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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호 소설집/ 사과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작성일 : 2023.04.10 02:41

박명호 소설집 <사과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1.소설집을 내면서

 

 

사랑을 주제로 한 다섯 편의 단편을 모아 책을 냈다.

 

박명호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빼어난 서정적 필치다. 장문의 호흡이 별로 없고 간결하고 절제된 문장이 많은 그의 글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운문처럼 낭독하기에 적합한 느낌을 준다. 편하게 글자의 행렬을 눈과 입이 따라가며 소리내어 읽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 건조한 글자를 일으켜 세워 호흡을 불어넣어 음성으로 세상에 내보내고 싶은 것이 그의 소설이다. 서정적인 감수성을 견지하는 것은 이 나라의 50대 이상 남성 작가로서는 흔치 않는 미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서정성을 중시하는 박명호 소설의 경향은 시를 썼다는 그의 과거 경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작가에게 소설이니 시니 하는 갈래는 글을 쓰는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정문순)

 

 

2.이런 소설입니다.

 

<만주리행>

 

저승길 같은 멀고도 낯선 만주리행 여행에서 삶의 근본적 물음인 고독과 정면으로 부딪힌다.

가출한 딸을 찾아가는 여인을 만나 그들 사정에 잠시 연민도 보내지만 고독의 짙은 그림자는 여행 내내 따라 다닌다. 사랑도 하나의 위안이라지만 쓸쓸함도 약간의 마약 같은 달콤함이 있다. 해서 저승길도 이 정도의 고독이라면 견딜만하지 않을까.

 

결국 나는 만주리에 가지 못했다. 아니, 가지를 않았다. 나는

만주리에 닿기 직전 원래 계획대로 하이나얼에 내렸다. 하이나

얼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고 추웠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외롭고 적막한 곳이었다. 아마 만주

리도 그와 비슷할 것이다. 정말 이승의 경계 지점에 온 것 같은

분위기였다. 만주리가 종착역이니까 인생의 종착역인 저승이라

는 생각이 들었다. 종착역에 도달해버리면 모든 것이 끝나는 셈

이니까 거기까지 갈 수는 없었다

 

<사과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논두렁 블루스 류의 산골 이야기다.

귀농해서 멋진 전원생활을 꿈꾸던 박 원장은 농사일에는 별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 시골 문화원에서 서애 강사를 하면서 나름의 멋을 부리며 살아간다.

틈만 나면 장터 다방에 앉아 산골 생활에서 무료함을 달래던 박 원장과 시골 사내들에게 미모의 여성이 나타난다. 그녀는 그들의 마음을 한껏 부풀게 한 다음 거액을 챙 겨 사라진다. 그래도 사과꽃은 피고 지고 산골의 삶은 건강하다.

 

사과꽃은 한창을 지나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조금만 불

어도 함박눈처럼 흩어져 내렸다. 이럴 때면 일손이 더욱 바빠진

. 그런데 동네 사내들이 왕창 사라져버렸다.

박 원장도 이장도 철물점 주인도 모두 그 바쁜 시기에 온다 간

다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박 원장이야 그런 일이 종

종 있어 왔지만, 동네 밖을 잘 벗어나지 않는 이장이나 일 년 내

내 마네킹처럼 제 점포를 지키는 철물점 주인까지 없어진 것은

뜻밖이었다. 자주 얼굴을 접하는 사내들 중에 새댁네 신랑만이

이웃 마을에 일하러 간 것이 확인되었을 뿐이었다. 김 집사,

장네, 철이 엄마, 새댁 들이 이리저리 수소문하다가 내린 결론은

보현산 천년여우였다.

이년, 정말 천년 야시네.”

이장네가 혀를 찼다.

내싸 마 인자는 더 못 참는다!”

김 집사가 팔을 걷어붙였다.

이러다가 동네 남자 씨 말리겠다.”

철이 엄마도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녀들은 다시 한 번 새댁네 트럭에 올라탔다.

그 시간 동네 사내들은 보현산 자락에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천년여우가 아니라 건너 골짜기 오두막앞뜰에서 씁쓸한 막

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마누라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기막힌 일로 잔을 기울고 있었다.

 

 

<바람을 위한 서시>

내가 알고 있는 시 가운데 가장 난해한 김춘수의 <꽃을 위한 서시>는 김춘수가 탐구했던 현상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핵심 주제인 사랑에 대해 매우 어려운 수식어를 구사한다. 현상학이 매우 어려운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여태 그 시를 제대로 해석하거나 감상한 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꽃을 위한 서시>는 난해한 시라고 한다. 해서, 그 난해한 수식어를 소설로 풀어보았다. 시와 시 해석을 테마로 한 소설이다.

 

십 년째 사람 하나 바뀌지 않는 편집실. 내 자리도 내 일도 내

아내의 표정도 그대로였다. 남들은 시인이라고 부러워하는 경

우도 있으나 벌써 몇 년째 한 편의 시도 쓰지 못했다. 내 삶은 마

흔을 넘기면서 탄력을 잃어버렸고, 웬만한 일에도 감동이 일어

나지 않았다. 상상력도 고갈됐다.

나는 다시 시를 써보기로 했다. 그것은 더욱 무료했다.

아직도 시를 쓰는 사람이 있습니까?

스스로 빈정거리기도 해보지만 나는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

. 그것은 사실 발악이라 해도 무방했다.

몇 시간을 의자에 몸을 맡긴 채 그냥 그렇게 있었다. 흔하게

울려 대던 전화 소리는커녕 인기척도 없었다. 약간의 시장기

가 있었으나 무료함을 뒤엎지는 못했다. 창에 어려 있던 노을

이 사라지면서 어둠은 비스듬히 기울어진 술병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시곗바늘은 엿가락처럼 휘어져 시간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무료한 인간에게 시간이란 별 의미가 없

었다.

 

 

하루하루는 시계의 짧은 바늘처럼 느리게 가지만 한 달은 초침보

다 빠르게 지나간다. 곧 시간은 느리지만 세월은 빠르다. 돌이켜

보면 모모와 지낸 지난 한 해는 그 모순의 절정이었다. 결국 모

모는 환상이었고, 봄날의 짧은 꿈이었다.

 

 

 

 

<돼지사냥꾼>

살아 있는 생물체의 생존 본능은 번식이고 번식은 성의 발현이다. 본능적 사랑의 흔적은 사냥에서 잘 나타난다. 산돼지 사냥의 핵심은 을 보는 것이고 사냥개는 사냥감의 냄새를 잘 맡는다. 사냥과 사랑의 공통점은 발 보기에 성패가 달려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 고집이라면 연애는 타협

사랑이 최선이라면 연애는 차선

사랑이 이상이라면 연애는 현실!

 

그래서 나는 늘 외롭습니다. 확실한 에이스가 없을

때 불펜에 많은 투수가 필요합니다. 여자도 마찬가집니다. 에이

스가 없으면 내가 견딜 수 있는 고독 전선이 너무 쉽게 무너집

니다. 그런대로 버틸 것 같던 선수들이 너무 쉽게 무너집니다.

그럴수록 많은 불펜 투수가 필요하지요. 에이스가 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겠지만

 

 

<처용가>

처용가를 주제로 한 현대판 처용의 소설이다.

동해 역신으로 이해되는 처용은 성에 대한 금기와 낭만적 파계의 상징이다. 여고 시절 이루지 못한 스승에 대한 사랑을 결혼 뒤 남편의 도움으로 성취한다. 여기서 남편은 현대판 처용의 모습이며, 그의 언행은 처용가의 재현이다.

 

그가 떠난 뒤에도 그의 감동적인

말은 여전히 내 귓전을 울리고 있었다.

사랑은 나눈다고 해서 결코 소비되고 마모되는 것이 아니

라 나눌수록 커지고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연이 씨는 분명

아름다운 꽃이고, 그러기에 선생님의 꽃일 수도, 저의 꽃일

수도 있는 자연의 꽃입니다. 처용의 춤은 바로 그것을 일깨

워주는 것이지요.

 

바람이 등 뒤에서 나를 스쳐 앞으로 갔다. 정말 어디선가 춤과

함께 어우러진 처용의 노랫가락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처용의 너그러움과 슬기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찬양의 노래였다.

비록 가락은 소멸되었지만, 정신은 춤으로 산화되어 천년이 넘은

세월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3.지금 이 시대의 바보 같은 소설쓰기

 

내 한쪽의 삶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공간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곳 말고

이 도시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

- 내 책상 내 의자, 읽다가 만 내 책들,

쓰다 던져 놓은 내 원고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코 묻은 휴지들,

나의 고민과 땀과 냄새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아니 내 청춘이 고스란히 머물러 있는

나만의 공간이 이 시내 한 곳 어딘가에 있다-

나는 도대체 뭐하느라 그렇게 소중한 공간을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왔던가...

생각하면 할수록 한심하고 바보스럽다.

어쨌든 내가 아무리 바보스러워도

지금 이 도시 한 곳에 나의 소도(蘇塗)

그 공간이 있다는 것은

마치 오래 입지 않은 옷장 속 옷에서

수표 한 장을 발견했을 때처럼 행복감이 북받친다.

여태 난 그걸 모르고,

무엇이 바빠 그렇게 불안하게 살고 있었을까...

바보같이, 정말 바보같이...

 

소설은 어디엔가 내가 모르고 있는 나만의 세계를 찾아가는 바보 같은 작업이 아닐까.

 

<박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