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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의 책상과 밥상 사이

<책상과 밥상 사이> 95.춘일서정

작성일 : 2023.04.07 06:32

춘일서정

/윤일현

 

 

단독주택으로 이사 오고 10년 남짓한 세월이 흘렀다. 작은 마당에는 무화과나무, 감나무, 대추나무 등이 자리를 잡았고 크고 작은 꽃들도 저마다 당당한 자태로 철 따라 피고 진다. 지금의 화단이 연중 가장 보기 좋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솟아오르는 모습은 바라보기만 해도 힘을 준다. 마당엔 식물만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 집 화단은 이사 오던 해부터 동네 고양이들의 휴식처이자 흙을 파고 볼일을 보는 장소다. 길고양이도 더불어 살아야 하는 생명이라 생각하고 큰 불평 없이 모든 것을 허용해 주었다. ‘조르바라는 이름을 붙여준 고양이는 지난해 구내염에 걸려 고생하다가 가을에 죽었다. 그 녀석과 같이 놀던 고양이도 지난겨울부터 병에 걸려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야위었다. 사료를 먹지 못해 참치를 먹였다. 이 녀석도 얼마 전에 죽었다. 길고양이는 죽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 녀석은 새싹이 돋아나는 꽃밭 폭신한 흙 위에서 생을 마감했다. 나는 부드러운 종이로 사체를 감싸 처리했다. 참치 통조림도 그 곁에 넣어주며 명복을 빌었다. “길고양이로 태어나 눈칫밥 먹고 산다고 애쓰고 수고했다. 다음 생엔 인간 세상 부잣집 막내딸로 태어나 귀염받고 살아라.” 길고양이를 보내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춘래불사춘을 되뇌었다.

 

기원전 202년 천하를 통일한 한 고조 유방에겐 두통거리가 있었다. 북방 유목민 흉노족이었다. 노략질을 일삼는 흉노족을 토벌할 수 없었던 유방은 그들과 불평등조약을 맺었다. ‘한 나라 공주를 흉노 왕에게 시집보낸다.’는 조항도 있었다. 정략적으로 흉노에게 시집가는 공주를 화번공주라 불렀다. 기원전 33년 한나라 11대 황제 원제 때 흉노 왕 호안야가 화번공주를 요구했다. 원제에게는 수천 명의 후궁이 있었다. 원제는 화공에게 후궁들의 초상화를 그려오게 해 잠자리를 같이할 여인을 고르기도 했다. 원제는 화공의 그림 중에 가장 추한 후궁을 골라 흉노에게 보내기로 했다. 왕은 흉노에게 보낼 화번공주로 선정된 여인의 실물을 보고 기절초풍했다. 추녀가 아니라 천하일색의 미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여인이 바로 중국 4대 미인으로 꼽히는 왕소군이다. 원제의 후궁들은 왕에게 간택 받기 위해 초상화를 아름답게 그려 달라고 화공에게 뇌물을 바쳤다. 왕소군은 가난해 돈이 없었고 미모에 자신도 있어 뇌물을 주지 않았다. 왕소군이 흉노 왕과 떠나는 모습을 보고 원제는 화가 나서 화공 모연수를 참형에 처했다. 왕소군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오랑캐 땅에서 쓸쓸하게 죽었다. 우리가 자주 언급하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그녀의 슬픈 사연을 한탄한 당나라 시인 동방규가 쓴 시 소군원에서 나왔다.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그녀는 흉노족에게 직조와 농업기술 등을 전했고 화친의 목적도 달성해 시집간 후 60여 년 동안 전쟁이 없어 흉노 백성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인간 세상에 슬픈 사연의 한 많은 인물이 왕소군뿐이랴.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들이 너무 많다. 최근 빌라 주택 화재로 나이지리아 국적 4남매가 목숨을 잃었다.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이주한 사람들이 사는 열악한 환경이 빚은 비극이다. 한국식 상복을 입고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 엄마의 모습을 차마 바로 볼 수가 없었다. 안산에 사는 나이지리아 국적 주민들은 아프리카 전통 추모곡을 함께 부르며 아이들을 보냈다. 영혼을 신에게 부탁하면서 이승에서 잘 살아준 고인들에게 감사함을 전하는 내용이다. 하늘나라에선 부디 행복하길 빈다.

 

 

생의 허무를 가장 화려하게 상징하는 벚꽃이 거의 다 졌다. 꽃비가 쏟아지는 거리를 걸으며 어느 선배 시인이 봄 오니 까닭 없이 서럽고 울고 싶다라고 했다. 벚꽃은 왜 이리도 급하게 왔다 가는가. 봄의 성미가 너무 급해졌나. 모든 봄꽃이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한꺼번에 폈다가 지고 있다. 좀 느긋하게 즐기면서 음미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봄에는/혼자서는 외롭다, 둘이라야 한다, 혹은/둘 이상이라야 한다//물은 물끼리 흐르고/꽃은 꽃끼리 피어나고/하늘에 구름은 구름끼리 흐르는데//자꾸만 부푸는 피를 안고/혼자서 어떻게 사나, 이 찬란한 봄날//그대는 물 건너/아득한 섬으로만 떠 있는데이수익 시인의 봄날에전문이다. 그래, 혼자서 어떻게 사나, 혼자만 살아서 뭐 하나, 이 눈부신 봄날에.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