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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0.02.27 12:12 수정일 : 2020.05.17 07:13
이별 없는 시대
-황동규
늙마에 미국 가는 친구
이메일과 전화에 매달려 서울서처럼 살다가
자식 곁에서 죽겠다고 하지만
늦가을 비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인사동에서 만나
따끈한 오뎅 안주로
천천히 한잔할 도리는 없겠구나.
허나 같이 살다 누가 먼저 세상 뜨는 것보다
서로의 추억이 반짝일 때 헤어지는 맛도 있겠다.
잘 가거라.
박테리아들도 둘로 갈라질 때 쾌락이 없다면
왜 힘들여 갈라지겠는가?
허허.
친구(시인 마종기)와의 이별을 다룬 이 시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인생의 종점이라는 초조하고 각박한 시간대를 사는 자신을 푸근하고 넉넉하게 만들려는 마음자리를 떠올려 보인다. 아주 가까운 친구와 살아서 다시 만나기 어려울지도 모르는 ‘고통스러운 이별’을 담담한 어조로 풀어내고 있지만, 기실은 발상의 전환을 통해 그 상황을 전복시키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허나 같이 살다 누가 먼저 세상을 뜨는 것보다 / 서로의 추억이 반짝일 때 헤어지는 맛도 있겠다”라는 대목은 다분히 역설적이다. 하지만 박테리아가 “쾌락이 없다면 / 왜 힘들여” 둘로 갈라지겠느냐는 기발한 전복적 상상력은 고통스런 이별을 무화시키고 있다. 마지막 행의 “허허”라는 웃음소리는 밝고 환한 목소리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고통스런 신음의 상태는 분명 벗어나 있는 것 같다. 이 시의 화자가 이 같은 발상 전환을 통해 친구가 떠나고, 행동거지가 불편해지고, 생활반경이 좁아지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위무하는 방식으로나마 나름대로 ‘사는 기쁨’을 찾고 있는 게 아닐까. 「이별 없는 시대」는 ‘이별’을 하면서 그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역설적으로 뒤집어서 노래하고 있으며, 달관의 시선으로 노년에 접어든 시인의 정신적 현주소를 담담하게 그려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020.4.1/이태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