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인문학 수프
작성일 : 2023.04.22 11:14
48. 근심이 있어야 인간이지, 고군분투(孤軍奮鬪)
근심은 왜 있는 걸까요? 근심 없는 삶을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 용맹정진(勇猛精進)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교회나 성당에도 열심히 나가고 집안에 불상을 모셔놓기도 합니다. 저 같으면 집안 구석구석 도처에 칼입니다(연구실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을 돌아가며 한 번씩 만지면 세상 근심을 좀 잊을 수 있습니다. 그 ‘만지는 느낌’도 다 달라서 그대그때 ‘느낌적 느낌’으로 감응하는 것을 골라서 휘두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제 근심 걱정을 다 자르고 베어버릴 것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몸과 마음의 관심을 분산시켜 보자는 생각 정도만 합니다. 사람살이의 근심 걱정을 떼어 놓고 진정 마음 편안히 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운명일 것입니다. 프로이트나 융이 “콤플렉스 없는 정신 운동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결국은 그 비슷한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오죽하면 그리스 신화에 ‘근심의 신 쿠라 이야기’라는 게 있겠습니까? 쿠라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날 근심의 신 쿠라가 흙을 가지고 놀다가 묘하게 생긴 것 하나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제법 완벽하고 멋져서 제우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자기 작품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제우스도 선선히 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신들 사이에서 이 작품의 소유권 문제가 발생한 거지요. 재료를 제공한 흙의 신 호무스가 먼저 시비를 겁니다. 흙으로 만들었으니까 당연히 자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제우스도 내심 욕심을 냅니다. 살아 움직이도록 영혼(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자기니까요. 그래서 결국 심판의 신 사튀르에게 판결을 요청하게 됩니다. 사튀르의 판결은 간단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은 만든 자 쿠라의 것이고 죽은 다음에는 영혼은 제우스의 것, 몸은 호무스의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은 그 누구도 근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라는 말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젊은이들에게 자주 권고되는 생활의 지혜(?)와도 상통하는 어조를 띤 이야기입니다. 근심을 없애겠다는 쓸데없는 근심거리를 우정 만들지 말고 차라리 근심과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 해 보라는 교훈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식으로 보자면 인간이 지은 모든 ‘지혜의 서(書)는 근심의 소산입니다. 세상살이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라는 평을 듣는 주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근심거리가 있어서 역을 지은 것이다. 세상이 쇠해지면 잃고 얻음이 더욱 분명해지니 효사의 말은 득실을 밝히는 것이므로 쇠한 세상의 뜻을 아는 것이다. 계(稽)는 살핀다는 뜻이다. (有憂患以後作易. 世衰則失得彌彰, 爻繇之辭 所以明失得 故知世衰之意邪. 稽 猶考也.) [왕필(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560쪽]
‘세상이 쇠해지면 잃고 얻음이 더욱 분명해지니 효사의 말은 득실을 밝히는 것이므로 쇠한 세상의 뜻을 아는 것이다’라는 말은 “네 근심의 근원을 아는 게 중요하다”라는 가르침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효사(爻辭)는 변화의 기미를 밝혀서 득실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득실’을 밝혀 ‘세상의 뜻’을 알게 되면 근심을 덜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리스 신화의 ‘쿠라 이야기’나 주역의 ‘쇠한 세상의 뜻’이나 모두 ‘근심거리가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필요한 이야기들입니다. 우리가 만약 ‘쇠한 세상’에서 발을 빼낼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근심거리만 끊을 수 있다면, 그런 지혜의 서들은 진시황이 저질렀다는 분서(焚書) 목록에 들어가도 하등 이상할 일이 없는 것들입니다. 세상의 경(經)들은 하나같이 ‘근심 끊기’를 권합니다. 대개는 그것을 핵심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만큼 근심은 인생의 힘든 짐이라는 것이겠죠?
사족 한 마디 붙이겠습니다. 무도(武道)에는 단(段, 품계나 호칭)이 있습니다. 검도회 규정을 보면 ‘단(段)은 초단에서 10단까지로 하며, 급(級)은 9급에서 1급까지로 한다. 다만, 소년을 위한 별도의 규정을 둘 수 있다’로 되어 있습니다만, 실제로 검도계에서는 9단, 10단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주고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근자에 들어서는 아예 9단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모두 사양합니다. 이심전심, 모두 겸손히(?) 승단하기 어렵기로 유명한 8단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8단으로 머물기를 원한다는 것은 겸양지덕(謙讓之德)도 겸양지덕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8단’이라는 단이 9단이나 10단보다 더 ‘있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승단 관문이 8단에서 가장 지고지난(至高至難)의 경지를 보이고, 늙고 쇠한 다음에 받는 그 위의 단은 거의 명예단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8단만 해도 대단한데(특히 검도가 더 그렇습니다) 굳이 그 위에 한두 단을 더해 봤자 오히려 권위나 명예에 누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역 계사전이 그런 인간사를 놓칠 리가 없습니다. 지족안분(知足安分)의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군자가 자신의 몸을 편안히 한 뒤에야 움직이며 자신의 마음을 평안하게 한 뒤에야 말하며 그 사귐을 정한 뒤에야 구하나니, 군자가 이 세 가지를 닦으므로 온전하게 되나니, 위태롭게 움직이면 곧 백성이 더불지 아니하고 두려워하면서 말하면 백성이 응하지 아니하고 사귐이 없이 구하면 백성이 함께 하지 아니하고, 함께 하지 아니하면 곧 해치는 자가 이르나니(莫之與則傷之者至矣), 역에 말하기를 더하지 말라(易曰莫益之), 혹 치리니 마음을 가짐이 항상 일정하지 못하리니 흉하다하니라. [왕필(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558쪽]
마음을 일정하게 가지는 것이 중요하니 필요 없는 것을 ‘더하지 말라’고 주역은 권합니다. 젊어서 선거에 출마한 적이 있었습니다. 연이은 실패를 맛봐야했습니다. 근심 속에서, 위태롭게 움직이면서, 스스로도 두려워하고, ‘사귐’도 없이 아무나에게 표를 구걸하러 다녔습니다. 당연히 함께 하는 이들이 적었고 함께 하지 않는 이들로부터의 냉대도 심했습니다. 받은 상처가 많았습니다. ‘더하지 말 것’을 몰랐던 스스로를 자책하지 못하고 스스로만 옳다고 생각했던 것과 ‘나가 보라’고 말로만 권한 사람들을 가까이 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한동안 쿠라의 백성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무도(武道)에 입문해서 한 단 한 단 단을 높여오면서도 그런 ‘쿠라의 백성’이 되는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어느 수준부터는 단이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필요 없이 더한다’는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지나치고 쓸데없는 감정노동에 혹사당한다는 반성도 들었습니다. 근심을 덜기 위해서 시작한 것이 오히려 근심거리로 전락한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마음을 정반대로 바꿔먹기로 했습니다. 쓸데없이 아등바등 단을 높여서 “몇 단이나 되면서 저 정도밖에 못하나?”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는 그런 근심거리를 아예 벗어던지고, 그저 ‘몸을 편안히 해서’, 열심히 수련하기로 했습니다. 혹시라도 “몇 단밖에 안 되면서 저렇게 잘 하나?”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그쪽이 훨씬 득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굳히고 나니 오히려 수련이 훨씬 더 재미있어지고, 제 생각이지만, 기량도 전보다는 더 빠르게 향상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덕분인지 시간은 좀 걸렸지만 제게 과분한 단까지 올라갈 수도 있었고, 어디 가서도 “(나이에 비해) 제법 하는구만~”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근심을 줄이려고 또 다른 근심을 만드는 일과는 담을 쌓아야 합니다. 저 역시 그 점에서 자성(自省)을 게을리 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글쓰기도 그렇고 운동도 그렇고 페이스북 활동도 그렇습니다. 혹시 제 포스팅이 다소 유치해 보일 때가 있더라도 다 그 차원에서 하는 짓이니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소설가/ 대구교대명예교수>
49. 훔친 자가 도망쳐서 돌아오지 못한다, 부상기불(婦喪其茀)
/양선규
책 읽기의 양태는 크게 둘로 나뉩니다. 목적 있는 책 읽기와 목적 없는 책 읽기가 그것입니다. 크게 보면 다 나름의 ‘목적’이 있겠습니다만 가시적인 목적만 ‘목적’으로 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책 읽기의 비가시적인 목적 중의 하나가 이른바 ‘대행자(代行者) 찾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 대신 싸워줄 자, 나 대신 참아줄 자, 나 대신 성공할 자, 나 대신 변신할 자, 나 대신 사랑할 자, 나 대신 공부(노력)할 자를 찾는 일이 책 읽기의 주 목적(자신도 모르는)일 때가 많습니다. 쉬운 말로 대리만족 찾기의 일환이라는 겁니다. 대리만족은 모든 책 읽기의 공통분모입니다. 독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책 속에서 대리만족을 찾습니다. 자기 환상을 책 속에서 찾거나 완성합니다. 그 점에서는 작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쓰기 안에서 그 비슷한 목적을 추구합니다. 우리가 ‘생활의 달인’을 즐겨 보는 것도 그 비슷한 이치일 것입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기술을 영상 속에서 보는 것에 즐거움을 느낍니다. ‘보는 것으로 소유한다’라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소유관계를 그렇게 확인합니다. 그래서일 것입니다. 몸 공부 쪽에서는 가급적이면 책이나 영상을 멀리하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제가 검도를 처음 배울 때 그렇게 배웠습니다). 몸이 채 따라가기도 전에 마음이 ‘만족’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책 읽기를 본격적인 행동으로 나서기 위한 전초전으로 삼는 이들도 많습니다. 기술이나 기능을 익히기 위한 지침서들의 독자들 중에는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제가 쓴 글쓰기 책들은 주로 그런 분들을 위한 것들입니다). 그들은 책 읽기가 선사하는 ‘대행’의 즐거움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행동으로 투신(投身)하는 것을 즐깁니다. 환상의 대리만족보다는 고통스럽게 쟁취하는 경험의 중요성을 중히 여깁니다. 그런 분들은 나중에 자기만의 경험담을 책으로 펴내기도 합니다.
그렇게 책 읽기의 유전자는 대행과 실행(實行)을 오고가며 대대로 전승됩니다. 허위전환을 부추기는 출판사들, 서점들, 미디어들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그들이 유지하려고 애쓰는 ‘대행자 찾기 책읽기 시장’을 무시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것들 없이는 ‘진짜 책 읽기’, ‘볼만한 책의 진짜 저자’들도 탄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개천이 없으면 ‘개천에 용 날 일’도 없습니다. 깊은 물만 물인 것은 아닙니다. 온갖 물이 있어야 사람 사는 세상입니다. 비단 책 읽기 시장만 그런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인생사 모든 것이 그런 ‘가짜/진짜’의 변증법 안에 있습니다. 아마 정치가 그런 ‘가짜/진짜’의 변증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장’일 것입니다. 순진한 시민들은 부패한 정치인들을 보고 “왜 저런 자가 승승장구하는가?”라고 정치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런 ‘책’이 없으면 시장 자체가 무너집니다. 그들이 있어야 진짜 ‘책’을 고를 수 있는 기준이 생깁니다. “저런 자가 대중의 사랑을 받다니...(어이가 없네)”가 없으면 정치판 자체가 생성되지 않습니다.
진짜 독자만 찾아 헤매다 지쳐 쓰러지는 '순진한 책'들만 있어서는 독서 시장(인간 세상, 정치판)이 유지되기 힘듭니다. 옳은 일만 하는 실패자들만 있어서는 판 자체가 존립할 수 없습니다. 차 떼고 포 떼고, 이것저것 다 가려내서는 장기판을 유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책 읽기에서 ‘대행자를 구하는 심리’를 무시하고 독자들에게 오직 ‘뼈를 깎는 실행’만 요구하는 책들로 서가가 가득 차 있다면 그 누구도 서점으로 향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짜가 있어야 진짜가 설 자리도 있는 법입니다. 문득, “중요한 것을 잃은 자라도 실행에 몰두하고 처신에 적중(的中)하면 굳이 도적을 쫒지 않아도 잃은 것을 다시 찾을 수 있는 때가 온다.”라는 주역의 한 구절이 눈에 띕니다. ‘옳은 일을 도모하는 꾸준한 실패’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육이는 지어미가 머리 장식을 잃음이니, 쫓지 않아도 이레 만에 얻으리라. (六二 婦喪其茀 勿逐七日得)
* 중정(中正)으로 아주 문명한 데에 처하여 오효(五爻)에 응하니, 음중에서 빛나고 성대한 것이다. 그러나 초효(初爻)와 삼효(三爻) 사이에 거했으나 서로 가깝되 어울리지 아니하여, 위로는 삼효를 받들어 이지 않고 아래로는 초효와 가까이 하지 않는다. 저 성대한 음이 두 양 사이에서 가까우나 어울리지 않으니 침범당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상기불(喪其茀)’이라 하였다. 지어미라 칭한 것은 스스로 지아비가 있으나 타인이 침탈했음을 밝힌 것이다. 불(茀)은 머리장식이다. 중도로 곧고 바른 덕을 가졌으니, 침탈당한 부인을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게 된다. 기제(旣濟)의 때는 사도(邪道)를 용서하지 않는다. 때가 이미 밝고 준엄하고 또 많은 사람이 도와주니 훔친 자가 도망쳐서 돌아오지 못한다. 이 형세를 헤아려보면 이레가 지나지 아니하여 자기가 쫓지 않아도 스스로 얻게 된다. [왕필(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473~474쪽]
주역 63. 기제괘(旣濟卦) 육이(六二)의 효사입니다. 기제는 모든 ‘일이 이미 처리되어 끝남’을 의미합니다. 끝난 일은 달리 어떻게 뒤집어 볼 수가 없으므로 때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뒤집을 수 없는 때가 도래했음에도 옛날의 도적질을 일삼는 자들에게는 준엄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는 대목입니다. 주역은 인간사를 마치 자연계의 현상인 양 설명합니다. 저에게는 주역 읽기가 ‘속된 대행자 찾기’입니다. 실행의 교과서가 아닙니다. 다만 저를 돌아다보는 한 계기는 충분히 됩니다. 그 안에서 때로는 감탄을 자아내기도 하고 계시 비슷한 것을 안기기도 합니다. “너의 실패는 이미 정해진 일이었으니 너무 애달파 하지 말지니라.”, 그 말씀을 듣고 쓸데없는 자괴감 하나를 덜어냅니다.
<소설가/ 대구교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