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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의 뿌리를 찾아서 1] 금하 하규일의 가곡 전승

작성일 : 2023.04.22 11:18

[가곡의 뿌리를 찾아서 1] 금하 하규일의 가곡 전승

/제민이

 

안녕하세요. 정가 가수 제민이입니다.

저는 앞으로 몇 주 동안 가곡의 뿌리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국악의 가곡은 봄처녀 같은 근대 가곡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계시죠?

가곡은 판소리와 함께 전통 성악의 대표입니다.

가곡과 판소리의 차이는 문학에서 시와 소설과 같답니다.

가곡이 시라면, 판소리는 소설인 것입니다.

 

가곡은 양반의 노래이며, 판소리는 서민의 노래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많아요.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원래 가곡도 판소리처럼 서민도 향유하는 노래였답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 풍류방이 생겨나며

가곡에 변화가 일어났어요.

풍류방은 예술 애호가들이 관현악과 노래를 연주하던

동호회 모임입니다.

거기서 가곡이 연행되면서

가곡은 곡도 증가하고, 창법도 발전했습니다.

지금 전승되는 가곡은 풍류방에서 불리던 세련된 가곡인데요.

안타깝게도, 민중이 애창하던 가곡은 전승이 단절되었습니다.

 

가곡이 양반이나 선비의 문화라는 인식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그것은 20세기 하규일((河圭一)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금하(琴下) 하규일(1867 ~ 1937)은 서울 출생인데, 20세 무렵 가곡을 배웠습니다,

그는 중년 이후에는 관계에 진출하여

한성 재판소 판사와, 내장원(內藏院) 문교정리위원을 거쳐,

진안 군수를 지낸 양반입니다.

금하 선생은 당대의 유명 가객 박효관(朴孝寬)

제자 최수보(崔守甫)에게, 가곡을 배웠습니다.

금하 선생의 숙부는 하준곤(河俊鯤, 1863~1907), 재종(再從)은 하순일(河順一)인데,

모두 유명 가객이었답니다,

금하의 집안은 가곡의 명가인 셈이죠.

하준곤의 다른 이름은 하중곤(河仲鯤),

하순일의 다른 이름은 하청일(河淸一), 하정일(河靖一)이라고 하네요.

 

1910년 조선의 일본 병합 이후

금하 선생은 관직에서 물러나,

191110, 조선 정악 전습소의 학감으로 부임합니다.

조선 정악 전습소는 19116월 발족하는데,

이는 1909년에 창설된 조양 구락부가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조선정악전습소는 조선 기악과 성악뿐 아니라

서양 기악, 성악, 그리고 음악학도 가르치는, 종합 음악 학교였지요.

금하의 재종인 하순일(河順一)은 거기서 가곡 남녀창을 교수하였습니다.

1912년경 다동에 조선 정악 전습소의 여악 분교가 설립되었는데요,

거기서 금하는 기생들에게 가곡을 가르쳤답니다.

이때의 제자 중 유명한 사람은 평양 출신 기생 이난향(李蘭香)인데요.

이난향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소개할 것입니다.

 

1926년 우리 가곡계에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금하 선생이 이왕직 아악부의 촉탁으로 임명된 것이지요.

금하 선생은 아악생과 아악부의 직원에게

1937년 사망할 때 까지 가곡을 가르쳤답니다.

금하 선생이 아악부에 초빙된 배경을, 함화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장악원은 원래 음악과 무용만을 교수하였을뿐이오, 가요는 악장(樂章) 이외에는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궁중에서 가요(歌謠)가 필요할 때에는 민간의 가객(歌客)을 초청하였던 것이다. 이 때는 궁중에서 가요가 그렇게 필요치는 않았다. 그러나 근 천 여년 간 전통적 고전 가요가 폐지된 것은 너무나도 유감된 일이다. 이때 민간에서도 시대사조(時代思潮)에 따라 이것을 연구하는 이가 전연 없고 선생 층으로는 다만 금하 하규일 씨 한 사람이 남아있을 뿐이요. 그래서 하규일씨는 이왕직 촉탁에 임명되어 고전가요를 교수하게 되어 아악생뿐 아니라 전 직원에게까지 가곡, 가사, 시조를 가르쳤소.”

 

조선 정악전습소 다동 여악분교는

다동 조합(茶洞 組合), 대정권번(大正券番), 조선 권번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조합과 권번은 기생을 교육하고 관리하는 조직인데요.

금하 선생은 사망할 때 까지 여기서 가곡을 가르쳤습니다.

교육생은 기생이지요.

그들은 나이가 들어 기업(妓業)을 그만두거나, 결혼을 하여

가곡을 계속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이왕직 아악부에서 금하에게 가곡 교육을 받은 사람은,

전문적으로 음악을 공부하는 남자였습니다.

이들은 음악 활동을 평생 직업으로 삼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금하의 가곡은

그들을 통하여 오늘날까지 전승하여 올 수 있었답니다.

가곡이라는 전통 가악(歌樂)이 절멸을 면한 건,

이왕직 아악부가 금하 선생을 가곡 교사로 초청한 덕택입니다.

금하 선생은 1926년부터 1937년 사망할 때 까지 12년간

매일 아악부에 와서,

아악부원 양성소 학생에게 하루 2-3시간씩 강의를 하였습니다.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1891~ 1968)는 시조 시인으로 유명합니다.

가람은 1922년부터 서울의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그 시절 일기에 금하의 이왕직 아악부 수업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학교에 갔다. 직원회는 언제 하는지 바둑알만 두고 있다. 그저 왔다가 아무 말도 없이 돌아가는 이도 있다. 나는 아악소(雅樂所)에 가서 하규일(河圭一)씨의 시조(時調) 교수(敎授)를 보았다. 앞 목소리니 뒷 목소리니 하며 대조(大調)로 내는 소리. 다만 오늘날 자기나 부르고 자기나 알 소리. 과연 어렵다 아니하지 못할 것이다. 아악 연습하는 청년들은 장단 점수(長短 點數)를 맞추느라고 두 손을 들었다 내렸다 하며 선생에게 하기 어렵다는 말만 한다. 그러나 하나하나씩만이라도 오래오래 끊이지 말고 전해 갔으면 좋을 것이다. 조선 음악으로는 오랜 것, 높은 것이다...(1927. 8.25)

 

금하 선생이 평생 길러낸 남창 여창 제자는 많아요.

남창의 경우, 아악부의 직원은 제쳐 놓더라도

아악부 양성소 학생은 60여명, 여창의 경우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뒤를 이을 제자는 얼마 되지 않아요.

여창의 경우, 이 난향, 주산월, 김수정,

남창의 경우 이병성(1909-1960)과 이주환((1909 ~ 1972)이 탁월한 제자랍니다.

 

두봉(斗峯) 이병성 (李炳星)

19229월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 2기생 후기로 입소하였는데,

전공은 피리입니다.

두봉 선생은 19263월 양성소를 졸업하고,

아악부의 아악수(雅樂手), 아악수장(雅樂手長). 아악사(雅樂師)를 역임하였습니다.

1926년 금하 선생이 아악부에서 가곡을 가르칠 때,

첫 제자는 이미 졸업한 1기와 2기생을 모은 합동반이었습니다.

장남 동규(東圭)4남 정규(正圭)

아버지 이병성의 뒤를 이어 가객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소남(韶南) 이주환(李珠煥)

1926년 아악부 양성소 3기생으로 입소하였고,

전공은 피리입니다.

소남은 1931년 양성소를 졸업하고

아악부 아악수(雅樂手)에 임명되어,

아악수장(雅樂手長), 아악사(雅樂師)로 승진하였습니다.

1951년 국립국악원이 개원하자, 소남 선생은 초대 원장에 임명되었는데요.

현재 가곡을 부르거나 가르치는 사람들은 모두

소남 선생의 제자이거나, 그 제자의 제자랍니다.

두봉 선생은 너무 일찍 사망하여

제자를 제대로 기르지 못하였습니다.

장남 동규도 부친이 1960년 사망하여

1961년부터 이주환에게 본격적 교육을 받았습니다.

동규는 2022, 국가 무형 문화재 가곡 보유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금하는 19세기 조선의 풍류방 가곡을 계승하였습니다.

전통 가곡계는 모두 금하 하규일의 제자이니,

현재는 풍류방 가곡만이 남게 된 겁니다.

그러나 풍류방 가곡이 가곡의 유일한 형태는 아닙니다.

17세기에는 경북 영덕의 농민,

18세기에는 서울의 상민(常民)과 전남 장흥의 농민도 가곡을 즐겨 불렀답니다.

가곡에는 민중 가곡 유파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 외에 기생의 가곡, 광대의 가곡도 있었답니다.

여러 개의 가곡 유파 중, 지금 전승된 것은 풍류방 가곡 유파뿐이랍니다.

아쉽게도 나머지는 모두 전승이 단절되었습니다.

 

오늘은 가곡의 여러 유파 중,

금하 하규일의 가곡 전승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19세기 풍류방 가곡에 대해 토론하려고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제민이의 정가세계입니다.

 

<가곡가수, 전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