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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05.21 11:28
5월을 더 아프게 하지 말라
/윤일현
어느 출판기념회에 초대받았다. 순서지에 내 이름과 함께 ‘다시 1980년대를 말한다’가 적혀 있었다. 차례가 되어 앞으로 나갔다. 80년대를 이야기하기 전에 시집을 낸 시인에게 덕담을 건넸다. 시인의 사회 비판 의식보다는 삶과 자연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에 먼저 감사를 표했다. 그 시인이 젊은 날처럼 계속 투쟁 일변도의 거친 시를 쓴다면 그 자리에 오지 않았을 것이란 말도 덧붙였다. 순수와 참여 프레임을 미리 정해 놓고 시를 쓰는 사람은 참된 시인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어떤 직종에 종사하든 자기가 속한 곳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고, 그 경험에 근거해 글을 쓰다 보면 상황과 주제에 따라 순수 문학 성향의 글이나 격렬한 비판의 글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된다. 그런 글이라야 독자의 마음속 깊이 다가간다.
내가 속해있는 5·18 민주화 운동 단톡에는 쉴 새 없이 관련 단체끼리의 상호비방이나 법적 대응에 관한 소식이 올라온다. 민주화를 열망하던 순수한 마음과 정신은 오간 데 없고 지원금, 보조금, 이권 등의 잿밥을 노린 아귀다툼으로 얼룩져 있다. 5·18 유공자 명단을 공개하고 엄격하게 검증하면 문제 단체들은 어느 정도 정리될 것이다. 김욱 교수가 쓴 ‘민주화 후유증’을 읽었다. 오늘의 우리 정치 문제 해결에 필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주는 책이다. 직선제 개헌 요구로 6·29선언을 받아내고, 민정당 타파 압박으로 3당 합당이란 출구를 열고, 5공 청산을 강제해 청문회를 끌어내는 등의 과정 모두에 절묘한 타협이 있었다. 저자는 우리의 민주화는 민주 세력의 비타협적 투쟁으로만 이룩한 승리가 아니라 민주 세력과 반민주세력 간 힘의 균형이 일궈낸 ‘타협적 민주화’임을 강조한다. 우리의 민주화가 타협이 아닌 민주 세력의 일방적 승리였다면 6·10항쟁으로 6·29선언을 받아낼 게 아니라 전두환 정권을 타도해야 했고, 5공 청산 청문회로 끝날 일이 아니라 전두환, 노태우 일당을 혁명재판으로 처단해야 했으며, 3당 합당이 아니라 민정당을 해산하고 인적 응징을 해야 했다. 혁명적 청산이 가능할 정도로 민주 세력의 힘이 결정적으로 강하지는 않았다.
1990년 김영삼의 ‘3당 합당’을 야합이자 배신으로만 매도하는 것은 우리의 민주화가 ‘타협적 민주화’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역사 인식이다. 노태우의 민정당이 전두환의 민정당과 단절하는 자기 부정을 거쳐 민자당을 탄생시켰고, 그 민자당의 김영삼은 5공 잔재를 일소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민주화 진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원하든 원치 않든 현실의 역사는 타협의 과정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상’의 역사를 내세워 ‘현실’의 역사에 이상적 화풀이만 하는 것은 정신적 사치일 수 있다. 운동권의 민주화 공로는 인정하지만, 투표 행위로 민주주의 헌법 이념을 정상화해 가는 타협적 민주화의 과정에서, 그 주역은 어디까지나 일반 국민이었지 운동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운동권 세력이 과도한 논공행상으로 민주화 공로를 독선적으로 독점하려는 행태를 보이는 것은 도덕적 우월감에 빠진 오만을 넘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이다. 김욱 교수는 민주화의 한 축이었던 민자당을 승계한 국민의힘도 민주화에 대해 자폐적 콤플렉스를 가질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러한 역사적 사실로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자긍심을 회복하고, 민주정당으로서 불완전한 부분을 채워 역사적으로 희미해진 민주적 정통성과 정당성을 복원하고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가난진(以假亂眞), 가짜가 진짜를 어지럽히고 거짓이 진실을 뒤흔드는 시대다. 진보의 자가당착과 타락, 보수의 정치력 부재와 무능이 국민을 한없이 우울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는 요즘이다. 국민은 권력의 유지와 획득에만 혈안이 된 그들이 부추기는 증오와 혐오의 정치 놀음에 놀아나지 말아야 한다. 4·19에서 5·18에 이르기까지의 민주화 과정엔 일신의 안위와 영달을 초개와 같이 버린 선각자와 국민의 순수한 열정과 열망, 희생이 있었다. 우리가 누리는 이만큼의 민주화를 성취하게 한 주역 중의 주역은 국민이다. 지지자를 광신도로 만들어 상대에게 맹목적 반감을 품게 하여 패거리의 이익을 추구하는 여야의 적대적 공생 체제도 현명한 국민만이 타파하는 수 있다. 5·18 민주화 운동 43주년을 맞아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서로 존중하고 화합하라, 5월을 더 아프게 하지 말라.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