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인문학 수프
작성일 : 2023.05.14 06:50
1-3. 강호(江湖)란 무엇인가
/양선규
무협(武俠) 장르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우주의 중력(重力)을 하찮게 여기는 그 종횡무진하는 경신(輕身)에 있다. 지붕 위를 붕붕 떠서 날아다니고, 휘청거리는 대나무 가지 위에서도 뒷짐 지고 태연히 칼싸움을 벌이는, 오직 상상으로만 가능한 세계를 무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보여준다. 평생 땅바닥에 딱 붙어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인 우리는 그런 ‘중력으로부터의 무한한 자유’가 너무 통쾌하다. 그에 견주면, 그 나머지의 현란한 무술적 기예들은 고작 우수마발(牛溲馬勃, 쇠오줌과 말똥)에 불과하다. 그런 것들은 피나는 연습만 있으면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것들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을 아무나 할 수 없는 경지로 올려놓는 것이 도(道)다"라는 말이 있다. 기예를 닦는 모든 도들은 결국 인간의 한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경신(輕身)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에 속한다는 말이다. 절차탁마,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 되기 어렵다. 그렇게 본다면 오직 경신만이 무협세계의 알파요 오메가인 셈이다.
그동안 무협영화에서 경신(輕身)이 어떻게 다루어졌는가를 살펴보면 재미가 있다. 초창기 경신 장면은 대부분 슬로우 모션으로 처리되었다. ‘외팔이’ 시리즈를 필두로 왕우(王羽)라는 배우가 주연을 맡은 대개의 당시 영화들에서는 그렇게 경신을 일종의 ‘시간 이탈 장면’으로 처리했다. 중력을 개무시하는 경신 장면을 일종의 ‘공간의 법칙을 무시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시간 이탈’이라는 중화제를 섞은 것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중력의 법칙’에 대한 도발을 현실적 감각과 공존시켜 보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서로 반 보씩 양보하고, 서로 양해하자는 거였다. 주인공이 경신술을 사용해 공중으로 천천히 치솟으면 지상의 적들은 그저 멀건이 쳐다보고 있어야만 했다. 그 순간은 모두 정지 상태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만큼, 그런 어색한 장면을 참아야 할 먼큼, 중력의 세계를 이탈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기계적 설비나 와이어 액션 기술이 발달하기 전이다). 잠시 그러한 과도기를 거쳐서 비행기 소리 같은 굉음을 추가하는 ‘효과음 단계’가 온다. 슬로우 모션이 가지는 여러 가지 제약에서 벗어나는 조건으로 ‘굉음’이 추가되었다. 아마 그냥 맨몸으로 날아다니기가 아직은 좀 쑥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사람이 공중을 나는데 비행기 소리가 났다. 중력을 벗어날 때는 으레 그런 굉음이 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억지춘향식 효과음이었다. <동방불패> 때까지 그런 효과음의 잔류를 확인할 수 있다.
컴퓨터 그래픽과 와이어 액션이 발달하면서, 그리고 놀라운 속도로 다른 과학도 발달하면서, 경신은 자연스럽게 우리 곁에 안착했다. 놀랄 일이 많아지면서 ‘중력’에 대한 콤플렉스도 많이 경감되었다. 어차피 영환데 ‘날면 좀 어때?’라는 시건방진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와이어 액션 없는 무협이나 액션물은 아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나는 일’은 이제 일상화되었다. 이제 경신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경신 다음으로 무협장르에서 매력적인 것이 ‘강호(江湖)’라는 개념이다. 자연(自然)이라는 원뜻에서 승부의 세계, 성취의 세계, 의리의 세계, 호연지기의 세계 등으로 그 외연을 넓혀간 단어가 바로 강호다. 세간의 율법을 무시하고 오직 무공의 성취에 몰두하는 한편, 불의를 보면 그 자리에서 바로 응징하는 무협들의 활약 공간이 바로 강호다. 그 역시 ‘현실의 중력’을 간절히 벗어나고픈 소시민들의 열망이 만들어낸 일종의 가상공간, 즉 또 다른 차원에서의 ‘공간 이탈’이라고 할 수 있다. 강호에 관해서는 영화 <와호장룡>이 깊이 파고들었다. 앞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와호장룡>에는 ‘경신이 가능한 인물’과 ‘경신이 불가능한 인물’이 등장한다. 같은 공간에 살지만 그 공간과의 관계가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인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영화는 일단 경신 능력의 유무로 강호와 강호 아닌 것을 나눈다. 그리고 강호를 소유한 자와 강호로부터 배제된 자의 대결은 항상 싱겁게 끝난다. 그 다음, ‘강호를 깊이 파고드는 영화’ <와호장룡>은 강호를 다시 세분한다. 등장인물들의 발언과 행동을 통해서 보여주는 각양각색의 강호는 다음과 같다. ① 강자가 지배하는 세계이며 자신이 하려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누구든 죽여야 하는 ‘죽고 죽이는’ 세계가 강호다(푸른 여우, 정패패 분). ② 온갖 구속과 간섭을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곳이 강호다(옥교룡, 장자이 분). ③ 평생을 강호에서 살았지만 한 번도 자유로운 적이 없었으며 우정과 신의가 없으면 오래 버틸 수 없는 곳이 강호다(유수련, 양자경 분). ④ 강호는 고수들의 세계이지만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 들끓는 세계이므로 떠나고자 한다(이모백, 주윤발 분).
영화 <와호장룡>은 원작의 뒷받침과 그 넘치는 의욕에도 불구하고 무협장르의 2대 매력인 ‘경신과 강호’를 유익하고 재미있게 보여주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한다. 특히 강호에 관해서는 묘사를 해야 할 존재를 지나치게 설명하려 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영화 <동방불패>에서 강호를 떠나려는 영호충에게 그의 도움이 필요한 임아행은 “인간 자체가 강호인데 어떻게 강호를 떠난단 말이냐”라고 일침을 놓는다. 이를테면 “네가 꿈꾸는 이상향은 어디에도 없다. 인간이 가는 곳은 어디나 다 생지옥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의 욕망 중 가장 원초적인 욕망인 ‘자신을 복제하고 싶은 욕망’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규화보전을 불길 속으로 던져버린다. 그에게 강호는 인간의 삶을, 그 욕망과 윤리를, 가장 원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었다. (동방불패의) 부질없는 욕망도 (영호충의) 이상에 치우친 윤리 관념도 강호와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결국은 강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임아행에게 기회가 온다. 복수도 하고 권좌도 다시 찾는다. 영호충에게 피치 못할 은원(恩怨)의 문제가 생기게 된 것도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사적인 연애감정보다 의리를 중시하는 것이 영호충이 생각하는 강호의 윤리였으므로 영호충은 동문사제들을 무참하게 살해한 동방불패를 향해 복수의 칼을 겨눈다. 어제의 연인이 오늘의 적이 된 것이다. 부질없는 욕망(변화된 성정체성이 강요하는)의 충동에 휘둘린 대가를 치러야 했던 동방불패는 임아행과 영호충의 연합군에게 의해서 끝내 허무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거듭 말하지만 영화 <와호장룡>은 여러 가지 장점(탁월한 영상미, 원작을 잘 살려 무협영화의 격을 일층 높인 점 등)에도 불구하고 무협영화로서는 완전히 실패한 영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경신(輕身)’이 허용된 인물들이 시대적 추이와 동떨어지게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굳이 그들에게만 경신이 허용되는 이유가 극중에서 전혀 설득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라의 녹을 먹는 무관이나 포청 관리는 땅바닥을 기어 다니고 도둑이나 사설 경호업자들은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닌다는 설정이 너무 안일하고 일방적이다. 일종의 고리타분한 스테레오 타입이다(비강호인과 강호인의 기계적 구분). 천한 신분인 내시들 중에서 막강한 무예 고수가 있어서 온갖 악행과 만행을 다 저지른다는 <소오강호>나 <(신)용문객잔>식 인물설정과 비교해 볼 때 너무 안일하고 무성의하다는 느낌을 준다. 마치 50년 전의 경신 장면으로(슬로우모션으로 처리되거나 굉음이 추가되는 식의) 되돌아가는 느낌이다. 여주인공 ‘옥교룡’이 ‘푸른 여우’에게 남모르게 무술을 전수받아서 어린 나이에 고수가 된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영화 서사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는 주요 인물을 완전히 납작한 인물로 만들어 버렸다. 주야장천, 무예를 평생의 가업으로 삼아온 여장부(유수련)와 남의 눈을 피해 찔끔찔끔 무예를 익힌 연소한 고관대작의 딸(옥교룡)이 일진일퇴를 주고받는 무예의 맞수로 등장한다는 것은 무협 독자들을 깔봐도 너무 깔보는 처사다(오우삼이 미국에서 만든 헐리우드 영화라는 것을 감안해도 그렇다). 신비로운 영약을 복용한 것도 아니고 천하의 절정고수에게 진기를 이양(전수) 받은 것도 아닌데, 물론 자질도 좋고 훔친 무예비급을 통해 스스로 속성 과정으로 무예 공부를 했다고 설명은 되고 있지만, 그런 뻥튀기 무예 실력을 갖는 인물 설정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없다. (무협영화의 주제를 망각하고) ‘인생론적 주제’를 깊이 파고들다 보니 억지로 ‘제자를 두어 자신을 복제하고픈 마음’의 간절함이 과장되게 전경화 되고, 자기 복제의 욕망실현이라는 동일한 목적을 가진 선(이모백)과 악(푸른 여우)의 대결을 보다 극적으로 그리려다 보니(옥교룡의 가치가 충분히 인정되어야 한다) 그런 억지춘향식 서사 전개가 불가피했던 것 같다.
둘째, ‘강호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주제적 층위에서 정면으로 다룬 것도 실패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보인다. 그런 주제는 사실 무협장르의 본질에서 많이 벗어난 것이다. ‘강호’라는 말은 그 자체가 포괄적이고 모호한 개념이다. 그것은 하나하나 나누어서 개념적으로 설명될 존재가 아니라 상황적으로 그때그때 한 장면씩 극적으로 묘사되어야 하는 존재다. 굳이 설명이 필요하다면, <동방불패>에서 임아행이 “인간이 바로 강호다”라고 말하는 것 정도면 충분하다. 그 정도가 딱 알맞다. 스승과 제자가 나오고(옥교룡을 둘러싼 이모백과 푸른 여우의 갈등) 도(道)가 나오고(이모백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 사랑과 배신(푸른 여우와 이모백의 스승과의 악연), 애정과 우정(이모백과 유수련의 엇갈린 인연), 복수와 응징(푸른 여우와 이모백의 흑백도 간의 갈등)이 설명의 대상이 되어 화면을 가득채우는 동안 <와호장룡>은 무협영화로서의 매력을 서서히 잃어간다. 초반의 박진감을 주던 사건 전개가 후반에서는 지루하고 틀에 박힌 이야기 공부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사방 필방으로 미끄러지는 공간으로 초대해 ‘중력에서 벗어나는 신나는 환희’를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답답하고 상투적인 홈 패인 공간으로 다시 끌고 들어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각양각색으로 존재하는 강호를 묶는 하나의 본질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중력으로부터의 자유(탈출)’ 하나뿐이라는 것을 <와호장룡>은 망각한 것 같다.
우리나라 배우 정우성과 홍콩 배우 양자경이 연상연하 커플로 열연한 <검우강호>(劍雨江湖, 수차오핑, 2010)는 무협지의 몇 가지 공식, 이를테면 ‘불패의 가족주의’, ‘악의 전면적인 토벌’, ‘발견을 통한 기적 같은 승리’, '양보할 수 없는 해피 엔드' 등을 고루 갖추고 있는 정통 무협영화다. 이른바 고전적인 무협영화에 속한다. <동방불패>(서극, 1992)와 같은 퓨전 무협영화와는 근본적으로 그 궤를 달리 한다. <검우강호>가 왜 문제적인가라는 문제는 <동방불패>와도 관련이 있다. <동방불패>의 성공 이후에 정통 무협은 완전히 사양길로 접어든다. 더 이상 관객들이 ‘시시한’ 무협영화를 찾지 않은 결과다. 그만큼 <동방불패>가 대단한 영화였다는 말이 된다. <동방불패>는 오직 <동방불패>만이 넘어설 수 있었다. 그 어떤 무협영화도 <동방불패>를 넘어설 수 없었다. 이안 감독이 허리우드의 자본력을 등에 업고 주윤발, 양자경, 장쯔이, 장첸과 같은 화려한 배우들을 동원해 만든 <와호장룡>(2000)도 <동방불패> 앞에서는 고작 ‘씹던 껌’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그저 물에 물 탄 듯한 싱거운 영화에 불과했다. 장장 18년을 기다려 나온 정통 무협영화 <검우강호>가 대단한 영화가 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인간은 결국 가족(원초적 사랑과 무조건적 유대)을 통해 구원된다는 무협의 전통적인 주제와 약하고 선한 주인공이 만난을 극복하고 강해져서 불패의 적을 패퇴시킨다는 전형적인 무협 서사를 가지고 당당한 모습으로 관객들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무협지의 기본 구성 원리는 ‘발견을 통한 주인공의 승리’이다. 약한 주인공이 어떻게 강해지는가가 무협지 서사의 핵심인 것이다. <검우강호>에서는 채근담의 세 가지 처세의 요결(영화에서는 그것들의 종합적 해석인 '이굴위신'도 독립된 자격을 얻어서 네 가지 비법 중의 하나로 제시됨)이 결정적인 ‘발견’의 계기로 원용된다.
藏巧於拙 用晦而明 寓淸于濁 以屈爲伸 眞涉世之一壺 藏身之三屈也
(장교어졸 용회이명 우청우탁 이굴위신 진섭세지일호 장신지삼굴야)
교묘한 재주를 서툰 솜씨 속에 감추고, 어둠으로써 밝음을 드러내며, 청렴하면서도 혼탁한 가운데 머무른다. 이 모두 굽힘으로써 몸을 펴는 것을 바탕으로 삼는다. 이것이 곧 세상을 살아가는 안전한 길이요 몸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세 개의 굴이다. [채근담]
자신에게 무예를 전수한 암살집단의 괴수 전륜왕(轉輪王, 왕학기 분)을 물리치기 위해서 여주인공 세우(細雨, 양자경 분)가 사용한 4가지 무예비법(藏巧於拙 用晦而明 寓淸于濁 以屈爲伸)이 바로 채근담에 나오는 그 세 가지 처세의 요결과 그 요약적 해석이었던 것이다. 워낙 자연스럽게 등장해서 그것이 고래(古來)의 무공비급에 나오는 구절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무예에 나름 식견이 있는 작가(혹은 무술감독)의 근거 있는 창작 정도는 되는 줄로 알았다. 그만큼 그럴 듯했기 때문이다. 실전에서는 거리, 박자, 담력, 속도가 중요한데(一眼, 二足, 三膽, 四力), 앞서 든 예의 그 4가지 요결(발견의 계기)은 거리와 박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상대의 허를 찌르는 교묘한 '기술의 운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장단, 곡절이라는 무기의 특성을 이용하기도 하고 대박자와 소박자, 그리고 엇박자를 이용하기도 해서 상대를 제압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허허실실, 상대가 예기치 못한 기회를 만들어 내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고 그것을 타고 승부를 내는 '승리의 기술(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오래된 전승이긴 했지만 그 담론이 여러 사람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채근담에 수록되면서였다. 스스로 낮추어서 환난을 비켜가라는 가르침인데 그것을 사람이 죽고 사는 대결의 생사관문에 갖다 붙인 것이다. 입맛이 씁쓸하기도 했지만 재미는 있었다. 결국 다 한 가지가 아니겠는가? 사람이 사는 이치가 거기서 거기라는 말이었다. 무술이든 처세든 요점은 하나다. “자기를 감추고 상대를 속여라”였다. 어쨌든, 내게는 천장지구(天長地久) 이래 최대의 발견이 되는 것이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그 무예 비결에 대한 그동안의 궁금증은 일거에 해소가 되었다. 문자 그대로 용회이명(用晦而明, 어둠을 이용해 밝음을 드러냄)이 되는 거였다.
글 쓰는 자들의 공통된 욕심 중의 하나가 좋은 말이 있으면 어디든 갖다가 다시 내 것으로 써먹는 것이다. 나도 원전(原典)의 장교어졸(藏巧於拙)을 가져다 장졸우교(藏拙于巧)로 바꿔서 써먹었다. 나머지 것들도 조금씩 ‘내 식대로’ 가져다 썼다. 장졸우교는 “못난 생각을 기교를 써서 감춘다”라는 뜻으로 썼고 우청우탁은 “흐리고 맑음이 둘이 아니다”. 용회이명은 “어둠 속에서 빛은 빛난다”, 이굴위신은 “굽혀야 펼 수 있다”로 새겼다.
나는 그렇게 재미삼아 갖다 썼지만 <검우강호>에서 그것들이 사용된 문맥은 훨씬 의미심장하다. 불세출의 여자객(女刺客) 세우는 암살집단 흑석파의 두목 전륜왕의 수제자였다. 스승에 의해 살수(殺手)로 키워진 그녀는, 그에게서 복대검(腹帶劍), 일명 벽수검(碧水劍)의 용법을 전수받는다. 벽수검법을 시전하기에 가장 적합한 복대검은 검신이 얇아서 허리띠로도 쓸 수 있는 칼이다. 가벼워서 여자가 쓰기에 알맞다. 검신(檢身)의 굴신(屈伸)이 변화무쌍하여 많은 고수들이 그 칼 아래서 하릴없이 자기 목숨을 바쳐야 했다. 그러나 그 물 흐르듯 유연한 벽수검법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단검에 약하다. 길고, 휘청거리는 칼에는 짧고 단단한 단검의 단도직입(單刀直入), 변화무쌍(變化無雙), 자유자재(自由自在)가 치명적이다. 작아서 상하의 움직임이 용이하고 짧아서 원간(遠間)을 요하는 긴 칼에게 가까이 접근해서 공격의 기회를(거리를) 내주지 않는다. 우리 속담에 나오는 것처럼 작은 고추가 매운 경우가 된다. 그걸 발견한 이가 세우의 첫 연인이었던 지혜대사()다. 소림사가 인정한 귀재, 무예의 천재였던 지혜대사는 스스로 목숨을 바쳐서 세우의 회심(回心)을 이끈다(그의 욕심은 ‘죽더라도’ 남을 회개시키는 것, 무한히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우에게 벽수검법을 깨뜨리는 네 가지 요령을 전수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세우에게 회심을 권한다. 만약 회심하지 않고 그 검법 그대로 자만하여 살수로 나대다가는 언젠가 그 약점 때문에 사지가 찢어지는 고통을 겪으며 비참하게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 때 그가 전수한 그녀의 벽수검법을 깨는 네 가지 비법이 바로 ‘장교어졸 용회이명 우청우탁 이굴위신’이다. 작가가 그렇게 3분법을 4분법으로 만든다. 무기의 소용과 몸동작의 허실이 이루어내는 상호적인 작용과 상대의 박자를 깨뜨리는 요소요소의 기회(타이밍)를 그 네 가지 비결로 압축한다.
얼굴을 바꾸고 숨어살던 세우는 바보 같지만 착하고 성실한 한 남자(강우생, 정우성 분)를 만나게 된다. 새로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세우, 이제 강호를 떠나 행복한 한 가정의 주부로 살고 싶은 세우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암흑가의 두목은 자신을 배신한 수하를 절대로 그냥 두지 않는다) 전륜왕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그의 야망과 야욕을 제압하고, 그의 마수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홀연히 강호를 떠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타협을 모르고 오직 전부 아니면 전무를 요구하는 절대악 전륜왕을 물리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자기의 몸을 던져 그를 이겨서(죽여서) 악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안에 있는 것이든 밖에 있는 것이든, 진정한 무사는 ‘그 한 놈, 절대악’을 처단할 수 있어야 한다. 전륜왕을 죽이지 못하면 세우는 새롭게 태어날 수 없다. 그러나 전륜왕은 세우를 만든 장본인이라 세우에게는 언제나 넘사벽이다. 그에게 전수받은 솜씨로는 도저히 그를 이길 방도가 없다. 벽수검법에 치명적인 결점(하자)을 심어놓은 것도 이런 경우를 대비한 전륜왕의 음흉한 선견지명이었다. 길은 딱 하나 있다. “네 칼로 너를 치리라”, 그가 가르쳐준 바로 그 벽수검법(碧水劍法)을 그 스스로 시전(始展)하도록 하는 길밖에 없다. 그의 자만과 방심이 그렇게 자기 자신을 궤멸시키도록 유도해야 한다.
거기서부터는 세우의 발견이다. 세우는 전륜왕의 자부심과 자존감을 긁어서 검투사에게는 필수적인 명경지수(안정된 심리)에 스트레치를 남긴다. ‘꼬추’도 수염도 없는 주제에 무슨 전륜왕이냐며 그를 조롱한다(암흑가의 제왕 전륜왕의 정체는 9품 말직 내시였다. 그는 자신의 불구를 넘어서기 위해 줄기세포 역할을 하는 달마의 시신에 집착한다). 분개한 전륜왕은 천지를 모르고 스승을 능멸하는 못된 제자의 버릇을 본때 있게 가르치고파서 제자의 칼을 뺏는다. 그 역시 “네 칼로 너를 치리라”를 외친다. 그렇게 용심을 부린다. 벽수검법의 극치를 써서 자존심도 회복하고 제자도 가르치고 싶은 것이다(스승은 누구나 늘 가르치고 싶다). 그러나 자만과 방심은 언제나 싸움꾼들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다. 거기서 전륜왕은 무너진다. 세우는 남편(지양, 정우성)의 몸에 미리 꽂아둔 남편의 단검으로(남편은 장검과 단검을 같이 쓰는 이도류 검법의 달인이었다. 전륜왕을 속이기 위해 세우는 남편을 가사상태로 만든다) 전륜왕을 완벽하게 궤멸시킨다. 장교어졸, 용회이명, 우청우탁, 이굴위신이 차례차례 시연되면서 잔인하게 세상을 지배하던 거대악은 ‘발견의 진실’을 아는 자에 의해서, 가족을 통한 구원을 욕심내는 자에 의해서, 무참하게 11번이나 찔려서 무너진다. 오직 자신 하나만을 사랑했던 ‘그 한 놈’은 결국 그를 죽이고 새 삶을 얻고자 하는 자에 의해서 소멸되게 된다. 세우는 ‘그 한 놈’을 죽이고 세상을 새로 얻는다. 발견을 모르던, 욕심 안에서만 살던 전륜왕은 그렇게 쓸쓸히 사라진다.
모든 것은 제 욕심 안에서, 스스로 만든 자신의 틀 안에서 생명을 얻기도 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문제는 욕심이다. 오직 자기만이 누구에게나 치명적이다. 밖에서 부는 바람은 옷깃을 여미어 막을 수 있지만, 안에서 곪아터지는 것은 누구도 어쩔 수 없다. 욕심에는 나만을 위한 것도 있지만 남을 위한 것도 있다. 지혜가 죽으며 세우에게 남긴 아난의 게송이 이 영화가 정통 무협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알려준다.
“저는 돌다리가 되고 싶습니다(아원화신석교, 我願化身石橋). 오백년 바람에 견디고(수오백년풍취, 受五百年風吹), 오백년 비에 젖고(수오백년우타, 受五百年雨打), 오백년 햇볕에 쬐이고(수오백년일쇄, 受五百年日晒), 그렇게 견딘 후에 그녀가 저를 밟고 건너가기만을 원합니다.”
부처를 따르기로 맹세한 아난은 오는 길에 한 소녀를 만나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사랑에 고뇌하는 사촌 동생 아난에게 부처님은 묻는다. “너는 그 소녀를 얼만큼 사랑하느냐?” 부처님의 질문에 아난은 그렇게 대답한다. 유명한 아난의 게송이다. 이 아난의 대답은 이 영화의 전편에 걸쳐 배경음으로 연주된다. 오백년씩 견디는 사랑이 요소요소에 배치된다. 지혜도 세우도 지양도 모두 돌다리가 되기를 원한다. 오백년씩을 견디는 돌다리야말로 우리가 목표 삼아야할 욕심의 좌표라고 영화는 강조한다. 그게 사랑이고 그게 가족이라고 가르친다. 그걸 알면 세우(細雨)고, 모르면 전륜왕(轉輪王)이라는 거다.
<소설가/ 대구교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