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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시인들

<부산의 시인들> 31. 강갑재

작성일 : 2026.05.03 02:18

부산의 시인들

 

31. 강갑재

<오른손이 아이를 일으켜 세울 때/왼손이 커피 잔을 들고 있는 것을 깜빡 잊었네/두 손으로 일으켜야 할 일을/가볍게 여겨/아이의 옷에 커피를 쏟곤/오른손으로 더 큰 울음을 일으켜 세웠네/아이는 얼룩진 모습으로 갔지만/나는 울음을 쥐고 돌아왔네/그 참, 오른손에 정신이 팔려/잠시 왼손을 잊었네.> (강갑재, 잠시 왼손을 잊었네전문)

우리 삶에는 이것 생각하다 저것을 챙기지 못해 저지른 실수가 허다하다. 오십견 생각 못하다가 언뜻 손을 쳐들면 입에서 비명이 나온다. 큰아이 챙기다 보면 작은 아이가 울상이 되어 있다. 이런 우리의 삶을 강갑재 시인(1951-2025)이 잠시 일깨운다. 강갑재 시인은 필자와 같은 고향인 경남 남해 출신이다. 부산상고를 나와 동아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혜화여중고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다. 문단은 1999문예연구를 통해 등단하면서 늦깎이 문인답게 나름대로 시의 열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처음 강시인을 만났을 때는 단정한 외모보다는 덥수룩한 머리, 수염 등 시골 농부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말투도 약간 쇠소리의 허스키한 분위기, 거기다 악수를 하면 아귀힘이 어찌나 세던지 아무튼 드물게 보는 터프가이 인상을 주던 강갑재 시인이었다.

필자와 강갑재 시인은 <화전문학회>에서 자주 만났다. <화전문학회>30여 년 전 필자와 양왕용 교수 등 남해 출신 문인들이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만든 문학회다. 지금도 이 문학회는 수십 명의 회원들이 각자의 장르에서 열심히 문학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문학회 모임이 있는 날은 유독 김상남 아동문학가와 강갑재 시인이 옆자리에 붙어 앉는다. 필자가 한 번은 물었다. 왜 꼭 두 분은 붙어 앉느냐고, 술 때문이었다. 다른 회원들은 술 대작이 잘 안되니까 죽이 맞는 두 사람이 같이 앉아야 마음껏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임이 파하고 모두들 일어서는데 두 분은 더 마시고 간다고 계속 앉아 있곤 했다. 그리고는 나가는 필자를 붙잡기도 했다. ”박교수, 한 잔 더하고 가지.“

양산 원동에 강갑재 시인은 수류당이라는 집을 하나 마련해 지내고 있었는데 한번은 우리 회원들 모두가 야유회 겸 방문한 적이 있었다. 경치 좋은 곳의 분위기 있는 집이었다. 강시인과 필자 둘이 있을 때 필자가 물었다. “사모님은 계시지 않습니까?”, “술 마시기 위해서 따로 사는데 아직 한 번도 오지 않았습니다.”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정말 술꾼이라 생각했다. 필자도 술은 좀 한다 생각했지만 강시인과는 잽이 안되었다. 술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 없다는 말이 있다. 강시인에게 제격인 말이다. 정말 어질고 착한 분이다. 같이 북콘서트에서 토론도 해보고, 여행도 함께 해보면서 느꼈지만 너무 편한 분이었다. 어찌보면 너무 어질어서 손해 보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기 거 무조건 퍼주는 식이었으니까. 늘 불콰한 얼굴, 술을 너무 좋아해서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기러기가 날아온다./줄줄이 공단에 내려/풀뿌리를 뜯으며/겨울을 난다//북녘은 눈으로 덮여/부리조차 박을 수 없는 땅/푸른 날개를 펴고/남도를 찾아와/끈질기게 살아가는 법을/이 땅에 새기고 되돌아가면//기러기 그림자/새 줄기로 줄줄이 뻗어/마디마디 겨울 울음소리/꽃이 된다/한 꽃받침에 두 눈동자/아직 기웃거리며>(인동초)

인동초 줄기가 뻗어 있는 것을 보고 시인은 기러기가 줄을 지어 날아가는 것만 같다고 여겼다. 그리고 시인은 추운 겨울을 딛고 나름대로 꽃을 피운다는 것이 제3국에서 우리나라에 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일하는 산업근로자를 보는 것 같다고 시작노트에서 밝히기도 했다. 강시인의 따뜻한 마음을 함께 읽을 수 있다. 지금 남해는 어장 사업 등으로 우리나라에서 부촌에 속하지만 우리 어릴 적 남해는 빈촌이었다. 지금은 인구가 3만을 조금 넘는 정도지만 거제도, 진도와 달리 농지가 없는 조그마한 섬에 그때는 인구가 13만이었다. 먹을 양식이 없어 쑥 같은 나물에다 바닷가 해조류로 연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산지를 논이나 밭으로 일구어 농사를 짓기도 했다. 그래서 다랭이논이 남해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남해 사람들이 생활력이 강하다고 하는 것이 그런 데서 연유한다는 사실을 알고 어쩐지 남해 사람들이 불쌍해 보인다고 우스개로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필자가 강시인의 인동초를 보면서 왜 이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강시인과 대화 중 이런 말이 오간 적이 있었다. “박선생님은 왜 교대를 갔습니까?”,“먹고 살기 힘들어서지요.”“강선생님은?”.“촌에서 조금 여유만 있었으면 인문계 갔을 건데, 할 수 없이 실업계를 갔지요.” 강시인은 공부를 아주 잘하는 학생이었단다. 그래서 쉽게 돈 버는 부산상고를 갈 수밖에 없었다는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강시인이 가셨다. 아직 한참의 연세인데 술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니 그냥 좋은 곳에 가셔서 마시고 싶은 술 마음껏 드시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다. 정말 좋은 분이었는데 벌써 보고 싶어진다.

<박홍배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