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김춘수 평전

김춘수 평전

<김춘수 평전 5> 운동장과 도서관과 영화관이 더 큰 위안이었다 -김춘수 시인의 경성제일고보시절(2)

작성일 : 2023.05.06 02:33

<김춘수평전; 5>

 

운동장과 도서관과 영화관이 더 큰 위안이었다

-김춘수 시인의 경성제일고보시절(2)

 

양 왕 용

 

김춘수 시인의 경성에서의 하숙생활은 1년 만에 끝났다. 경성제일고보 2학년 때인1936년 김 시인의 선친은 명륜동 372-6의 신흥주택가의 조그마한 기와집을 사서통영에서 보통학교(초등학교)를 다니던 김 시인의 두 남동생(김규수<1925년 생>. 김형수<1927년 생>)을 서울로 전학시켜 함께 공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회동의 하숙집에서는 학교까지 10분밖에 안 걸렸지만 명륜동은 걸어서 40(김춘수 자전소설 꽃과 여우<민음사.1977>p73)이 넘게 걸리는 먼 거리였다. 그 당시는 교통이 복잡하지 않아 걸어서 다닐 수 있었겠지만 2학년으로 160Cm(학적부에 기록되어 있음)의 키였기에 다소 힘들어도 걸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지금의 네이버 지도에 의하면 가회동은 699m10분 거리고 명륜동은 2.9 Km에 창경궁과 청덕궁의 담 근처를 따라 건널목을 다섯이나 건너는 47분 거리이다.

2학년 때 비록 하숙생활을 청산하고 서울 집에서 학교를 다녔으나 김춘수 시인의 정신적 방황은 끝나지 않았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글은 다음과 같다.

 

한 때 성적이 급피치로 뛰어오르는가 하더니 일 년이 채 못 가서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았다. 나는 책상머리에 앉기만 하면 머리가 멍해지고 안정을 찾지 못했다. 나는 사춘기를 슬기롭게 넘기지 못한 듯하다. 생리 문제를 잘 조절하지 못하고 나는 우울하기만 했다. 다른 학우들은 어쩌고 있는지? 나는 좀 특별한 체질을 타고난 것이 아닐까 하고 혼자서 고민도 많이 했다. 지내놓고 보니 열댓 살 난 남자애란 누구나 다 그런 건데 나는 너무 민감했다. 학교 대신에 어디로 갔던가? 도서관과 극장이다. 도서관에서는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가 있었고 극장에서는 어둠 속으로 내 몸을 감출 수가 있었다. 남과 나를 차단할 수가 있었다는 말이 되겠다. (김춘수 자전소설 꽃과 여우pp66-67)

 

김 시인은 앞의 책에서 가끔 첫 번째 하숙집이 있는 가회동 언덕길을 찾아 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어느 날에는 40분 넘게 걸어서 학교로 가 다음날의 체육시간에 대비하여 철봉대의 매달려 턱걸이 연습을 했다고도 기억하고 있다. 턱걸이 연습을 하다가 숙직을 하던 로이드안경을 쓴 젊은 일인 한문 선생에게 들켜 도망쳤으나 다음 날 체육시간에 서툰 턱걸이에 대하여 크게 야단치지 않은 까닭은 젊은 한문 선생이 체육선생에게 연습 사실을 알려주어 그러했을 것이라 여겨 그 한문 선생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있다. 이렇게 그는 체육에 대한 열정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대담(강현국 엮음 우리 어느 더 다시 만나리<시인김춘수의 문학과 삶>2019,학이사 p175)에서 중학시절 육상 100m 선수였다고 회고하고 있으며, 구기로는 중학 시절 농구, 대학 시절 야구선수를 한 것을 밝히고 있다. 그 가운데 농구 선수의 흔적은 김 시인이 오랫동안 간직한 사진으로 알 수 있다. <남선농구대회우승기념, 소화14(1939)813> 이라는 설명이 병기된 농구부 해양훈련 사진에 우승컵을 든 학생 뒤에 선글라스로 멋을 부린 김 시인이 앉아 있는 사진이 바로 그것이다. 그 당시의 김 시인은 170Cm에 가까운(학적부 3학년 키가 164Cm이고 4학년 때는 기록되어 있지 않음) 키로 농구선수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경북대 교수 시절 교직원 체육대회에서 농구 선수의 면모가 다소 보였다고 시인이고 그의 제자이자 동료였던 권기호(1937-) 경북대 명예교수는 회고하고 있다.

1939년 당시 일본은 19377월 일제에 의하여 조작된 세칭 노구교사건(북경 근교의 작은 돌다리에서 일본 군인이 행방불명됐다는 조작)을 빌미로 19377월 중국과 전면전을 중국영토에서 벌리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남녀중학생까지 근로보국이라는 미명으로 노력동원에 투입하였다. 김 시인의 사진 가운데 경기중학 근로보국대 사진도 있다. 이 사진 역시 1939년 사진이라 짐작된다. 왜냐하면 19394월 경기중학교로 교명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김춘수 시인은 문학과 철학에 대한 책은 주로 부립 도서관에서 이 책 저 책 닥치는 대로 읽었으며 그에 대한 지식은 또래에 비하여 월등하다고 자부하고 있다.(김춘수,앞의 책 P.77) 그러다가 일종의 필화사건에 휩싸이게 된다. 5학년 때라고 하는데 담임선생은 이토라는 키는 땅잘막하고 얼굴이 늘 벌겋게 상기되는 다혈질이었으나 마음은 크게 나쁘지 않은 호인이었던 40대 중반의 영어 선생이었다. 그때 김 시인은 일본어로 일기를 써서 매주 한번 씩 담임의 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일본어로 일기 쓰기는 일본어의 상용 정책의 방법이고 이 때 수업은 모두 일인 교사에 의하여 일본어로 했으며, 유일한 한국인 교사가 하는 조선어 수업은 이미 3학년 때에 끝났다. (학적부에 그렇게 되어 있고 김 시인도 그리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김 시인은 샤미소의 그림자 없는 사나이를 일어판으로 읽어 그 소감을 일기로 적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여기서 샤미소의 그림자 없는 사나이(1813)를 소개하기로 한다. 이 작품의 원작자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1781-1838)는 프랑스 귀족 출신으로 프랑스 혁명으로 귀족의 특권이 박탈당하자 독일로 망명하여 베를린에 정착하면서 독일인이 된다. 북극탐험선을 타고 여행을 하여 여행기를 남기기도 했다. 또한 낭만주의 작가와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식물학자로도 유명하여 베를린 식물원 원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는 2005년 윤효은 번역으로 그림자 없는 사나이로 처음 소개되었으나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2019년에는 열림원에서 최문규 번역으로 그림자를 판 사나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발간되었다. 그러나 원제를 직역하면 페터 슐레밀의 이상한 이야기 Peter Schlemihls wundersame Geschichte이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2019.문학동네)와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2015,문학과지성사) 등에서 언급되면서 사람들이 많이 찾게 된 책이다. 심지어 창작 뮤지컬로 2019년 제작되어 많은 관객을 확보하기도 했다. 주인공 페터 슐레밀이 자신의 그림자를 악마에게 팔아 부와 명예를 얻게 되지만 점점 고독해지고 결핍을 느낀다는 내용의 작품인데 작자의 프랑스 출신이 독일인으로 살아가는 고뇌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요즈음 다시 문제의 작품으로 대두되는 것은 급변한 다문화적 환경과 다국적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우리 교민들의 현실과도 관계가 있고, 공간 이동이라는 여행에서의 정체성의 혼란과 글로벌화로 인한 문화의 충돌과 교집합 등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김 시인은 이 작품을 1939년에 일역판으로 읽고 일기장에 조국을 잃은 사나이의 비애와 절망을 유치하고 객기어린 어조로 도도하게 늘어놓았다고 회상하고 있다.(김춘수 앞의 책 p78) 김 시인은 담임에게 불려가서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 그러나 담임은 그것을 크게 문제 삼지는 않고 앞으로 주시하겠다는 태도로 나왔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이토 교사와 2학년 때의 악연 즉, 수업을 까먹고 학교 뒷산의 정상에 드러누워 멍하니 하늘을 올려보고 있다가 아침 등굣길에 사온 계동의 유명 호떡집의 호떡을 꺼내어 먹는 순간 들킨 기억도 되살리고 있다.

이러한 방황을 반영하듯이 2학년 학적부 조행평가란에 사상적 요주의라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4학년 때에는 문학소년이라는 평가도 적혀 있다. 도대체 불과 15세의 소년에게 무엇 대문에 사상적 요주의라는 표현의 기록을 남겼는가는 알 수 없으나 어쩌면 김 시인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닐 것이라는 필자의 주장이 맞아 들어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음으로 김춘수 시인이 자주 찾은 극장(영화관)과 관련된 것을 언급해 보기로 한다. 김 시인은 비교적 어린 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의 영화편력을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김춘수 앞의 책 pp110-118) 김 시인의 영화관 출입은 중학 시절에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는 보통학교 상급반 시절부터 극장 출입을 했다.(김춘수 앞의 책 p110) 그의 친구 중에 미국영화 배급권을 가진 사람의 아들이 이웃에 살고 있어 그 친구와 함께 가끔 무성영화를 봤다고 기억하고 있다.

여기서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급변하는 통영의 문화 환경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미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오카야마현 어부를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꽃의 시인 김춘수가 태어난 통영을 찾다’) 그런데 통영에 <봉래좌>라는 극장이 강점기가 시작된 4년 뒤인 1914년 일본인 하시모토를 대표로 하는 일본인 40여명의 출자로 대화정 159-25(현재 문화동159-25)에 건립되었다.(이하의 설명은 김남석;일제 강점기 해항도시 통영의 지역극장 봉래좌연구,동북아문화연구 제48<2016> pp209-224 참조).이 때의 통영거주 일본인은 남자 806, 여자 805명 총 1,611 471가구였다. 이웃 도시 부산이나 마산과 비슷한 시기에 주로 풍성한 어획고와 그것의 해외 수출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도시 상황이 반영된 건립이었다. 극장 형태는 일본 본토의 가부키공연장과 비슷하였으며 2층 시설이 딸린 정원 380명의 다목적 공연장이었다. 그러나 일본인 전용극장으로 운영되지는 않았고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인의 문화창달의 주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통영청년단 활동사진대><선일영화부>가 이 극장을 이용하였다. 심지어 통영의 유일한 실내 공회당 역할까지 하여 1920년대 전국 지역극장의 위생 관련 활동사진 상영, 유명 극단의 전국 순회공연, 시민대회장, 각종 사안의 토론 장소, 각종 강연회, 음악회 등의 장소로 통영시민의 사랑을 받았다. 1930년대 말까지 다목적 공연장이자 영화상영관을 겸하다가 1939년에는 영화관으로 개축되었으며, 해방이후는 소유주도 한국인으로 바뀌고 봉래극장으로 개명되어 영화전용 극장으로 사용되다가 2005년 통제영 조성 사업으로 인한 대대적 시가지 개편 사업으로 폐쇄되고 그 자리에 주차장이 들어섰다. 그 당시의 진의장 시장은 공무로 해외출장 중이었는데 90년의 역사를 가진 문화유산을 보존 못한 점에 많은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금도 주차장 자리에 봉래극장을 복원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고 한다.

김춘수 시인의 초등학교 상급학년은 1930년대 중반에 해당되는데 봉래좌1930년 직전 영화상영의 휴면기를 거쳐 193010월부터 본격적 영화상영을 시작한다. 이 시기 아마 미국 영화 상영권을 김 시인의 친구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무성영화이지만 친구와 함께 자주 관람하였을 것이다. 김 시인의 회고에 의하면 이 때에 이미 미국 배우 여럿을 알고 있었으며 나론 나바르와 바스터 카튼은 김 시인의 우상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김 시인의 영화관람 취미는 경성제일고보 입학과 동시 경성의 다양하고 통영에 비하여 화려한 극장 시설(단성서<1907년 개관>, 우미관<1912>,조선극장<1922>, 명치좌<1936> )에 대한 호기심이 더하여졌다.

김 시인은 프랑스 영화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열거한 작품은 다음과 같다. 파리의 지붕 밑, 페페 르 모코,하얀 처녀지,아름다운 청춘, 아가씨의 호수,무도회의 수첩등인데 그 가운데 가장 감명 깊은 작품은 무도회의 수첩으로 들고 있다. 그리고 경성제일고보 시절부터 동경에서 발행하는 영화잡지 영화지우映畵之友를 구독하였고 그것을 통하여 영화지식과 정보를 습득하였으며 그 잡지에 수룩된 좋아하는 미남미녀 배우의 사진을 오려서 자기 방의 벽에 붙어두고 싶었으나 선친이 두려워 오래 참다가 일본 동경 대학시절에는 그것을 결행하였다고 한다. 일본 사무라이 영화와 미국 서부영화도 보통학교 때부터 좋아했다고 한다. 일본 영화나 서부 영화 모두 주인공은 정의의 화신이었으며 그들의 초인적인 능력을 닮고 싶었다고 한다. 이러한 초인에의 동경은 결국 그 당시의 답답한 심경과 현실을 뛰어 넘고 싶은 처지에서 왔으며 이러한 현실을 초월하고 싶은 어린 시절의 소망은 시인이 된 뒤에 초인으로서의 예수를 만나고 절망적인 현실을 뛰어 넘는 무의미의 세계와 연결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김춘수 시인이 중학시절 심취한 운동이나 도서관에서의 독서체험 그리고 영화관 체험은 답답하고 불안한 경성이라는 도시의 분위기와 습관화 되지 않는 학습욕구로부터의 탈출구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분방하면서도 현실 저항적인 자세는 그의 일본유학시절과 그 뒤 청장년으로서의 삶과도 연결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양왕용/ 시인, 부산대 명예교수, 한국현대시협 이사장, 동북아기독교문학회의 차기 한국측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