 시인이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머물었던 유의미한 공간 곳곳을 탐사하고 이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탐사는 코로나 19가 호전된 뒤로 미루고 일제강점기 당시의 글들과 김 시인이 밝힌 글들을 토대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일본대학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이미 1930년대에 밝혀지고 있다. (설의식, 신문연구」 ⟪동광.1931.2 pp79-80) 김 시인의 경우는 그 당시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자세히 기억하고 있다.

 

나는 학교를 자주 까먹기는 했으나 중학 때 모양으로 자퇴서를 내던지는 그런 따위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다. 대학이란 어느 정도는 자유가 보장돼 있는 곳이다. 학생을 성인 취급하는 곳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내가 다닌 대학이 예술대학이다. 일제 말이기는 하나 그런대로 학교 분위기는 갑갑하거나 답답하지는 않았다. 어떤 교수는 수업 시간에도 담배 피는 것을 못 본체 해주었을 정도다.(김춘수 꽃과 여우,민음사,1997,p109)

 

김 시인은 학과 전체에 흥미를 느끼거나 학업에 충실하지는 않았으나 앞에서 소개한 시인인 하기하라 사쿠타로荻原朔太郞 교수, 소설가 쿠노 토요히코久野豊彦 교수와 이토 세이伊藤整(1905-1969)교수의 강의는 빠짐없이 들었다.(앞의 책 pp99-103)

쿠노 토요히코 교수는 한 때 나프에 가담했다가 전향한 작가답게 강의명은 <문학특강>으로 돼 있으나, 소설을 텍스트로 하여 형식이나 기교보다 소재나 주제를 사회나 문명비평적 시각에서 풀어 나갔다고 한다. 강의의 방식은 노트를 치밀하게 준비해 와서 그것을 불러주며 받아쓰도록 하고 간간이 설명해주었으며 논리가 아주 정연하고 꼼꼼했다고 한다. 김 시인은 쿠노 교수의 모습을 훤칠한 키와 깡마른 체구에 목소리가 카랑카랑하였으며 입술은 흑인의 입술처럼 두툼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학점은 잘 받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토 세이 교수는 영어를 담당했으나, 교재는 에드가 앨런 포우의 단편소설을 대상으로 소설론을 펴는 투의 강의를 했다고 한다. 그의 강의는 쿠노 교수의 소설론과는 대조적으로 소설의 형식과 기교의 파악에 집중하였다고 한다. 그의 용모는 작은 키에 몸도 가늘었으나 찬찬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지반을 다지듯이 강의하였으며, 김 시인은 명강의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액자소설, 스프라이스 앤딩, 플롯과 스토리 등의 용어를 이때에 이미 들었다고 한다. 이토 교수는 북해도 출신으로 도쿄상대(현재의 一橋大學)을 중퇴한 소설가로 전후에 도쿄공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제임스 죠이스의 <율리시즈>를 공동번역하였으며, D.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번역하였다가 1950년 외설문서의 혐의로 기소당하여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이 경위를 기록한 기록문학 <재판>(1952)을 남기기도 했다. 일본문단사로 기쿠치칸상菊池寬賞을 받았으며 1968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그는 유럽의 20세기 문학의 일본 정착에 기여하였으며, 성의 죄악감을 심리주의적 수법으로 추구하는 소설을 썼으며 그러한 경향의 대표작으로 <도시와 마을>(1939),<불새>(1953)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하기하라 사쿠타로 교수는 이 두 교수와는 대조적으로 개성적인 강의를 하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강의 준비는 전혀 하지 않고 분필하나만 달랑 들고 강의실에 들어왔다고 한다. 화창한 봄날이며 창문을 손수 열고 밖을 내다보다가 칠판에 <구름에 대하여>라고 판서한 후 구름에 대한 자기 소감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이러한 대상이 <넥타이><책상>으로 변화무상했으나 이야기는 구수하고 좀 더 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고 한다. 하기하라 교수의 시도 김 시인에게는 최상급으로 느껴졌으며 일본 상징주의 시의 정상이며 프랑스 상징주의 이론을 일본 시와 접목하였다고 한다. 그의 시집 달에 젖는다,청묘靑猫,鄕土望景詩등은 물론이고 그의 시론과 에세이도 김 시인은 모두 섭렵했다고 밝히고 있다.

창작 실기를 가르친 교수는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고 덧붙이고 있다. 아마 이 세 람 가운데 한 사람이 가르쳤다면 김 시인 자신은 훨씬 일찍 열성적으로 창작 실기에 참여했을 것이라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그 때에 일어로 된시를 많이 남겼다면 그것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인데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으로 김춘수 시인의 일본대학 시절의 독서편력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그의 독서는 릴케의 관심에서 출발한다. (앞의 책 PP103-109 ) 릴케의 문헌을 섭렵하기 위해 학교도 까먹고 헌책방을 찾아다닐 정도로 릴케에 집착하였다. 릴케의 초기시집부터 만년의 시집에 이르기까지의 시집은 물론 앞에서 소개한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 말테의 수기, 로댕론을 비롯한 산문들까지 다 읽었다. 그는 말테의 수기에 나오는 스페인 수녀 이야기, 사랑하는 하느님 이야기에 나오는 천사의 이야기에 충격을 받았으며, 로댕론에서는 로댕이 한 말인 예술가는 예술을 위하여 행복을 버려야 한다는 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1950년대에 비로소 깨달아 릴케는 이 말을 따라 갔으나 자신은 그러지 못하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고 한다.

릴케에 대한 관심은 루 안드레스 사로메의 릴케 전기까지 구해서 읽었다. 러시아 기행문에서는 왜 릴케가 살로메를 따라 다녔는가를 이해하면서 김 시인 나름대로 러시아와 슬라브 민족에 대한 호기심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그 결과 김 시인의 독서는 러시아 문학과 사상을 탐색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김춘수 시인은 도토예프스키(1821-1881), 니콜라이 고골(1809-1852), 막심 고리키(1868-1936), 안톤 체호프(1860-1904), 이반 투루게네프(1818-1883) 등의 문학을 섭렵하였고, 레프 세스토프(1866-1938)와 니콜라이 베르댜예프(1874-1948) 등의 사상에 심취하였다. 그런데 두 철학자의 경우 도토예프스키의 영향을 받았으며 기독교적 세계관이 바탕이 되고 있다. 특히 베르댜예프의 경우 기독교적 실존 철학자라고 볼 수 있으며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관(1941)이란 책도 저술하였다. 이 두 사람은 공산주의 소련에서 추방되어 독일과 프랑스에서 여생을 보냈다.

김 시인은 베르댜예프는 평생 그를 괴롭히는 사상가였다고 하고 있다. 그가 프랑스에 망명하여 쓴 책 현대에 있어서의 인간의 운명(1934)에 나와 있는 <여태까지는 역사가 인간을 심판했지만 이제부터는 인간이 역사를 심판해야 한다>는 말이 김 시인의 평생의 화두가 되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자신 개인으로서의 그는 역사의 이름으로 심한 시달림을 받으면서 이 명제에 대하여 회의하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앞으로 다가올 김 시인의 일본 유학시절의 감방체험과 6.25 전쟁 체험, 3.15 마산의거 체험 그리고 만년의 정치참여 등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가온 역사의 격랑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들이다. 세스토프의 책에 나오는 <천사는 전신이 눈으로 돼 있다>는 말 역시 그의 평생의 화두였다고 한다. 이 화두에 대한 질문은 그를 예수 탐구의 길(에세이집 하느님의 아들과 사람의아들과 연작시)로 들어서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김 시인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도 이 시절에 낱낱이 읽었다고 한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으면 우리가 얼마나 왜소한 삶을 살았는가를 절감한다고 보고 있다. 그에 대한 경도는 역시 많은 에세이와 토스토예프스키 연작시집 들림, 도스토예프스키(1997,민음사)로 나타나고 있다. 그 외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 디카니카近郊夜話, 희곡 시궁창, 안톤 체호프의 희곡 벚나무 동산, 갈매기, 투루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등의 작품에 심취하였으며 그것을 단순히 읽은 것이 아니라 앞에 언급한 베르댜예프와 세스토프의 일종의 작품론과 병행해서 읽음으로써 교양의 경지를 넘어 시인으로서의 길과 현대문학 교수로서의 길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상의 독서체험과 함께 김 시인은 이 시기에 아나키즘에 관심을 기울게 되었다고 한다. 아나키즘에 기울게 된 계기에 대하여 그는 하나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앞의 책 PP119-120)

 

대학에 들어간 2년째 되던 봄에 고향 후배가 그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는 경성의 사립중학에 다녔으며 학교는 달랐으나 서로 통하는 데가 있어 김 시인과 자주 만났다. 고향 후배는 고학을 할 작정으로 동경에 왔으며 맏형의 친구 분네에 당분간 신세를 지고 있다고 했다.

그날 저녁은 김 시인의 하숙에 그와 함께 묵고 뒷날 후배가 머물고 있는 맏형 친구 집을 방문했다. 동경 동북쪽 교외의 신슈 가도 한쪽 귀퉁이 다 찌그러진 방 한 칸에 부엌이 딸린 움막집에 맏형 친구 분은 7-8세 되는 아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맏형 친구 분은 60세가 되어 보이는 볼이 움푹 팬 빈상의 얼굴이었다. 그가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찬거리를 사러 간 사이 김 시인은 후배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맏형의 나이가 40인데 어떻게 친구냐고 하니 얼굴보다 나이가 젊다고 했으며 맏형과는 같은 무정부 사상 즉 아나키즘으로 통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생계 수단은 거리의 쓰레기통에 버려진 양철과 마분지 같은 고물들을 수집하여 팔아 두 식구의 호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통영 부잣집 아들인 김 시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세계를 목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집 주인은 찬거리를 사와서 점심을 대접하였으며 음식 솜씨도 훌륭했다고 김 시인은 기억하고 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김 시인은 아나키즘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우선 소련의 지리학자이자 아나키스트인 크로포트킨(1842-1921)을 알게 되었고 그의 저서 상호부조론(1902)을 읽고 감동하였다고 한다. 곧 이어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바쿠닌(1814-1876), 프랑스 무정부주의자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1809-1865), 의사이면서 행동주의자였으며 32세에서 53세가지 감옥에서 지낸 러시아 여자 아나키스트 베라 피크넬(1852-1942)에 매료되기도 했다. 이러한 감동들로 김 시인은 산문도 썼으며 동지 푸루돈, 동지 바쿠닌, 동지 피그넬이란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1990, 신원문화사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에 수록)

김 시인은 이렇게 아나키스트들에게 매료되어 아나키즘에 대한 지적 호기심은 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아나키스트는 될 수 없었고, 되려고 해 본 일도 없었지만 되려고 해본들 되어지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지금(1997, 꽃과 여우를 엮은 시점)도 잘 알고 있다고 했다.(앞의 책 P 126) 이렇게 단언 하는 것은 그 자신의 출신 성분과도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나키즘에 쉽사리 빠져 들어간 지적호기심은 앞의 일화에서처럼 어린 시절부터 만년까지 지속된 가난한 자에 대한 측은지심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점점 역사 회의주의자가 되어 간 것은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그에게 감방체험이라는 첫 번째 격랑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인/ 부산대학교 명예교수,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동북아기독교작가회의 한국측 차기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