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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05.14 06:55
<김춘수평전 6>
죽도와 봉천 체험, 그리고 자퇴로 떠난 경성제일고보
-김춘수 시인의 경성제일고보시절(3)
양 왕 용
경성제일고보 시절의 김춘수 시인의 체험 가운데 경성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그의 만년까지 뚜렷이 남아 있는 기억의 공간은 그의 고향에 있는 섬 죽도와 만주의 봉천이다. 이 두 공간은 우연히 바라보게 된 여인과 관계가 있다. 말하자면 사춘기 소년으로서의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관련된 기억들이다. 그런데 이 기억들은 김 시인의 뇌리를 오랫동안 떠나지 않아 뒷날 시 속에 변용되어 등장하기도 한다.
김춘수 시인은 부친이 서울에 집을 마련해 학교에 다니게 해주어도 경성보다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고향 통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명륜동 집에 온 할머니와 함께 인천 나들이에서 그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무심결에 드러나기도 하였다.(김춘수 자전 소설 『꽃과 여우』 ,민음사,1997.P67) 그는 방학이 되면 언제든지 고향에 내려갔다. 2학년 여름방학 때 매일이다시피 바다에 가서 살았다고 한다.(앞의 책p.95)
통영 앞바다에는 죽도라는 섬이 둘 있다. 모두 한산도와 가까운 섬인데 하나는 통영 내항 쪽에 있는 예전의 충무관광호텔 자리에서 2km 떨어진 무인도이고 하나는 한산도 면 사무소에서 4.4km 떨어진 한산도 바깥쪽에 있는 섬으로 현재에도 51 가구 70명(2015)이 살고 있으며 예전에는 한산초등학교 분교장(1945년 5월 개교-1994년 3월 폐교)이 있을 정도로 사람이 살았다. 김 시인의 다음 인용 글에서 말하는 무인도는 내항 쪽에 있는 것으로 충무관광호텔에서 섬을 매입하여 해수욕장으로 이용하고 일반인에게도 개방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사람은 살지 않고 낚시꾼은 드나들기는 한다.
이 섬에서 김 시인은 어느 여름날 친구와 함께 가지고 간 도시락을 먹고 난 직후 똑딱선에서 내린 챙이 넓은 하얀 파나마 모자를 쓴 하얀 원피스의 여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 여인은 잠시 어디로 갔다가 하얀 수영복 차림으로 나타난다. 그녀의 살갗은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치자꽃처럼 하얗기 때문에 돋보였다. 그 때만 해도 여자가 수영복 차림으로 해수욕장에 나타는 것이 드물었기 때문에 누군지 궁금했다고 한다. 그녀는 일본인 읍장의 딸로 도쿄의 어느 여자전문대학에 다니는 김 시인보다 서너 살 위로 방학 동안 와서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매일 오후 한 시쯤 똑딱선을 타고 와 서너 시간 섬에 머물었다. 김 시인은 그 시간에 맞추어 섬에 갔지만 다가가 말을 건너기는 커녕 멀리서 바라보며 여름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읍장이 바뀌었는지 그녀의 신상에 변화가 생겼는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김 시인은 이러한 감정을 연정이라고 그의 만년의 자전적 소설에서 규정하고 있다.(앞의 책p.96). 이러한 공간인 ‘죽도’가 그에게는 유의미한 공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지명은 1976년 9월에 엮은 정음사에서 엮은 정음문고 148 『金春洙詩選』 160페이지에 「竹島에서」라는 시의 제목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 시는 다른 시집에는 수록되지 않고 이 시집에만 ‘근작시초’편에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竹島에서」는 1976년 직전에 쓰여진 작품으로 그가 무의시에 집중하던 시기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전혀 죽도와는 상관없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시의 전문이 1980년 문장사에서 나온 김춘수 수상집 『시인이 되어 나귀를 타고』에 수록된 산문 「시인이 되어 나귀를 타고」(pp134-138)에 인용되고 있다. 이 산문의 제목은 이 시의 첫 행과 마지막 행이기도 하다. 이 산문에서 죽도竹島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그 부분을 인용하여 보기로 한다.
태평양으로 면한 남쪽 바다에 죽도竹島라는 섬이 있다. 일제 때 거기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뭍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해수욕장으로 이용되곤 했었다. 뭍으로 면한 섬의 한쪽이 백사장을 이루고 있었고 그 모래는 그야말로 밀가루처럼 부드러웠다. 얼마 전에 가보니 거기도 유원지로 개발이 될 모양으로 그 준비와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문들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필자는 그 섬을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을 쓴 일이 있다.
詩人이 되어 나귀를 타고
돌아가리,
새는 하늘을 날고
길가에 패랭이꽃은 피어 있으리.
보라,
마크로네시아의 붉은 입술.
보라,
마크로네시아의 가는 허리.
돌아가리,
詩人이 되어 나귀를 타고
이 시 「竹島에서」는 월간 ⟪시⟫ 2020년 9월호 200페이지에 <문학-역사 기행 시선35>의 경상도 편 맨 첫 작품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호인 2020년 10월호에는 그렇게 구체적 공간의 시로 보기는 어렵다는 일종의 반론인 이기철 시인의 글 「김춘수의 <죽도에서>.에 대한 조언」( pp148-151)이라는 글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이 교수 는 이 글에서 ‘죽도’가 포항시의 어시장 ‘죽도’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물론 이 교수의 포항의 ‘죽도’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옳은 주장이다. 포항의 죽도를 태평양과 면한 남쪽 바다에 있는 섬이라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영 앞바다 한산도 옆에 붙어 있는 ‘죽도’라면 그 사정은 달라진다. 즉, 태평양을 면해 있고 김춘수 시인의 자전소설에 나오는 서술과 앞의 인용이 유사하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이 시는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무의미시의 중요한 기법이라고 볼 수 있는 자유연상에 의존한 작품이라서 구체적으로 김춘수의 죽도 체험이 형상화 되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 시의 중간 부분 ‘보라./마크로네시아의 젖은 입술./보라./ 마크로네시아의 젖은 허리’의 관능적인 표현은 이 시를 쓰기 근 40년 전에 본 일본인 읍장 딸의 하얀 해수욕복 입은 이미지가 무의식적으로 연상된 것이 아닐까 하는 주장을 해본다. 물론 이 시를 쓰고 나서 20년이 지난 뒤에 쓴 자전소설이기는 하지만 김춘수 시인의 의미 있는 삶과 체험의 공간을 시의 비밀과 연결시키는 일은 분명히 유의미한 일일 것이다.
김춘수 시인은 경성고보 4학년 때인 1938년에 만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예나 지금이나 졸업반 때에는 상급학교 진학에 집중해야하기 때문에 4학년 때에 간 것이다. 그 당시의 만주는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1932년 3월1일에 독립한 일종의 일본의 괴뢰국가였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집정으로 앉히고 신경(현재 장춘)을 수도로 정하여 1932년 일본이 정식 국가로 승인한데 이어, 독일, 로마 교황청, 스페인, 항가리, 폴란드 등이 승인하여 국가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국토는 동북삼성인 요녕, 길림, 흑룡강 성을 포괄하였고 인구는 3000만명 가량이었다. 1934년 제정帝政이 수립되어 독자적 연호도 강덕康德으로 정하고 일본, 조선, 중국, 몽고, 만주의 오족협화를 내세웠지만 실권은 신경에 사령부를 둔 관동군사령관이 잡았고 경제개발권도 독점하였다. 만주국 수립 이후 중국이 국제연맹에 제소하자 조사단을 파견하여 일본군 철수를 권고하나 일본은 거부하고 33년 3월 국제연맹을 탈퇴한다. 1945년 2차대전 끝 무렵 소련군에 의하여 관동군이 괴멸되고 푸이가 민중에 잡히자 만주국은 망하고 만다. 이로 미루어 볼 만주국 중반기인 1938년 일본의 의도대로 어느 정도 근대화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만주로 김 시인으로서는 생애 처음의 해외여행을 한 것이다. (김춘수 자전소설『꽃과 여우』 pp90-94>참조)
김 시인은 한반도보다 광활한 국토에 놀라기도 하고 신경의 넓은 도로와 고층 건물 그리고 활발한 토목, 건축공사로 경성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김 시인은 신경보다는 청나라의 유적과 일본이 건축한 근대적 건물이 공존하는 봉천에 더 매료되었다. 한 학년 전체인 200명(1935년 입학생은 200명이 넘었으나 36회로 졸업한 졸업생은 175명으로 되어 있음)의 학생들이 봉천에 있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여관에서 작은 방의 방문을 임시로 제거하여 만든 큰 방 두 개에서 100명씩 잤다고 기억하고 있다. 김 시인의 기억에 남아 있는 장소는 일본군에 의하여 패퇴한 중국 국민군 이 지역지도자 장학량(1898-2001)의 아버지 장작림(1875-1928)의 한 바퀴 도는데 한나절이 걸리는 거대한 분묘를 마차로 돈 것을 기억하면서, 그 분묘 안을 구경 못한 것에 대하여 아쉬워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것보다 인상적인 것은 김 시인 자신이 ‘충격적 만남’(앞의 책 p.91)이라고 하는 백화점 2층 한 코너에서 발견한 점원 아가씨의 모습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수랍水蠟같은 하얀 얼굴빛이 돋보이는 여인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그 점원의 얼굴빛과 모습을 ‘희기는 희되 그 흰 빛은 처음 보는 흰빛이다. 상아빛보다는 더 희고 종잇장보다는 상아빛에 가깝고 더 아련하다. 게다가 옻칠을 한 듯 새까만 머리채가 어깨까지 드리워져 있다.’라고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앞의 책.p91-92) 뿐만 아니라 그 백화점을 샅샅이 다 둘러보고 여관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의 뇌리에서 그 점원 아가씨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으며, 그는 백화점에서 사온 안에 위스키가 든 초콜릿을 깨물며 눈은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도 가끔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김 시인은 그것을 ‘죽도’ 사건과는 다르게 연정이 아닌 다른 어떤 감정이라 보고 있다. 이 체험은 그의 장시 「처용단장處容斷章」 1부의 <32>의 뒷 부분으로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봉천奉天에서 수랍水蠟 같은 하얀/양귀비꽃을 봤다. 거기가/만몽 백화점滿蒙百貨店이던가,’ 그리고 그의 자전소설에도 <32>를 전문 인용한(앞의 책 p.89) 후에 만주 수학여행 체험을 서술하고 있다. 이 시는 김 시인 자신이 언급하고 있듯이 그의 나이 70에 쓴 시이다. 이렇게 젊은 날의 미묘한 감정이 50년도 넘게 기억되어 시로 형상화 된 것이다. 김 시인의 시가 비록 순수시 혹은 존재론적 시, 나아가서 무의미 시로 변화되어 갔지만 그의 유년기의 체험을 비롯한 갖가지 체험이 중요한 시적 제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지낸 그의 경성제일고보 시절은 1939년 4월 드디어 졸업반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샤밋소의 『그림자 없는 사나이』의 일역판을 읽고 그 소감을 일기장에 적은 것으로 일어난 일종의 필화 사건에 휩싸이게 되어 2학년 때부터 악연이 있는 5학년 담임인 이토 교사로부터 요주의 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요주의 인물이 될 소지는 2학년 때 이미 그의 학적부에 언급한 대로 ‘사상적 요주의’라고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로부터 한참 지난 뒤 담임은 상급학교 입학시험을 치기 위해서는 소견표 작성을 위하여 일종의 모의 소견표를 배부하고 학생들 각자에게 기입할 사항을 기입하여 제출하라고 하였다. 그 모의 소견표에 사상을 기입하는 난이 있었다. 그러나 담임은 그 난은 본인이 기입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 시인은 그 난에다 스스로 ‘불온’이라고 기입하여 제출하고 말았다. 담임에게 지난번 일기장 사건도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불려갔다. 그리고 그는 그 때의 상황을 실감나게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너 이게 무슨 짓이냐? 불온이라는 뜻을 알고 쓴 거냐?’라고 다그쳐 물었지만 나는 솔직하게 내 입장을 적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물론 불온의 뜻을 잘 안다고 했다. 그는 「쇼가 나이 야쓰다네!」(이거 정말 어처구니 없구만) 라고 한 마디 내뱉듯이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의 허락도 받지 않고 교무실을 빠져 나왔다. 그 길로 나는 자퇴서를 써가지고 가서 어이가 없어하는 그의 면전에 내던지듯 하고는 발길을 돌린 다음 학교에는 두 번 다시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앞의 책 p79)
김춘수 시인의 경성제일 고보 시절은 이렇게 끝났다. 그의 학적부 5학년 부분은 모두 공란으로 처리 되어 있고 ‘퇴학 소화15년 (1940년)1월 말일’로 기록되어 있다. 3월이 졸업이니 실질적으로 5년 과정을 거의 다 다녔으나 중퇴자가 된 것이다. 그 뒤 담임으로부터 졸업하고 가라는 권유도 받았으나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경기고등학교동창회에서 편찬한 『경기인백년사』(2000년)에서는 김춘수 시인을 36회의 인물로(정계; P34,/문학계;P686) 소개하고 있다. 그의 동기 가운데 유일한 국회의원이고 시인으로 그의 선배는 신석초(24회)가 유일하다. 그의 동기 가운데 유명 인사로는 한국 고고학의 태두 김원룡(1922-1993), 역시 한국 경제학의 초석이 된 임원택(1922-2006)을 들 수 있다. 그 외 법조계에 장순용(광주고검장 역임), 한만춘(서울가정법원장 역임), 정치학 고문석(한양대 교수 역임), 기계공학 박영조(한양대 교수,한국베어링사장역임), 의료계에 권영국, 서광륜, 방숙 등 14명으로 가장 많은 동기생이 수록되어 있다. 금융계 이태호(한국수출입은행장,,대우증권 회장 역임), 한완수(새한종금 사장 역임), 이문탁(경기은행장 역임), 음악계 곽상수(연세대 명예교수) 등이다.
김 시인의 바로 밑의 동생 김규수(1925-1954)는 서울의대를 졸업한 의사로 39회이나 일찍 작고하여 수록되지 못하였고, 서울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온 막내 김형수는 41회로 네팔 대사를 역임하여 외교계 인사로 수록되어 있다.
<양왕용/ 시인, 부산대 명예교수,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동북아기독교작가회의 한국측 차기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