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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등대원의 희노애락

<일제시대 조선 근무 등대원들의 이야기> 2. 종전 후의 원산 회고록 – 여도 등대장 아라키 부인의 비극

작성일 : 2026.05.04 12:42

 

 

2: 종전 후의 원산 회고록 여도 등대장 아라키 부인의 비극

 

전 원산 부두국 해사과 항로표지 정비원 간수 히라이 현일(196111)

 

1945815일 전쟁의 종결이 보도되어 일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긴장의 끈이 탁하고 잘려져서 직장도 회사 내에도 흥분의 도가니 같았다. 나는 다음날 16일 해사과에 전화하여 이후 우리들이 행동해야 할 지시를 들었다.

 

그것에 의하면 조선 신정부에 자입, 기계류 등 일체를 인도할 것, 각 직원은 스스로 가능한 빨리 일본으로 건너올 것. 서류는 전부 소각할 것. 세가지였다.

 

그리고 전화 응답이 누구였는지 불명인 상태로 전화 연락은 그날 그 시간을 끝으로 끊어져 버렸다. 그러나 해사과(원산 부두국 해사과)와 여도 등대와의 호출 응답 시간이 매일 2시였다고 생각되는데 16일 오후 2시 무선전화에 의한 응답이 있었고 담당자는 등대장 아라키씨였다. 나는 다시 한번 해무과의 지시를 전달하였고 빠른 기일에 원산에 나올 준비를 하고 있을 것과 표지선 두성호로 마중 나갈 터니 여도 등대 철수 예정일을 알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아라키 등대장이 말하기를 어젯밤에 정무총감의 라디오 방송을 듣고서 나는 일본인답게 최후를 보고 철수하고 싶다. 가볍게 등대를 방치하는 일은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다음날 17일 최후의 무선 연락이 되었는데, 그래도 아라키씨의 마음을 바꾸는 일이 불가능하였다. 한편, 원산 시내는 조선 항만 노동자에 의해 빠르게도 새로운 정치의 기운을 싹 피우고 있었고 일본인 부녀자에 대한 피해가 보고되었다.

 

아라키씨의 부인은 원산 고등 여학교 2학년의 루미 양을 필두로 3명의 어린이를 데리고 원산 시내에 별거 중이었다. 남편 아라키의 심경을 알려주자 그러면 제가 남편에게 가서 데리고 오고 싶다고 하였다. 두성호의 출발을 알려주며 나도 부인이 아라키씨를 설득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20일경으로 생각되지만 일본인 선장 간기씨에게 항해를 부탁할 수도 없는 처지였으므로 우리 일본인이 철수 후 관리 책임자로 선출될 것이 당연시되는 조선인 승조원에게 출항을 부탁하여 항해에 보순 양천, 기관장에 김씨, 갑판원 장씨, 기관원 금산씨 등 4명의 승조원으로 하여 아라키와 그 어린이들을 승객으로 하여 원산 세관 가교를 840분경에 출항시켰다.

 

이러한 수배를 끝내고 나는 철수 정보를 얻기 위하여 원산 철도사무소장

엄전씨와 원산역장에 상담하러 가던 중 두 사람이 조선인에게 둘러쌓여 있는 것을 보고 일본인 관리의 위험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철도의 곤란한 상황을 보았기 때문에 해사 관계 일도 안심할 수가 없어서 빨리 서류를 처치하였다.

 

원산 부두의 가교에 눈을 돌리니 그곳에 벌써 소련군이 주둔하여 있었고 청사 부근 두세 곳에 소련군이 포진하여 있었다. 나는 일본 군인, 일본 대사관 직원들을 잡아들이기 위하여 요소요소에 쳐 놓은 그물에 뛰어들고 말았다.

 

트럭에 실려 가면서 총살을시키지 않을까 걱정하였고 지금 끌려가면 끝이라 생각했다.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나는 돌연 발작을 일으킨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때로는 하늘을 쳐다보기도 하고 때로는 땅에 엎드리기도 하면서 몽유병자처럼 무기력하게 총구 부근을 힘없이 걸어갔다. 마침내 소련 병사도 이 사람을 총살하는 것도 트럭에 싣고 가는 것도, 쓸모없는 일이라 생각했는지 나를 내버려두고 떠났다. 이후 내가 정신을 차려보니 원산 춘일정의 퇴식소에 돌아와 있었다.

 

한편, 아침에 출항한 두성호는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의 불안은 점점 증가하였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다음 날 선원 관계일로 보고 하러 온 사람에 의하면 두성호가 원산항을 출항 후 약 30분 후 소련 군함에 의해 정선, 무장한 소련군이 승선 조사를 하며, 원산의 부대와 연락을 하던 중 갑판에 있던 아라키씨의 부인은 소련군의 모습을 보고 바다로 투신을 하였다는 것이다.(이 소련군 병사는 이름이 미사라고하며, 어머니는 일본인으로 요코하마에 살고 있다고 한다.)

 

부인은 소련군의 능욕을 모면하려고 한 행동이었으니 소련군은 부인이 무엇인가를 소련군에 조사를 당하면 않되는 것을 숨기고 있어서 도망간 것으로 오해하고 부인을 향해 사격을 가해서 명중시키고 말았다. 이리하여 이라키씨의 비극이 발생하고 말았다.(이라키씨에 대해서는 후술하는데 남은 가족들을 데리고 러시아로 귀환 함)

 

이 비극이 있었던 다음날 소총으로 무장한 세명의 해병대 군인에 의해 내가 소련함정에 끌려갔다. 군함에서 취조 후 원산항의 항로표지를 점등시킬 것을 명령받고 석방되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직 잠자리에 있을 시간에 승용차로 소련군 장교가 조선인 통역을 데리고 와서 신원조사를 다시 하기 시작했고 승용차에 태워져 본부에 연행 당하게 되었다. 당시 아홉 살의 장남, 일곱 살의 장녀, 한 살의 차녀는 끌려가는 부친의 모습으로 자동차 옆에서 불안과 공포의 이별을 하였다. 이 연행으로 내가 일본으로 돌아오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인생이란 정말로 재미난 것이다.

 

여기서 다른 방면으로 이야기를 돌려보고자 한다. 회원 여러분에게 친근함이 깊었던 나가타 분이찌씨 기억이 난다. 나가타씨는 정수부인, 판구부인가 함께 종전 전부터 만주에서 철수하던 도중 원산에서 멈추워 퇴식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임혜장 한 방을 피난 장소로 정하고 있었다. 그밖에 갈마각 등대장 오가와 송수씨 일가 및 보원 협옥씨는 아라키씨 일가와 더불어 빈실이라고 하는 등대용 사인의 별실을 피난 장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오가오씨의 두 아이는 종전 후 사망하였으며, 우리 등대인 전원이 화장장까지 함께하여 장례식을 치렀다.

 

또한 야마다 삼부씨에게는 성진 등대 등대장 마쯔야마 용이씨 부인, 어머니, 아이 둘이 있었다. 그런데 전술한 바와 같이 퇴식소에 자동소총을 가진 소련군이 조사를 나왔으며, 시내는 부녀자의 폭행이 있었다. 야마다씨는 위험을 피하기위해 재빠르게 임해장으로 피난하였고 원산 시내도 점점 위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인의 상황이 급박하게 되자 나가타 분지씨가 마음의 피로로 인하여 쓰러져서 돌연 사망하고 말았다. 그 커다란 몸이 고목이 넘어지듯 아무 고통 없이 쓰러져 사망한 것은 나가타씨가 생전에 쌓은 공덕에 의한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문수씨라고 하는 목수에게 부탁하여 관을 만들고 여기에 유체를 안치하여 자동차로 사분에 있는 화장장에 보내어 각지의 등대 출신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을 거행하였으며, 당시 일본인으로서는 어느 정도 지하에서 기쁘해 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고, 겨울이었다. 일본인의 대부분은 일본으로 철수하였고 등대 관계자는 무엇인가 소식도 없이 한 사람 두 사람 돌아가서 마치 불을 끈 것 같은 상황이 되었다.

 

동거 중인 마쯔야마 부인 연자씨(남편 용이씨는 성진 등대에서 총살당함), 어머니, 딸 아들 모군은 일본인이 점점 줄어드는 광경을 쓸쓸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모군이 열병에 걸려서 경련을 하기 시작했다. 의사를 불렀고, 특히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간병을 하였으나 점점 악화되어 원산 육군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그러나 모군도 수일간을 앓다가 마침내 저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목수 문수씨에게 관 제작을 부탁하자 마지못해 만들어 준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 자전거를 고쳐서 쓰고 있었기에 내가 관을 실고 가서 마쯔야마 부인과 같이 시체를 관에 넣고 그것을 등에 짊어지고 화장장까지 옮겼는데 정말로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일본인 대부분이 철수한 시내를 걷는 쓸쓸한 마음은 정말 형용할 수 없다. 그 후 슬픔에 젖어 있던 마쯔야마 부인 일가도 주문진을 경유하여 철수하였고 원산에 있어서 항로표지인은 여도 등대의 아라키씨와 나 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소련군과 함께 원산항 부근의 항로표지 점검 작업을 하든중, 여도 등대에 상륙하여 아라키씨와 8개월 만에 만났다. 루미양과 그 동생들도 만났으나 극단적으로 말하면 일본계 러시아인이라고 말하여도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면 아라키씨는 일본으로 철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환경의 변화에 마음으로부터 동요하고 있던 차에 선원으로 고용되어 일하고 있던 신정씨(조선인)가 사망하여 장례식에 와 줄 수 없겠냐고 늙은 부모에게 특별히 부탁이 있었다.

 

이 신정씨라는 사람은 성실한 사람이였기에 종전 직후 38도선을 넘어서 용산에 있는 본부 해사과에 정보를 가지러 간 일도 있는 사람이었다. 해무과에서는 수원단 등대, 여도 등대 직원의 8월분 급료를 그에게 부탁하였다. 그는 양말에 급료를 넣고 국경을 넘어오던 중 발각되어 대부분을 몰수당하였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병으로 발전하여 1946년 봄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 사람은 내가 하시모토 수웅씨와 교대하던 시기에 고용된 충실한 사람이었다. 나는 산 위의 묘지에서 조선인과 같이 묘를 파면서 편안히 잠들기를 기원했다. 노부는 자신은 나이가 들도록 러시아인, 일본인과 시정을 접하였는데 일본인이 좋다고 말하였다.

 

이야기를 원래로 돌려서 종전 후 일주일 정도 후에 원산역에 철도의 수송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갔던 때에 정차 중인 열차 안에 있던 천본씨, 판정 가족을 만났다. 나는 하차하여 원산에 피난하기를 강하게 권유하였으나 그들 일행은 경성에 빨리 가기를 원하고 있어서 나는 권유하기를 그만두었으며, 그 기차는 경성행을 변경하여 함흥에 다시 돌아가 버렸는데 천본씨 부부, 판정씨 모두 장티부스에 감염되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나는 소련군 부대장에게 일본 귀국 묵인을 부탁하였다. 부대장도 드디어 그것을 승낙하여 사탕, 빵 등의 식료품과 더불어 50엔의 전별금을 주었다. 전별금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하였으나, 이 돈은 당신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마린케 (아이)에게 주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힘든 시기에 사고로 귀국이 불가능하게 된 것에 보상이려니 생각했다.

 

원산 부두국 창고(철도 창고)에는 등유 100드럼 정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연료는 빨리 조선의 시정자에 넘겨주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다. 열쇄는 끝내 소련군에 몰수당하고 말았다. 소련군에 징용된 약 50톤의 신조 표지선 두성호도 원산항 내에서 좌초되어 침몰하였다. 시계 등의 퇴식소 비품은 두성호 선원에게 개인적으로 인도되었기에 원산에는 기억에 남는 물건이 하나도 없다.

 

종전 직후 일본인 관사 직원 중 혹자는 변소 청소시킴을 당하기도 하는 등 피곤한 모양이었다. 해사과에는 선원으로 고용되어 있던 이등씨(조선인)라는 사람이 상당히 심한 일을 저지른 적이 있었다. 나는 해사과 작원의 미지급 급료 내에서 전원의 가족수당을 지급하라는 것으로하여 용서해 주었다.

이로인해 두성호 선원이 나에게 도움을 주었고 내게 필요한 정보를 알려주어 위험을 사전에 알고 그것을 피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한펀, 드디어 원산 출발을 528일로 결정하여 두었는데 그것을 안 두성호 기관장 김씨, 기관원 금산씨, 갑판원 장씨(갑판장 양천씨는 인천에 탈출하여 있었다.)등 매일 밤 송별회를 열어주어 마음에서부터 이별을 슬퍼해 준 일을 평생 잊어버리는 것이 불가능 하였다.

 

원산 항로표지원 관사 근처에 해원 양성소가 있어서 그곳에 소련군 병사 약 3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나의 부인은 재봉틀을 가지고 있었기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나 본부 병사들의 군복을 수선하기도 하고 새롭게 만들어 주는 등 반년 이상 전력을 다해 봉사하였기에 병사들과 깊은 정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이 일본으로 가려는 것을 알고 병사들은 다모이토 키요우(병사들은 일본에 돌아간다는 말을 이렇게 하였다.) ’하로서라고 말하며, 모여들기도 하였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도스이다니야(안녕)‘라고 악수하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이런 국경을 넘은 우정에 흘린 눈물도 지금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하여 우리 가족은 신가의 부대로서 원산역을 출발하였다. 역에는 두성호 선원 전원이 공산당들에 둘려 쌓인 채 환송하러 나와 주었고 떡과 염소젖을 아이들에게 주는 온화한 마음씨에 몇 시간이 지나도 잊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5일 후 용산에 도착하여 해사과를 방문하여 보니 넓은 사무실에 무수단 등대에 있던 백종용씨(조선인) 한 사람만이 잇었다. 해사과에서 사용하고 있던 가 새겨진 찻잔을 기념으로 받아서 돌아왔다. 지금도 집에 보관하고 있다. .

 

원본출처 일본 선광회보 / 발굴 및 번역 정세모(전 한국해양대학교 교수)

편집 석영국(등대 역사전문가) / 김민철(등대전공 공학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