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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04.23 06:57 수정일 : 2023.04.23 07:02
<김춘수 평전 3>
유년기의 충격과 부끄러움의 근원
-김춘수 시인의 유년 시절
김춘수 시인의 집안이 통영에 정착한 것은 증조부가 전라북도 남원에서 통영으로 이거한 때부터이다. 그리고 조부 김진현(생몰연대 미상) 옹은 두 번의 상처를 거쳐 김 시인의 할머니 차신기車新己(1881.6.24.-1960.6.29) 여사와 60이 넘는 노인으로 결혼하여 김영팔(1903.9.20.-1968.6.24.)옹을 낳았다. 따라서 김영팔 옹은 김진현 옹의 세 부인에게서 본 10남매 중의 막내였다. 나이 많은 아버지 탓인지 김영팔 옹은 16세나던 1918년 12월 20일 그 보다 3세나 많은 허명하(1900-1968) 여사와 조혼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양가의 제적부를 통하여 확인된 바이다. 결혼 당시 김영팔 옹의 호적은 통영군 산양면 남평리 921번지였고 허명하 여사의 호적은 통영군 통영면 서정(현재의 동호동) 62번지였다. 두 사람은 결혼하자 말자 김영팔 옹의 처가이자 김춘수 시인의 외가 근처인 서정 61번지(현재 동호동)에 꽤 넓은 대지를 마련하여 직접 집을 지어 이사를 한다. 이러한 사실은 통영에 있는 김춘수 시인의 조카 김용일 씨가 어린 시절 할머니로부터 집짓는 목수들에게 밥을 지어 날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회고한 데서 확인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자녀는 조혼 탓인지 바로 생기지 않았고 그 첫째인 김춘수 시인이 결혼 4년만인 1922년 11월 25일 태어난다. 아마 이 때에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것 같고 김춘수 시인의 회고기에 자주 등장하는 할머니 차신기 여사는 그 당시에는 장수한 편인 1960년 80세로 동호동 61번지에서 돌아가신다. 그러나 부모들은 역시 동호동 61번지에서 장수했다고는 볼 수 없는 1968년 6월에 아버지가 66세로 그 해 12월에 어머니가 69세로 돌아가신다. 그 때가 김춘수 시인의 나이 47세인 경북대학교 교수 시절이었다.
김춘수 시인의 생가와 외가인 허명하 여사의 집은 지금은 넓은 대로의 이쪽과 저쪽이지만 그 당시는 좁은 신작로를 사이에 둔 이웃이었다. 여기서 김 춘수 시인의 외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김 시인의 외증조할아버지 허은許垠(1864-1922) 옹 역시 통영지방의 지주로 많은 자녀를 두고 있다. 제적부에 의하면 7남 2녀를 두고 있으며 허명하 여사는 장남 허성완性完(1882-1920)의 장녀였다.
그런데 이 집안은 통영에서 독립지사를 배출한 집안으로 이름 나 있다. 우선 허명하 여사의 막내 삼촌인 허장완璋完(1899-1919) 열사를 들 수 있다. 막내 삼촌이라고 해도 허명하 여사와는 1세 차이이다. 그의 공적은 『통영시지』(2018,PP525-526)에 자세히 나아 있다. 그는 서울에서 벌어진 3.1운동의 영향으로 3월 13일 1차 통영 시위를 하기 위한 사전 모의 과정에서 탄로가 나 3월 10일 체포되어 부산 감옥에서 6개월 형을 복역하다가 마산감옥으로 이감되어 복역하였다. 그러나 옥중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고문으로 1919년 10월 9일 당 21세로 사망하게 된다. 김영팔 옹과 허명하 여사가 결혼하기 불가 2개월 11일 전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 마산에서 허 열사의 시신이 객선에 실려 통영에 도착하는 날 남녀노소의 많은 주민들이 비분강개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소요를 일으키자 일경이 출두하여 진압하고자 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위세에 눌려 순조롭게 8일장을 치려 통영군 용남면 선영에 묻히게 된다. 이러한 공적으로 허 열사는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다음으로 허 열사의 형인 5남 허승완承完 (1895.9.27.-1938.6.29.) 열사가 있다. 허 열사의 활약상은 『통영시지』 608페이지에 간락하게 서술되어 있다. 허 열사의 독립운동은 주로 만주와 연해주에서 이루어졌으며 직접적인 기록은 남겨져 있지 않으나 여러 독립운동가의 ‘회상기’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허 열사는 1910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의열단의 일원이었다. 1922년부터 24년까지 고려혁명군 조직 독립대장, 결사대장, 대한신정부 혁명군 임시2중대장 등과 1923년 12월에는 중국 길림성 돈화현 황토요자에서 개최된 독립군 대표자 회의에 의열단 대표로 참석하는 등 그 활약상이 대단하였다. 그러나 그 기록이 직접 남아 있지 않아 통영시의 향토사학자들의 노력으로 재구 되어 2012년 그의 동생과 같은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이상과 같은 애국열사 집안을 김춘수 시인은 외가로 가졌다. 그의 자전소설 『꽃과 여우』(1977.민음사) 66페이지에 나오는 경성제일고보 (현재의 경기중고등학교)1학년의 입학초기 그의 하숙집을 방문하여 불편한 처지를 보고 하숙집을 옮겨준 외사촌 형은 그의 할머니 큰 오빠 허창용昌湧(1897년5월25일생)의 큰 이들 허지오祉仵 (1915년 9월 21일생, 통영보통학교15회)로 말하자면 외가의 장자장손이었는데 그는 독립운동가 집안이었기 때문에 명석한 두뇌에도 불구하고 김춘수 시인이 다닌 경성제일고보 즉, 공립학교를 갈 수 없어 보성고보를 다녔다고 한다. 그는 전문학교를 거쳐 동경제대 의학부에 다니다가 병으로 일찍 죽었다. 김춘수 시인은 이러한 외가에도 불구하고 친가는 통영 지방의 대지주이고 그의 아버지의 능력으로 재산을 증식한 3000석의 부자였으며 초등학교 시절부터 명석한 두뇌로 수석을 하였기 때문에 그의 동기생 가운데는 유일하게 경성제일고보를 다닐 수 있었다. 이러한 부잣집 큰 아들이라는 점과 독립운동가 집안의 큰 외손자라는 점이 그의 유년기의 의식형성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춘수 시인이 자신의 유년 시절에 대한 최초의 문학적 글쓰기는 시가 아닌 소설이었다. 그 자신은 그의 자전소설 『꽃과 여우』(1977,민음사) 서문에서 ‘1950년대 초 나는 「처용」이란 제목으로 100매짜리 소설 한 편을 써서 발표한 일이 있다.’ 라고 밝히고 있으나 이 작품은 사실 1963년 6월호 『現代文學』에 발표되었다. 이 때 필자는 1963년 3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필자가 보관하고 있는 이 잡지는 1963년 5월 31일 경북대 구내서점에서 구입한 것이라 적혀 있다. 이 작품은 오규원 시인이 편찬한 문장사 판 전집(1983년) 3권 <수필> 말미에 수록되어 있다.
다음으로 장시 『처용단장 處容斷章』 제1부에서 유년기의 체험이 단편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 시는 1969년 4월호 ⟪現代詩學⟫ 창간호부터 1년 남직 연재되어 로마자가 붙은 13편의 연작시이다. 이 장편 연작시는 모두 4부로 나누어져 있는 데 1부를 제외하고는 유년기의 체험이 집중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1부와 2부는 ⟪현대시학⟫에 계속적으로 연재되었다. 3,4부는 한참 지난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現代文學⟫(1991년5월호에 마침)에 연재되었다. 이 4부작 장편연작시는 1991년 10월 15일 미학사 사장 박의상 시인의 배려로 신국판 176페이지의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단행본으로 출판되면서 제1부는 <눈, 바다, 산다화山茶花 >라는 소제목이 붙여졌다. ⟪현대시학》은 전봉건(1928-1988)시인 주도로 발간되었는데 김춘수 시인은 박두진, 박목월, 박남수,구상, 전봉건 시인들과 함께 편집위원 겸 추천위원으로 참여하였다. 물론 비슷한 시기에 유년시時(1)(2)(3)이라는 단시 3편도 있다. 이 작품은 1969년 대구의 문화출판사에서 발간된 제5시집 『타령조打令調·기타其他』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 시집은 문화공보부 작가 기금으로 상재한 것이다. 이상이 김춘수 시인의 유년체험이 시적제재로 등장하는 시편들이다.
다음으로는 다시 소설 형식을 빌린 자전소설 『꽃과 여우』(1997,민음사)가 있다. 이 책은 월간 ⟪현대시⟫에 1년 동안 연재 된 것을 그대로 단행본으로 엮은 것이다. 이 책은 <꽃의 장>과 <여우의 장>으로 나누어 각각 (1)-(5)와 (1)-(11)부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 유년기 부분이 <꽃의 장> (1) 유년<(3-4>세 때의 기억, (2)유치원 시절(1926-28년), (3)보통학교 시절 (1929-1934년) 세 곳으로 나누어져 있다, (4)는 경기고보 시절과 일본대학 시절(1935-39년과,1940-43년)이고, (5) 이삭줍기가 더하여져 있다. <여우의 장>은 1950년대까지의 이야기들이다. 김춘수 시인은 <책 머리에>서 자전소설을 일단 1950년대에 그치기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마지막으로 김춘수 시인이 남긴 유일한 동화집 『통영소년』(2003년 노루궁뎅이)이 있다. 이 동화집은 2018년 『통영소년 김춘수 이야기』로 개제되어 다시 발간되었다. 이 동화집은 <귀신이 쫓아오던 날>과 <꽃님이 떠난 날> 그리고 <철조망 앞에서 눈싸움 하던 날> 등 세 이야기로 나누어져 있는데 김춘수 시인의 어린 시절 아명인 ‘수야’가 주인공이다. 이 동화집은 앞의 소설 두 군데 나오는 유년시절의 기억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세 가지 즉, 어린 시절부터 지배하고 있던 김춘수 시인의 의식 세계의 대표적인 세 가지 사건이 제재가 되고 있다. 특히 작고하기 직전 80노인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세 사건은 앞의 소설 속에서도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기 때문에 이 동화집 역시 김춘수 시인의 의식구조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웅진출판사에서 나온 『김춘수 문학앨범』(1995, 이남호 편)에 수록되어 많이 읽히고 있는 「통영 바다, 내 마음의 바다」 등과 같은 자전적 에세이 등에서도 무수히 유년 시절의 느낌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김춘수 시인은 살아생전 그의 유년시절에 대하여 다양한 장르의 문학적 글쓰기로 밝혀 놓았기 때문에 연구자나 다른 사람들이 그의 유년기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어쩌면 부질없는 일일 수도 있다.
김춘수 소년은 남망산 기슭 생가 동호동 61번지 2호에서 아름다운 동호만 해안선을 따라 여항산 기슭의 유치원도 다녔으며 세병관 인근 보통학교도 다녔다. 동호만 해안선은 항남동 근처와 미륵산 근처의 해안들이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매립공사로 변형된데 비하여 그 원형을 간직하고 있었다. 실제로 동호만 매립은 1988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때까지 통영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남망산 공원 뒤편의 김춘수 『꽃과 여우』 서두 (1)에 나오는 ‘조모님과 어머님의 손을 잡고 놀러 간 장개섬(장좌도)도 그 때까지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춘수 시인에게 바다는 무한한 시적제재로 등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장 오래된 유년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다음으로는 (2)에 나오는 호주선교사가 경영하는 미션 계통의 유치원 체험은 나중에 예수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확대되어 그 자신 크리스천은 아니나 후일 예수 시편을 쓰게 되고 우리가 모두 일다시피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나의 하나님」(제5시집 『타령조·기타』1969 수록)을 낳게 된다. 그리고 신작 에세이집 『하느님의 아들, 사람의아들』(현대문학사,1985)도 쓰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의 사건은 유치원 시절 가랑이가 터진 옷으로 등원하여 보모로부터 가랑이 터진 옷으로는 미끄럼틀을 탈 때나 놀 때에 불편하다고 기워 오르라고 하여서 기워 갔다가 오줌을 싼 부끄러움도 소설 「처용」과 자전소설집 『꽃과 여우』 그리고 동화책 『통영소년』에도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귀신이 쫓아오던 날」의 가장 중요한 기둥줄거리가 이것이다. 물론 어린 시절의 오줌싸개 에피소드는 김춘수 시인에게만 오래 각인되는 사건은 아닐 것이다. 특히 오줌싸개를 치유하기 위하여 키를 쓰고 이웃집에 소금 얻으러 가는 체험은 누구에게나 있는 체험일 수 있다. 그러나 김춘수 시인은 이러한 원초적 부끄러움에다 지나치게 가진 자, 즉 부잣집 아들로서의 부끄러움이 더하여 진다. 보통학교 운동회 때 점심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옷차림으로 머슴까지 동원하여 음식을 장만해 온 할머니에게로 끝까지 가지 않은 에피소드(『꽃과 여우』pp61-62)에서 그러한 부끄러움이 직접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부끄러움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그가 만년까지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었다고 큰 따님 김영희 여사는 한 인터뷰에서 ‘드라이브 하시다가 없는 사람이 물건을 팔고 있으면 차를 세워 물건을 사주라 하시고 집에 일하는 사람들도 식구같이 대해주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는 데서 밝혀지고 있다.(강현국 엮음 『우리 어느 둑길에서 다시 만나리』-시인 김춘수의 문학과 삶, 2019,학이사 p.227). 김용일 조카의 증언에 의하면 조상 땅 찾기 운동이 한참 전개 될 때에 막내 아드님이 우리도 찾아보자고 김 시인에게 이야기를 하니까 아들을 야단치시면서 그들 때문에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가 편하게 살았다고 일축하는 모습에서 자신이 감동을 받았다는 점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동에서 온 동생들 보는 아이에 대한 측은지심은 오히려 그 아이에 대한 언어폭력으로 나타나고 급기야 동생을 업은 채 넘어지게 만들어 아버지로부터 혼나게 된다. 이 에피소드는 소설에서는 간단히 나타나 있으나 동화에서는 「꽃님이 떠난 날」에서 한편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형상화 되어 있다. 실제로 조카 김용일 씨가 할머니에게 들은 일화로 김춘수 시인은 초등학교 시절 좋은 옷을 입혀 학교에 보내면 가정형편이 어려운 친구들과 옷을 바꿔 입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소설과 동화 속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눈오는 날 일본 초등학교 아이에게 이유 없는 폭력을 당하는 이야기와 통영보통학교 바로 이웃에 있는 일본인 소학교 학생들과의 눈싸움이 결굴 눈 속에 돌멩이를 넣어 던지는 싸움이 되고 마는 이야기이다. 마지막 동화 「철조망 앞에서 눈싸움 하던 날」이 바로 이 부분을 한 편의 동화로 완성한 작품이다. 이 부분에서는 김춘수 시인의 선친의 일본인에 대한 못마땅함도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 김춘수 시인의 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김용팔 옹은 아들을 공립학교에 진학시키지만 독립투사를 길러낸 집안의 사위였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동경 유학시절에 닥칠 김춘수 시인의 고난이 예견되기도 한다.
여기서 김춘수 시인은 왜 그 자신의 유년시절부터의 페르소나를 ‘처용’으로 했을까? 하는 의문을 던져본다. 어린 시절부터 이유 없이 당하는 폭력 그리고 자신의 의도한 바는 다르게 전개되는 소녀에 대한 언어폭력과 측은지심과는 다르게 전개되는 잘못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은 신라 향가에 등장하는 체질적 극기주의자 처용에게서 찾아야 되겠고 그렇기 때문에 그 자신이 바로 처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유년기에는 다소 불분명하게 작용하나 소년기를 거쳐 청년기 특히 일본 유학 시절의 감방체험에서는 더욱 심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유년 시절은 이렇게 지나고 드디어 일제 강점기도 말기로 달리게 되는 1935년 소년 김춘수는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하면서 조선총독부의 도시 경성으로 진입하게 된다.
<양왕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