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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05.06 02:29
1-2. 귀신이 보낸 편지
/양선규
글쓰기의 최종 병기는 '뒤집기'다. 상식적 해석을 뒤집어서 새로운 발견을 도모하는 것이 글쓰기의 최고봉이다. 작가들이 즐겨 쓰는 ‘단단하고 위태로운’ 글쓰기도 결국은 이 '뒤집기'를 위한 고육책이다. 이번에는 귀신이 보낸 편지 이야기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간단하게 딱딱한 공부를 한 번 했으면 한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보는 게 좀 있어야 제대로 생을 즐길 수 있다고 옛날 어른들이 자주 말씀하셨으니 일단 그 말을 새겨듣도록 하자. 그것과는 별개로, ‘귀신=두려움’의 공식을 깨는 것도 이 글의 한 부수적인 목표다. 한 번 살다 가는 인생인데 굳이 이것저것 두려운 것들에 둘러싸여 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다.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의 출처를 ‘무지(無知)’에서 찾는 이들이 있다. 무엇이든 몰라서 무섭고, 몰라서 화근이고, 몰라서 해악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니까 알면 모든 어려움과 불편함이 다 해소된다는 것이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특히 신유학(新儒學)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자주 하는 것 같은데 지식이 무슨 와이파이나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지식이 쌓이면 그저 ‘팡팡 터지는’ 어떤 경지가 있는 줄 아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지식의 역할에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한다. ‘아는 게 병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알아서 손해 볼 때도 적지 않다. 오히려 모르는 게 약일 때가 많다.
불편한 문제는 항상 우리의 내부로부터 발생한다. 아예 모르면 불편할 일도 없다. 따지고 보면 모든 생각은 자기중심적이고, 피해망상적이거나 과대망상적이다. 우리가 흔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을 보고 “생각이 많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듯이 아는 것, 생각하는 것 때문에 그르치는 일들이 많은 것이다. 프로이트 선생이 그 부분에 대해서 한 말씀 한 것이 있어 소개한다. ‘두려운 낯설음 Unheimliche’에 대한 재미있는 설명이다. 호프만의 소설 「모래인간」을 응용한 것이라 상당히 문학적이다.
독일어 단어 unheimlich는 분명히 ‘집과 같은(heimlich)’, ‘고향 같은(heimisch)’, ‘친밀한(vertraut)’ 같은 단어들의 반의어이다. 그래서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어떤 한 사물이 두려움을 주는 것은 그것이 알려져 있지도 ‘않았고’ 친숙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끌어내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새롭고 친숙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분명 모든 것이 다 두려움을 주지는 않는다. 새로운 것과 마주하면서 사람들이 두려운 감정과 이상하게 불안하게 하는 감정을 좀 더 쉽게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 중에는 두려움을 자아내는 것들이 있지만 새로운 것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새롭고 친숙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게 사람을 불안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다른 것’이 첨가되어야만 한다. <중략> 이상하게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그 무언가 사람들로 하여금 완전히 ‘방향을 잃게’ 하는 것이다. 종내에는 몰랐던 것이 첨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잘 식별해 낼수록(방향만 서면) 사람들은 이상하게 불안감을 주는 사물이나 사건들에서 그런 감정을 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두려운 낯설음의 감정’은 오래 되었지만 친근하고, 친근하지만 오래 된 것이 억압된 결과이다. 그것들은 늘 ‘자기 집(Das Heimische)’ 안에 있는 것들이다. 귀신이 자주 출몰하는 장소가 자기가 사는 집이나 학교, 아니면 폐가나 낡은 종교시설이라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unheimlich’는 억압 당한 ‘heimlich-heimisch’이며, 그것의 회귀도 바로 억압을 당한 그곳에서부터 이루어진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생각이다. 전혀 낯선 것들, 우리의 집 안에 있지 않은 집 밖의 것들은 큰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려운 낯설음의 기원을 억압된 친숙한 것에서 찾아낸 프로이트는 좀 더 구체적으로 두려움의 조건들을 열거한다. 생각의 전능성, 욕망의 순간적인 실현, 숨어 있는 해로운 힘들, 죽은 자들의 돌아옴 등이 그 조건의 목록들이다. 한켠으로 비켜 놓았던 옛날의 믿음들이 사실로 입증되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자마자 우리는 두려운 낯설음의 감정을 가진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결국은 “아직도 내가 네 친구로 보이니?”라는 말이 가장 무서운 말이라는 것이다.
영화 <러브레터>(이와이 슌지, 1999)는 죽은 한 남자가 살아생전의 두 연인(戀人)에게 치유의 은사(恩賜)를 내린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매개가 되는 것은 편지(러브레터)다. 그 사랑의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두 여인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명실 공히 러브레터가 된다. 한 여인은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하고 미련을 담은 편지를 죽은 연인의 옛집 주소로 편지를 보내고 그 남자의 동명이인의 첫사랑은 그 편지에 장난삼아(사실은 무의식의 호응으로 보인다) 그러나 꼼꼼하게 답장을 써서 보낸다. 이 영화는 그렇게 상처 입은 두 여인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쓰다듬어 주는 스토리를 지녔지만 한 꺼풀 벗겨서 보면 또 다른 생의 이면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죽은 한 남자가 살아 있는 두 여자에게(한 사람은 첫사랑, 한 사람은 마지막 사랑이다) 절절한(살아서는 다 하지 못한)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영화 <러브레터>는 ‘귀신이 보낸 편지’를 중심으로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총망라하고 있는 ‘사랑 이야기의 백화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먼저 ‘귀신’을 중심으로 이 영화의 스토리라인을 재구성해 보도록 하자. 귀신(남성 후지이 이츠키)은 아직도 자신을 잊지 못하고 있는 생전의 연인(와타나베 히로코)에게 오타루에 있는 자신의 분신(동명이인)이자 첫사랑인 만성 감기증 환자, 여성 후지이 이츠키에게 편지를 쓰게 한다. 귀신은 자신의 집을 찾아온 히로코에게 중학교 때 앨범을 보여주고(어머니가 대행한다) 편지가 가야할 곳의 주소를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첫사랑 후지이 이츠키의 집주소다). 그녀는 그 호의에 호응해 자신의 팔뚝에 그것을 기록한다. 그것은 영혼의 문신이다. 귀신과의 약속을 적으려면 그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 한다. 히로코가 “오겡끼데스까? 와다시와 겡끼데스”라고 편지의 서두를 장식하는 것은 이츠키가 늘 감기를 몸에 달고 사는 것을 알고 있는 귀신의 사주에 의한 것이다. 겉으로는 남성 후지이 이츠키의 안부를 묻는 말이지만 속으로는 여성 후지이 이츠키의 병든 상태(첫사랑의 상실 경험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그녀는 사랑 불능, 자기 처벌증이라는 치명적인 질병을 앓고 있다)를 염려하는 말이다. 단순한 안부 인사가 아니다. 여전히 아프고 있냐는 확인이다. 그 유명한, 순백의 설원(雪原)에서 행해지는 살아남은 자의 절규, “오겡끼데스까? 와다시와 겡끼데스!”는 그런 맥락을 다시 한 번 절절하게 확인시켜 주는 대사다(귀신에 빙의된 와타나베 히로코의 절규다). 히로코는 귀신을 대신해서 “당신이나 나나 우리 모두 아프지 않습니까”라고 절규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모든 것이 귀신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이다. 오타루에 사는 후지이 이츠키는 겉으로는 (감기가 페렴으로 도져 죽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그런 식으로 ‘연장’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첫사랑에게(그녀가 사랑을 고백하지 않아서 그렇게 떠난 것일 수도 있다. 무의식은 그렇게 생각한다) 일찍이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죄과에 대한 자기 처벌을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가 달고 사는 감기와 남자 기피증이 바로 그 징벌의 구체적인 세목이다. 그 징벌에는 정해진 형기(刑期)도 없다. 물론 둘 다 무의식의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지만, 어쨌든 그녀는 자신의 몸에서 감기 증상이 떠나는 것과 남자가 접근하는 것을 죽기보다 더 두려워한다.
히로코가 보내는 편지는 오타루의 이츠키에게 사랑(첫사랑) 이야기를 요구한다. 당신이 내 죽은 연인의 첫사랑이 아니냐고 집요하게 추궁한다. 물론 귀신이 시켜서 하는 일이다. 귀신은 순진한 히로코를 시켜 살아생전 듣지 못한 첫사랑 고백을 기어이 받아내고 싶어 한다. 오타루의 이츠키 역시 조금도 지기 싫다. 그녀의 무의식은 이번 기회에 자신의 첫사랑을 반드시 되찾겠다고 벼른다. 경쟁자(히로코)가 두 말 꺼낼 수 없도록 결정적인 첫사랑의 징표들만 골라서 편지로 보낸다. 겉으로는 “그 아이와 나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어요”라고 쓰지만, 속으로는 “이런 일도 있었어! 놀랐지?”라고 외친다. 그렇게 그녀는 항상 자신이 말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히로코와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절대 자신은 누구의 첫사랑 따위는 아니라고 강변하면서도, 죽어도 죽은 당신의 연인이 내 첫사랑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그 이면에서는 그 아이야말로 나의 불패의 첫사랑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렇게 자신의 존재 증명을 끝까지 완수해 내는 이츠키는 결국 히로코의 항복을 받아내고 만다. 히로코로부터 “나는 당신의 조잡스런 복사본에 불과했습니다”라는 자백을 기어이 받아내고 만다. 그래서 히로코는 죽은 연인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 새 사랑을 찾아 떠날 수 있게 되고, 이츠키는 귀신이 되어버린 첫사랑을 애도하면서, 그의 사랑을 물증으로 확인하면서(도서카드의 뒷면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놓은 것을 확인한다. 그것은 그녀의 첫사랑이 떠나는 날 자신에게 준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뒷면에 꽂혀 있었다), 자기 처벌의 오랜 여정에 종지부를 찍는다. 새로운 삶이, 사랑 가득한 미래가 그녀를 기다린다. 영화의 말미에, 그녀의 어머니가 딸이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이사를 포기하고 옛집에서 그냥 눌러 살기로 한다는 이야기도 의미심장하다. 첫사랑과의 마지막 상봉과 작별이 이루어진 이 거룩한 장소는 그렇게 영원히 보전되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그렇게, 죽어서도 사랑의 메신저가 되는 모양이다. 살아서 진정했던 자들은 죽어서도, 자신의 살아생전의 자취로, 산자들을 독려해,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나간다. 지금도 ‘귀신이 보내는 편지’는 여기저기서 우리를 독려한다. 여기저기서 우리의 ‘개봉(開封)’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야말로 호시탐탐(虎視耽耽), 개봉박두(開封迫頭)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도 혹시?
추신 1 : 여기서 ‘귀신의 역할’을 기호의 힘으로 보면, 기표의 창발성이 그들에게 사랑을 되돌려주는 원동력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사랑의 기표가 사랑의 기의를 불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에 목마른 히로코의 편지가(히로코는 죽은 연인의 첫사랑의 대상이 누군지 궁금하다) 이츠키의 잠든 사랑 욕구를 깨워낸 것이다(이츠키에게는 모호하게 종식된 첫사랑을 분명하게 매듭짓고 싶은 욕망이 있다).
추신 2 : 여기서 ‘귀신의 역할’을 시간의 문제로 치환하면, 기억이라는 ‘과거의 현전’을 통해 그들은 현재의 자신의 삶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그들이 주고받는 편지는 기억의 ‘발굴’에 필수적이 매장물 지표가 된다. 모든 과거는 현재의 필요에 따라 호출된다. 현재가 과거의 원인이 된다. 특히 ‘의미’가 지배하는 기억의 세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추신 3 : 여기서 ‘귀신의 역할’을 신경증으로 보면, 편지의 주인인 그녀들은 각각에 필요한 애도를 충분하게 행하지 못해(여성 후지이 이츠키는 첫사랑과의 이별과 아버지의 죽음에 관해 충분한 애도를 표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지니고 있고 와타나베 히로코는 애도의 기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새로운 연인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에 대해 죽은 연인 후지이에게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얻은 신경증으로부터, ‘러브레터’라는 자기 고백의 과정을 통해, 필요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심리적 사면의 은사를 입는다. 고백과 경청이라는 상담자와 피상담자의 역할을 고루 분담해 내면서 질병의 치유라는 은사를 입고 병자의 삶에서 벗어나게 된다.
<소설가/ 대구교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