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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평전 > 7.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만난 도시 동경 -김춘수 시인의 동경 시절(1)

작성일 : 2023.05.21 11:37

<김춘수평전 7>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만난 도시 동경

-김춘수 시인의 동경 시절(1)

 

양왕용

 

 

김춘수 시인이 자신의 유학시절과 시인이 된 경위를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 되었다. 그의 시론집 의미와 무의미(1976,문학과지성사)에 수록된 두 번의 만남과 한 번의 헤어짐<1976.1.1.,현대문학 발표>이라는 글에서 처음 언급하고 있다. 또한 김 시인은 시를 쓰고 시론과 시비평을 발표하면서도 수필을 많이 썼다. 그는 수필이라 하지 않고 에세이라는 용어를 썼다. 생전에 에세이집도 많이 엮었다. 그 첫 번째가 19765월 예문관에서 나온 빛 속의 그늘(4·6228)이다. 그리고 두 번째가 19794월에 근역서재에서 낸 신국판 234면의 오지 않는 저녁이다. 이 책에 나도 모른다라는 짧은 글이 있다. 이 글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일본 유학 경위와 시인이 된 계기를 밝히고 있다. 그 후에도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자전소설 꽃과 여우(1997,민음사)에서는 길고 자세하게 언급된 대학시절(p97-145)의 서두(pp97-98)에 등장한다. 처음 언급과 마지막 언급의 사이는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래서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경위의 큰 줄거리는 변함이 없다.

김춘수 시인이 언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힐 자료는 없다. 다만 두 번의 만남과 한 번의 헤어짐의 서두(의미와 무의미p.24)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18세 때의 늦가을이다. 나는 일본 동경 간다(神田)의 대학가를 걷고 있었다. 그 거리는 한쪽편이 왼통 고서점으로 구획져 있었다. 나는 그 때 서울의 경기중학을 5학년에서 졸업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자퇴하고, 북경으로 갈까 하다가 동경으로 건너가 어딘가 적당한 고등학교를 목표로 영수학원에서 수험준비를 하고 있었다. 선친께서도 그런 생각으로 계셨고 나도 법과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운명은 드디어 나에게로 다가왔다.

 

경성제일고보 학적부에 의하면 ‘1940131일 자퇴라고 적혀 있는데 김 시인은 위의 글처럼 1939년 늦가을에 일본에 가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렇게 된 사정은 나도 모른다(김춘수전집<3> 수필,문장사,1983.p136)라는 글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경성제일고보 4년 수료 자격이면 고등학교나 대학 예과 지원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퇴한 것인데 막상 고등학교를 지원하자니 중학의 최종 학년 담임선생 소견표가 필요하여 연락하였으나 담임은 소견표는 써 주지 않고 1년 늦더라도 다시 졸업하고 가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밀고 당기기를 하다가 1940년의 고등학교와 대학 예과 입학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이런 과정을 겪고 학적부에 1940131일 자퇴로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1940년 봄을 맞이하였으며 4월 초순 간다의 대학가에서 사각모를를 쓴 그의 고향 벗 B군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N대 예술과 전문부 예과에 다닌다는 것이었다. 김 시인의 사정을 들은 B군은 김 시인에게 함께 다니자고 권유했다고 한다. 지금 당장 소견표 제출하지 않아도 4년 수료자를 위하여 전문부 예과를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권유에 따라 소견표를 첨부하지 않고 간단한 테스트를 거치고는 입학하게 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 회고에서 B군은 통영에서 신문사 지국을 한 언론인 배종혁 씨라는 것을 통영의 여러 경로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1921년 생으로 김춘수 시인보다 나이는 많았으나 통영보통학교는 한 해 늦은 26(1936년 졸업) 졸업생이며 서울의 사립학교를 다녔다. 그 후 일본대학 예술학원 문예창작과에 다녔다. 아마 김 시인보다 먼저 일본대학에 다녔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해방 직후 유치환 시인(회장)이 주도한 통영문화예술협회에서 시인으로 김춘수 시인(총무)과 같이 활동하였다.

여기서 N대라 한 곳은 일본대학(日本大學) 즉 니혼대학을 말한 것이다. 니혼대학은 일본 동경에 위치한 일본 최대의 사립종합대학교(2010년 현재 전임교원 1,720, 학생수 68,817)이다. 1889년 메이지정부 첫 법무장관이었던 아마다 아키요시(山田顯義,1844-1892)가 설립한 니혼법률학교가 전신이다. 1901년 고등사범과가 설치되었으며, 1903년 현재의 이름으로 교명이 바뀌었다. 1922년 사립대학으로 인가를 받았으며 현재 법학부,문리학부,상학부,국제관계학부,공학부,의학부,약학부,예술학부 외 7개학부 즉 총 14개학부 아래 83개 학과로 운영되고 있으며 대학원 20개 전공 24개 부속학교 1개 유치원, 원자력연구소와 종합과학연구소 등 29개 연구소가 있다,

예술학부의 경우 1921년에 창설된 미학과가 그 시초이다. 따라서 2021년이 100주년이다. 니혼대학의 다른 학부들보다 예술학부의 경우 학과 마다 랭킹 5위 안에 드는 명문이며, 니혼대학의 간판학부이다. 현재 사진학과, 문예학과, 영화학과, 미술학과, 방송학과, 음악학과, 디자인학과 등의 학과에 4,000여명의 학생들이 다니고 있다. 캠퍼스는 세이부 이케부쿠로선·에코다 역에서 도보로 1분 거리에 있으며 고타캠퍼스라는 독립 캠퍼스를 가지고 있다.

일본대학 예술학부 문예학과의 한국인 졸업생 가운데 선두주자는 김기림(1908-?)시인이다. 그는 서울 보성고보를 중퇴하고 1925년 동경 名敎中學校 4학년에 편입하여 1년 공부 후 1926년에 문부성에서 치르는 대학입학 검정시험에 합격하면서 5년 졸업자격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그는 명문대학보다 빠르게 졸업할 수 있는 다른 대학에 비하여 학사운영과 학습 분위기가 자유로운 일본대학 전문부 문예창작과에 입학하여192933년 만에 졸업을 했다. 그는 문예창작과의 주야간 강좌를 오가며 저학년 때에 학점을 다 채우고 고학년 때에는 문학과 예술전반에 대한 기초교양과 서구의 모더니즘의 제 사조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쏟았다. 1921년 개교된 예술학부에 1926년에 입학하였으니 초창기 입학생이다. 그는 그 당시의 일본 근대시단의 중견 시인인 하기와라 사쿠타로(荻原朔太郞1886-1942)로부터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 일본의 전통시와 그 당시의 시적 경향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이로부터 정확히 15년 후인 1940년 김춘수 시인은 대가가 된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자유분방한 강의를 들었다. 그러나 하기와라 사쿠타로는 김 시인이 이 대학을 떠날 무렵 사망하였다. 김 시인은 이 사실을 모르고 해방 직후인 1948년 첫 시집구름과 장미를 내어 그에게 한 권 보내려고 하니 이승을 뜬 뒤라고 술회하고 있다.(꽃과 여우p110)

다음으로는 앞의 인용 끝부분 선친께서도 그런 생각으로 계셨고, 나도 법과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운명은 드디어 나에게로 다가왔다라는 부분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서 운명이라는 것은 간다 고서점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집을 사게 되어 그 속의 시에 감동되어 시인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신비롭고 운명론적인 이야기이다. 앞의 인용 뒷부분은 다음과 같다.

 

즐비한 고서점들의 어느 하나의 문을 들어서자 서가에 꽃힌 얄팍한 책한 권을 나는 빼어들었다. 서책들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와 크고 부피 있는 유럽의 사전류에 압도되어 나는 그 책을 몇 10전으로 사들고는 무안을 당한 사람처럼 상기된 얼굴을 하고 어서어서 밖으로 빠져 나왔다는 그런 기억이다. 하숙집에서 포장을 풀고 내가 사온 책을 들어다 보았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시인의 일역 시집이었다. 내가 펼쳐본 첫 번째 시는 다음과 같다.

 

사랑은 어떻게 너에게로 왔던가

햇살이 빛나듯이

혹은 꽃눈보라처럼 왔던가

祈禱처럼 왔던가

말하렴!

 

사랑이 커다랗게 날개를 접고

내 꽃피어 있는 靈魂에 걸렸습니다.

 

이 시는 나에게 하나의 계시처럼 왔다. 이 세상에 시가 참으로 있구나! 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릴케를 통하여 나는 시를 ( 그 존재를) 알게 되었고 마침내 시를 써보고 싶은 충동까지 알게 되었다.

 

 

좀 긴 인용이나 자전소설 꽃과 여우97쪽과 98쪽에도 위의 인용과 대동소이한 글이 있다. 다만 시 번역에서 사랑대신 그리움이라는 어휘를 사용하는 점이 다르다면 다르다. 그런데 김 시인을 매료시킨 이 시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의 연작시 <사랑하기>의 첫 번째 작품이다. 문현미 (백석대학교 국어국문학과)교수가 번역한 시집 나의 축제를 위하여(2001.민음사) 110 쪽에 수록된 작품에는 위의 번역과 다소 차이는 있으나 사랑이라는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위의 김춘수 시인의 번역은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중역한 것이다. 문 교수의 번역본은 릴케가 1899년에 엮은 MIR ZUR FEIER1966년판을 번역한 것이다. 이 시집은 릴케 자신이 시집이라 했으나 시선집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사랑하기>연작시는 그의 제3시집 꿈의 관을 쓰고(1897)에도 수록되어 있다. 두 시집은 2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만 김춘수 시인이 간다 고서점에서 산 것은 1899년 판 나의 축제를 위하여번역본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앞의 시집은 릴케가 베를린 대학 재학 초기에 엮은 것이고 뒤에 것은 그가 어느 정도 기성문인들과 교류하면서 명성을 얻어가던 시기에 엮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에 매료된 김 시인의 라이나 마리아 릴케 작품에 대한 독서는 비록 일본어로 번역된 것이지만 전집 전체의 독서는 일본대학 시절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김춘수 시인의 시를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와 비교하고 릴케의 산문이 그의 작품 세계와 세계관 형성에 끼친 영향 등을 규명하는 다양한 작업이 비교문학적 연구 방법으로 더욱 천착될 필요가 있다.

사실 김춘수 시인의 시인으로의 길은 김 시인의 말처럼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가 그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지만 오랜 그의 문학작품 독서와 글쓰기를 통하여 정해진 운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이기철 교수의 저서 김춘수의 풍경(2021,문학사상사) 55쪽에서도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통영보통학교 시절부터이다. 보통학교 시절 H선생이 학교 뒷산인 여항산에서 따온 교우지여황의 푸른 빛에 김 시인의 글를 자주 뽑아주고 글 쓰는 방법과 태도에 대하여 말씀해주었다고 한다.(꽃과 여우p74) 그리고 경성제일고보 학적부 4학년 시절에는 문학소년이라고 적혀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학 창작 실기 시간에는 일본어로 글쓰기를 시늉만 내면서 일본어로 쓰는 것은 중학 시절 일기장으로 인한 필화사건이 생각나 매스껍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툰 한글로는 시인지 수필인지 분간이 안 되는 습작뭉치가 싸여갔고 그 가운데 두 편을 골라 경성 신문사에 투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춘수 시인으로서는 제목도 잊어버렸다고 했다.(앞의 책p109) 그 두 편 가운데 하나를 발굴할 수 있었다. 부산외국어대학교 한국어문학부 박경수 교수가 발굴한 다음 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그 작품 전문을 인용하여 보기로 한다.

 

聖徒와 밤

日本藝術科 金春洙

 

十字架는 눈압헤보인다-

 

두팔 양손에 *錢鎖가 잇다

 

나무에머리를매고 두쪽허리에看守槍劍이반작거린다

달도업섯다 별도죽엇다聖徒의눈은 희미-하게도

한송이百花를보앗다

 

聖徒**입엇더外套를버서두고 살작이百花의덩에안젓다

 

百花의머리우에참새가노래하고百花一直線으로天國했다

 

.十四 於東京

 

출전;每日新報194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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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쇄;쇠로 만든 고리를 여러 개 이어서 만든 줄

**‘입었던의 오식으로 보임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 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된 1940810일 이후에 발표된 작품이다. 그 당시로는 유일한 한글신문인 총독부 기관지 每日新報학생란에 발표된 것이다. 같은 날에 발표된 글 가운데는 조연현(1920-1981)의 글 < 대학의 혁신을 읽고>惠專 趙演鉉이라는 이름으로 보이고 경성제국대 출신으로 서울대 교수를 지낸 원로 경제학자 고승제(1916-1995)의 글 <현대인의 과제>라는 글이 文大 高承濟라는 이름으로 보인다.

지은 날자가 1940714일이면 김 시인이 일본대 예술과에 입학한 4월로부터 3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그런데 그 시적 공간이 예상을 벗어나고 있다. 마치 서양화가들이 자주 그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연상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러한 작품을 창작하게 된 배경을 설명할 길이 난감하다. 다만 유학생 초기의 예수 체험이나 하나님 체험을 짐작되는 부분은 김 시인이 읽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글 가운데 러시아 첫 번째 여행 체험이 바탕이 된 단편소설이자 기행문이라고도 볼 수 있는 사랑하는 하느님 이야기(1904)가 들어 있다는 점이다.(꽃과 여우p104) 이 책은 ‘18991110부터 20일 사이에 단숨에 쓰인 것이며 13편의 단편이나 하느님이 하나의 실로 연결된 동화 형식의 소설’(송영택 번역 릴케 단편선 사랑하는 하느님 이야기,2018,문예출판사p168 해설)이다. 그러나 앞으로 김춘수 시인이 쓸 예수를 제재로 한 시편들과 에세이들의 전조라고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시기에 투고한 다른 작품 한 편을 찾는 작업은 뒤로 미루고 우선 김 시인 자신은 제목도 잊어버린 이 작품을 어쩌면 활자화된 최초의 작품일 것이라 생각하면서 소개한다.

<양왕용/ 시인,부산데 명예교수,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동북아기독교작가회의 한국측 차기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