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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04.10 02:33
<김춘수평전, 꽃 처용으로 날아오르다>
제1부, 통영(1922-11934) 처용의 바다.고향
유년기와 통영보통학교시절 (1)
‘꽃’의 시인 김춘수가 태어난 통영을 찾다
김춘수(1922-2004) 시인은 경남 통영시 남망산 기슭 지금은 동피랑으로 알려진 마을 아래쪽인 동호동 61번지(당시 경남 통영읍 서정 61)에서 아버지 김영팔(1903-1968) 옹과 어머니 허명하(1901-1968) 여사의 3남1녀의 맏이로 1922년 11월 25일(음력 9월 24일)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김 시인이 태어난 통영은 앞바다에 있는 크고 작은 섬과 아름다운 해안선 때문에 동양의 나폴리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진 아름다운 항구 도시이다. 뿐만 아니라 통영에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삼도수통제사가 근무하던 통제영이 있었기 때문에 특산물을 임금에게 진상하기 위한 12개 공방을 비롯한 공예품 만드는 장인과 예인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2년마다 통제사의 교체로 한양의 문물이 이입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 강점기가 시작 직전부터 통영이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워 일본인들의 진출과 수산물 일본 수출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일본인들의 진출은 일제강점기 직전인 1906년부터 통영해안 매축공사를 하면서부터이다. 통영항의 지리적 조건이 평지가 부족한 것을 바다를 매립하여 해결하기 시작한 것이다. 1931-32년 1년4개월 동안 미륵도와 통영항을 연결하는 길이 483m의 동양최초의 해저터널이 건설되기도 하였다. 미륵도에는 1907년부터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주로 이들은 오카야마(岡山)현 어부들로 일본정부로부터 장려금을 받고 이주 하였다. 남포동과 도남동 190번지 일원에 거주 하였는데 1910년에는 일본인 자녀교육을 위한 강산촌심상소학교(현재의 남포초등학교 자리)가 설립될 정도였다. 말하자면 충무공 이순신의 얼이 깃든 통영이 일제강점기 수산물 공출을 위한 도시가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산기지적 측면과는 다르게 통영의 근대화에 기여한 벽안의 외국인들이 있었다. 1894년 호주 장로교 출신 선교사 무어(Elizabeth S · Moore, 한국 이름 모라사백) 부산선교부 여선교사가 통영을 방문하여 통영과 인근 육지와 섬 지역 선교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그래서 9년 동안 본국과 부산선교부에 호소하여 1913년 통영지역선교부 설치를 관철시킨 것이다. 그의 노력으로 24명의 호주 선교사들이 통영은 물론 이웃 거제, 고성, 진해 등지에 교회를 개척하고 문화, 의료, 교육, 사회사업 등을 하였다. 1914년 통영에 진료소를 세우고 진영학원 등 5개 교육기관을 세웠다. 1941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되기까지 47년간 통영 근대화의 주춧돌이 되었으며 김춘수 시인의 시에 나오는 호주선교사 유치원이 바로 진명학원 유치원이다. 그리고 유치진, 유치환, 김상옥 ,박경리 등 문인과 윤이상, 정윤주 등 음악가와 전혁림 화가를 길러낸 자양분이 되었다. 2016년부터 통영의 뜻 있는 인사들이 호주선교회 기념사업회를 발족 시켜 선교사 유적지 복원사업을 하고 있다.
김 시인의 할아버지 김진현 옹(생몰연대 미상)은 김 시인의 회고에 의하면 인동고을(경북 구미)의 원을 지낸 분으로 통영군 산양면 남평리에 정착하면서 광도면 안정리의 들판을 기반으로 만석꾼의 소리를 듣는 대부호였다. 아버지 김영팔 옹은 할아버지의 첫째, 둘째 부인의 연이은 상처로 세 번째 부인 차신기(1881-1960) 여사 사이에 난 10남매의 막내아들이었다. 김 시인의 할머니가 60세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오니 맏며느님이 시어머니 같았다고 한다. 김영팔 옹은 결혼 후 산양면에서 분가하여 있다가 동호동에 직접 집을 지어 이사를 하였다. 동호동으로 1918년 8월 3일 전적되었다고 통영시청의 제적부에 나타나 있으나 산양면에서 분가한 기록이 1921년 4월 3일로 되어 있기도 하여 결혼한 후에 집을 지어 이사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러한 호적부의 기록은 통영 차영한 시인의 자료발굴로 알려진 사실이다.(차영한;김춘수 신과 유치환 시인의 관계《통영문학⟫2017,36호p243-244)
김영팔 옹은 분가 후 상속받은 농토로 농사를 잘 지어 삼천석꾼의 부호가 되었다. 자녀는 김춘수 시인 밑으로 동생 규수, 형수. 딸 연경을 두었다. 그리고 자녀에 대한 교육열도 대단했다. 김춘수 시인을 어린 시절 여항산 기슭에 있는 호주선교사가 운영한 유치원에 보내기도 하였다. 이 때의 유치원 보모가 청마 유치환(1908-1967) 시인의 아내가 되는 권재순 여사로 청마와 권 여사의 결혼식(청마 호적에는 1929년 4월 5일 결혼한 것으로 돼 있으나 1928년 가을이나 겨울로 추측됨, 1929년 4월은 김 시인의 초등학교 1학년 시절이고 청마의 장녀 유인전 여사가 10월 21일 태어난 것으로 보아 그렇게 추측됨)에 화동으로 김 시인이 발탁되어 고향 선배이자 평생의 멘토가 되는 청마 시인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김영팔 옹은 김춘수 시인이 8세가 되는 1929년에는 1908년 조선조 말에 개교하여 1920년에는 6년제 정식학교가 된 통영읍내 유일한 한국인 학교인 통영보통학교에 입학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 동안 입학하지 못한 과연령 취학생으로 자리가 생기지 않자 광도면 안정에 있는 친지집에 의탁하여 1922년에 개교한 광도면의 4년제 광도보통학교(현재의 벽방초등학교)로 입학시켰다가 1학년 초에 통영초등학교에 결원이 생긴 자리에 전학을 시켰다. 통영초등학교의 김춘수 시인의 학적부에 의하면 입학전 경력에 광도보통학교 1년생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1학년 성적부터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학년 초에 전학 온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글을 쓰기 위해 혹시 벽방초등학교에 김 시인의 재학 기록이 있는가 확인해 보았으나 전혀 찾을 수 없다는 연락을 받았다.
김 시인의 회고기에도 종종 보이고 있지만 1학년 때에는 타학교에서 온 탓으로 학기말 성적이 71명 중에 10위였으나 2학년과 3학년에는 7위와 6위를 하다가 4,5,6학년은 1위가 되어 우등상도 받고 두뇌가 명석하다는 기록도 남기고 있다. 김 시인은 <국어>라는 이름으로 일본어, <조선어>라는 이름으로 국어를 배웠으며, <수신>,<산술>, <지리>,<이과>,<도화>,<창가>,<체조>,<수공> 등 모든 과목에 재능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졸업식 때에는 졸업생을 대표로 답사도 하게 되고 도내 몇 학교만 받는 도지사상을 받게 된다. 1935년에는 김 시인은 통영시내에서 몇 안 되는 경성공립고등보통학교(4학년 때 경기공립중학교로 교명 변경)에 입학하는 영광을 누린다. 경기고등학교 학적부에 의하면 가회동 외척 고명수 씨가 보증인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가회동에 있다가 2학년 때에는 4남매의 교육을 위하여 통영에서 종로구 명륜동 3가 72-6에 집을 사서 이사를 하면서 본적도 통영에서 서울로 옮기고 아래 동생들은 통영초등학교에서 서울로 모두 전학을 시킨다. 선친 김영팔 옹은 서울과 통영을 오르내리고 고향에는 조모를 비롯한 일부 가족들이 살게 되었다. 그리고 김 시인의 두 동생들도 모두 경기중학교에 입학하여 동아일보에 수재집안으로 화제기사가 나기도 한다. 김 옹은 3형제를 법관, 의사, 정치가가 되기를 소망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가운데 김 시인만 그 소망을 들어주지 못하고 차남 김규수 씨는 서울대 의대에 진학하여 의사의 길을 걷다가 6·25 전쟁기에 부산에서 일찍 돌아가시고 삼남 형수 시는 서울대 정치외교과를 나와 외교관이 되어 네팔대사까지 하다 병에 걸려 조기 은퇴하여 있다가 돌아가셨다. 여동생은 숙명여대 약대를 중퇴하고 부산 사람 백무학과 결혼하여 대구에서 살다가 돌아가셨다. 그 후손들은 대구와 서울 등지에 살고 있다.
그 후손 가운데 통영을 지키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있다. 김 시인의 바로 아랫 동생 김규수(1925-1954) 씨의 둘째아들 김용일 (1951-)씨이다. 김규수 씨는 젊은 나이에 돌아갔으나 일찍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큰 아들 김용준(1948-1975) 씨는 일찍 죽고 둘째 아들 용일 씨는 조부모 밑에서 김 시인의 고향집을 지키면서 자랐다. 그래서 필자가 최근에 통영을 방문한 길에 만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통해 들은 김춘수 시인의 집안 이야기와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 다 1968년에 돌아가셨는데 그 때까지의 통영에서의 삶에 대해서도는 이야기를 들었다. 해방 이후 김 시인의 부모들은 농지개혁 때문에 3000평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유권이 상실되었다. 그리고 생가의 길가 쪽에 방앗간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8년 봄과 가을에 조부모가 돌아가시고 1973년 생가 가운데 길가 쪽 아랫채 부분을 매각하고 1978년에는 윗 채까지 유지하기 어려워 김춘수 시인의 주도로 매각하였다고 한다.
동호동 생가는 원래 61-1과 2 두 필지로 300평에 가까운 넓은 곳이었다. 바다도 멀지 않은 곳으로 그 당시에도 도로를 끼고 있는 요지였다. 지금은 소유권이 1978년 넘긴 이와는 다른 이에게 이전되고 길 쪽은 도로확장으로 상당수가 들어가고 남은 부분은 두 가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길가 쪽에 김 시인의 나무로 된 입상이 서 있고 입구에 <대여 김춘수 시인>이 살았던 곳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그리고 몇 해 전과 비교하면 초등학생들과 통영화가들이 그린 김춘수 시인의 <꽃> 시편과 다른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2020년 7월 8일 통영을 방문하였을 때 김용일 조카와 필자를 안내한 통영문협부회장(현재 회장) 유영희 수필가 그리고 차영한 시인 모두 한결같이 생가의 모습이 부끄러워 안내하기를 주저했다. 그리고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고 살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정확히 볼 수도 없었다. 남은 평수도 김용일 조카의 말을 빌리면 두 가구가 살고 있기 때문에 160-70평은 되지 않겠냐고 했다. 원래 아래 위에 ㄷ자 형의 집이 마주 보고 있었는데 그 집들이 어디어디로 뜯겨 팔려갔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대로 복원 하기는 곤란해도 그 자리를 활용한 김춘수문학관의 건립은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남망산 입구 생가 근처에 김 시인의 <꽃> 시비가 세워져 있고, 항남동5거리에 김춘수 시인의 전신 입상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해평 5길 바닷가에 예전 한려해상공원관리사무소 건물에 <김춘수유품관>이라는 이름으로 김 시인이 만년에 생활하던 소품들이 여러 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 시설에 몇 번 가보았지만 임시 보관처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김춘수 시인이 교육받았던 호주 선교사들이 세웠던 유치원 자리는 서피랑 건너편 여항산 중턱에 눈짐작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통영초등학교는 예전에는 문화동 세병관 옆이라 일제 강점기는 세병관을 칸으로 막아 교실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그 자리 있다가 통영본영 복원 사업 때문에 밀려 2005년 무전동으로 이전하였다. 원필숙 교장의 안내로 역사관에 전시된 김춘수 시인을 만날 수 있었다. 앞에서도 잠시 열거 했지만 통영시의 유명 문인을 비롯한 예술가들이 대부분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9회 유치진(1905-1974) 극작가, 12회 유치환(1908-1967) 시인, 20회 전혁림(1915-2010) 화가, 22회 윤이상(1917-1995), 정윤주(1918-1997) 작곡가, 23회 김상옥(1920-2004) 시조시인, 25회 김춘수(1922-2004) 시인, 31회 박경리( 1926-2008) 소설가 등 한국문학사와 예술사에 이름을 남긴 기라성 같은 분들이 이 학교 출신이다.
이들 가운데 유치환 시인은 문학관이 진작부터 있었고 생가도 최근에 복원되었다. 윤이상 기념관 역시 그 규모가 대단하다. 박경리 작가의 경우는 묘소 주변의 기념관과 유적들이 대단하다.
2008년 11월 1일 시의 날에 1908년 11월 1일 『소년』 창간호에 실린 최남선의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로부터 100년이 되는 <신시 10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KBS1TV가 개최한<시인만세>를 위한 인터넷, 우편엽서, 면접설문 등의 국민여론조사에 참여한 1만8천298명의 국민 애송시를 순위별로 발표한 바 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1천557표로 1위, 윤동주의 「서시」가 1천377표로 2위, 그 다음 김춘수 시인의 「꽃」이 677표로 3위를 차지한 바 있다. 일제 강점기에 데뷔하여 활동한 서정주,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김현승 등의 작품을 재끼고 3위를 한 것이다. 그리고 김 시인의 대표작인 장시 「처용단장」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과 자전적 소설 『꽃과 여우』를 비롯한 여러 산문들에 김 시인의 유년 시절인 통영이 나타나 있다. 심지어 김 시인이 작고하기 직전에 쓴 유일한 동화집 『통영소년 김춘수』(2003, 2018년 <통영시인 김춘수 이야기>로 재판)도 그의 유년 시절 이야기이다. <통영 출신 문인들 가운데 이렇게 통영에 집착하고 통영을 사랑한 사람이 김춘수 시인 말고 누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양왕용/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