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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04.30 01:49 수정일 : 2023.04.30 01:53
<김춘수 평전 4>
불안과 서성거림의 도시 경성
-김춘수 시인의 경성제일고보 시절(1)-
김춘수 시인의 본적은 그의 출생지이자 생가가 있는 통영이 아니라 서울이다. 김춘수의 선친 김영팔(1903-1968) 옹은 김 시인이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이하 경성제일고보로 약칭)에 입학한 이듬해인 2학년 때에 명륜동 3가에 집을 한 채 마련하여 그곳으로 본적(종로구 명륜동 3가 72번지의 6)도 옮긴 것이다. 그러한 상태가 김춘수 시인이 돌아가신 지금까지 그대로이다. 그러나 김 시인의 글 곳곳에는 그가 열네 살 봄 경성제일고보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한 경성 나들이 때부터 경성이 서먹서먹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서울을 탐사하기로 결정하고 그동안 여러 차례 상경의 계획을 세웠으나 코로나 19로 서울 나들이가 쉽지 않았는데 마침 11월 1일 제 24회 시의 날 행사가 서울 목동에서 개최 되고 필자가 한국현대시인협회를 대표하여 <포스트 코로나와 우리 시>라는 제목으로 특강 순서를 맡아 상경하게 되어 민윤기 시인과 연락하였다. 그래서 결국 그 다음날인 11월 2일 경성제일고보 시절(1935-1939김춘수 시인이 머물었던 공간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11월 1일 행사를 마친 후 마포에 있는 큰 아들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11월 2일 오전 10시 종로 민윤기 시인의 사무실로 갔다. 코로나 19 때문에 어제부터 대중교퉁을 전혀 이용하지 않고 택시로 이동하였는데 다행히 큰 아들이 승용차로 태워주어 10시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곧 도착한 조명제 시인과 같이 탐사를 시작하였다.
우선 김춘수 시인이 상경하여 하숙한 하숙집부터 찾아보기로 하였다. 김 시인은 <지금 나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가?>라는 에세이 (김춘수 신작 에세이 『하느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현대문학사,1985> P.243>)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4월에 입학식을 마치고 나는 가회동 꼭대기에 있는 그때 신개척의 주택지에 자리한 고향사람 집에 하숙을 하게 되었다. 거기서 학교까지는 한 10분 정도의 거리다. 가깝다고 거기다 하숙을 정한 것이지만, 나는 참 이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 집은 하숙을 전문으로 하는 기역자 형의 방이 세 개뿐인 자그마한 기와집이다.
이 집의 주소는 다행히 경기고등학교에 보관 되어 있는 김춘수 시인의 학적부에 가회동 33-31로 나타나 있다. 그래서 네이버 지도에 의존하여 가회동 33-31의 인근에 택시를 내렸다. 그러나 개편된 도로명 주소에 비하여 무질서한 가회동 옛날 주소를 찾자니 상당히 힘들었다. 한참 여러 골목을 헤매다가 경기고등학교 (경성제일고보의 현재 명칭)가 있던 화동과 인접한 고개마루턱에서 가회동 33-31이라는 과거주소가 병기된 북촌로 11나길 8-11이라는 문패를 달고 있는 한옥을 찾을 수 있었다. 앞에서 김 시인이 언급한 대로 북촌 한옥집들 가운데 하나로 기역자형에다 약간 개축한 흔적이 보이는 조그마한 집이었다. 그 집에서 고갯길을 따라 10분쯤 내려오면 지금은 정독도서관이 되어 있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의 뒷담이었다. 거기서 한참 돌아야 정문이 나타났다. 그 집을 보는 순간 김춘수 시인의 서울 생활의 시작이 얼마나 갑갑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 시인의 말(김춘수 자전 소설 『꽃과 여우』 p.64)대로 고향집 몸채의 우람함과 한참 떨어진 사랑채의 단아함이 감도는 생가와는 비교할 수 없이 좁은 집이었다. 게다가 큰 방이긴 하지만 김 시인의 이 첫 하숙집에서는 독방이 미쳐 생기지 않아 중년 주인아주머니와 한 방을 썼다고 한다. 다행히 오똑하니 높은 그 집은 전망이 좋아 저녁을 먹고 나면 멀리 그 당시 경성 중심가의 꽃밭처럼 불 켜진 야경이 내려다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 시인은 앞의 에세이에서 이곳에 왜 와 있는가 하는 회의를 느끼고 임시로 와 있으며 밑도 끝도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업에 지각하기도 하고 수업도 빼먹고 시립도서관(경성부립도서관은 1922년 명동<명치정>에서 개관, 1927년 소공동<장곡천정>으로 이전, 김 시인은 종로 2가로 기억하고 있음)에서 철학이나 문학에 대한 책을 읽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하숙집에서 김 시인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전문학교 다니고 있던 외사촌형(허지오<1915년 생,통영보통학교 선배>)에 의하여 근처의 외사촌 형의 친구네 집으로 하숙을 옮겨 독방을 쓰게 되어다소 편안해졌다고 회고하고 있으나(김춘수 자전소설『꽃과 여우』 p 66) 그 곳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우리 일행은 하숙집을 배경으로 사진 몇 장을 찍고 지금은 정독도서관으로 변해 있는 화동 2번지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를 찾아갔다. 1976년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겨 간 경기고등학교 자리에다 그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도서관으로 교사를 리모델링하여 1977년 1월 4일 개관한 정독도서관이 자리 잡았기 때문에 1938년 신축한 신관의 모습과 1976년까지의 경기고등학교 교정의 운동장은 비록 정원으로 조성되었지만 그 원형은 유지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독도서관은 처음에는 서울 시립으로 서울시청에서 관할하였으나 지금은 서울특별시 교육청에서 관할하고 있다. 한국 중둥교육의 요람이 정독도서관으로 변형되었기 때문에 1976년까지의 경기고등학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기고등학교는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한 1897년으로부터 3년 뒤인 1900년 10월 3일 화동 언덕에 신학제에 따른 4년제 관립 한성중학교로 설립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 중등교육기관이다. 1904년에는 1회 졸업생 20명이 배출되었다. 이 부지는 개교 당시 개화파 관료들의 거주지로 첫 본관은 김옥균의 주택지였고, 뒤에 서재필, 박제순의 집이 합쳐지면서 넓은 부지에 자리 잡게 되었다. 1906년 한성고등학교로 개편되었고 1911년 경성고등보통학교로 개칭되면서 1906년 설립한 일본인 교육기관인 경성중학교(옛 경희궁 터에 세움, 광복 후에는 서울고등학교로 개편됨)와 차별 교육을 받게 된다. 1921년에는 현재의 경복고등학교가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로 개교되면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이 변경되고 5년제가 된다. 1925년에는 경기도로 이관되면서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로, 1938년 4월 경기중학교로 교명이 변경된다. 김춘수 시인이 1935년 4월에 입학하였으니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이 교명은 김 시인의 학적부에 나타나 있다. 김 시인이 입학할 때의 본관건물은 1938년 신축한 본관 뒤의 사료관동(1927년 완공)으로 낡아 있었다. 이 건물과 1938년 신축한 본관 (현재 도서관 1,2동)과 도서관((현재 휴게실)은 등록문화재 2호로 보존되고 있었다.
1938년에는 신축 본관은 구 본관 바로 앞의 현재의 자리에 완공된다. 이 건물은 철근 콘크리트 구조에 벽돌로 쌓아올린 3층 건물로 전체적으로는 좌우 대칭 으로 전형적인 학교 건물이었고, 그 당시 스팀 난방 시설이 갖추어진 최고급 시설이었다. 김 시인은 입학 당시인 1935년 본관 건물은 낡은 목조 건물로 2층 계단을 밟으면 소리가 났다고 기억하고 있다.(김춘수 앞의 책,p64) 그러나 아마 4학년과 5학년 때에는 신관에서 공부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신관 옆에 붙어 있는 지금은 정독도서관의 휴게실로 사용하고 있는 강당에도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쪽에 서 있는 수령이 300년의 회화나무 밑에서는 누워서 고뇌에 잠기기도 했을 것이다. 김 시인은 1학년 때에는 난생 처음으로 하는 하숙생활과 서울의 낯선 도시 환경으로 지각도 하고 학교도 종종 빼먹는 학업에 부적응하는 학생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겨울 방학에 귀성하여 나는 선친으로부터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 2학년이 되자 선친께서는 명륜동 3가에 집을 한 채 마련하시고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던 동생 둘을 다 전학 시키셨다. 그때 뭣 때문인지 선친께서는 본적을 경성으로 옮기셨다. 지금도 내 본적은 그때 옮긴 그대로 서울로 돼 있다. 우리 형제들의 공부를 위하여 선친께서는 경성에 집을 마련하시고 어머님을 경성에 계시게 하셨다. 당신께서는 경성과 고향을 자주 오르내리시곤 하셨다. 고향집은 조모님이 지키고 계셨다.(김춘수 자전소설 『꽃과 여우』 P.66)
이렇게 김춘수 시인이 직접 회상하고 있는 것처럼 김 시인의 선친 김영팔 옹은 자녀 교육에 열성이었다. 정독 도서관을 나선 우리는 다시 택시를 타고 성균관대학교 근처인 김 시인의 경성 집이자 본적지인 명륜동 3가 72번지의 6을 찾아 나섰다. 택시 기사는 성균관 대학 정문 근처에다 우리를 내려 주었다. 이곳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성균관대학교 왼쪽 편에 있었는데, 우리는 오른 쪽으로 내려가 한참을 헤매다가 결국 학생을 만나 지도를 내놓고 문의하니 성균관대 정문으로 들어가다가 철문이라는 쪽문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곳으로 나가면 거리가 단축된다는 안내를 받아 한참 돌아와 성균관대 정문 들어가기 전 쪽문을 발견하고 나갔다.
그곳에서 우리 일행은 오늘 탐방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의외의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골목에 들어가 72번지 근처를 한참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길 가운데 성춘복(1936-) 시인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의 자택이자 계간 ⟪문학시대⟫를 발간하는 도서출판 <마을>(성균관로 5길 39-16)이 바로 그 근처에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김춘수 시인의 서울 옛 집을 찾고 있다고 하자 성 시인도 깜짝 놀라며 그러냐고 했다. 우선 집을 찾고 성 시인의 댁을 방문하겠다고 한 후 골목을 내려와 슈퍼 <세븐 엘레븐> 옆에 있는 붉은 벽돌의 5층의 원룸에서 명륜동 3가 72-6(성균관로5길 31)의 주소를 발견하였다. 둘러본 결과 72-6은 그렇게 넓은 부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당시로는 새로 개척한 주택가의 자그마한 기와집이며 김 시인 선친께서 직접 김 시인과 동생들의 공부를 위해서 집 한 채를 마련하였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따라서 2학년 때에는 김 시인의 집 명륜동에서 화동 경성제일고보까지 통학하게 되어 학습 분위기가 안정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김 시인의 느낌과 신변에 대한 감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회고한다.(김춘수 「지금 나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가」, 김춘수 신작에세이 『하느님의 아들 사람의아들』 p.245) 이렇게 김춘수 시인의 서울 집은 그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원룸 1층에는 ‘당기세요’ 라는 안내 표시와 함께 입주자를 구하는 <원룸 010-0000-0000>라는 흰 종이만 붙어 있었다. 그러나 멀지 않은 뒷 편이 창경궁과 창덕궁 부지이고 그 안 인근에 관덕정과 집춘문이 있었다. 앞으로는 성균관과 명륜당 그리고 대성전이 있는 비교적 조용한 주택가였다. 이 집은 이미 오래 전에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다. 김 시인의 선친은 이 집과 서울의 다른 곳에 있던 토지를 해방 직전의 혼란기에 헐값으로 처분하고 김 시인 일가는 완전히 통영의 본가로 돌아왔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역시 사진 몇 장을 찍고 성 시인의 댁에 들려 부인 우희정 수필가가 타주는 커피를 마시며 성 시인의 서명한 신간 시집을 얻고 성 시인과 담소도 나누었다. 김춘수 시인의 옛집 인근에 성춘복 시인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김 시인은 생전에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연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으로 성 시인과 우 여사에게 김 시인의 옛집 위치를 자세히 알려 주었다.
다시 우리 일행은 종로 중심가로 와서 점심을 먹고는 서울역사박물관을 찾았으나 월요일이라 개관하지 않아 자료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그래서 교보문고 광화문점으로 가서 『사진으로 보는 서울 2-일제 침략 아래서의 서울(1910-1945)』(서울역사편찬원,2015)을 주문하고 일단 서울 탐방을 끝냈다. 1980년대 정치에 관여하면서 거주한 잠원동, 그리고 만년을 보낸 명일동과 분당의 자택 탐방은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 경성제일고보 시절의 거주와 학업 그리고 생활공간의 탐사만 하기로 하고 필자는 부산으로 돌아왔다. 정말 세월은 많이 흘렀으나 80여년 전에 김춘수 시인이 존재하고 있었던 공간에서 그 때의 변하지 않은 곳과 변해버린 두 곳을 방문하였다는 점에서 뜻깊은 탐사였다.
<양왕용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