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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6.04.20 01:51
부산의 시인들
29. 임종성 2
<눈밭에 찍힌 꿩 발자국같이/핏덩이같이/선명한 내 안의 너를 지운다.//
늘 꿈꾸고/곁에 두고도 만나고 싶어/오래 동안 기다리며/벅찬 열망/간절한 주문이었던 너를/환하게 지운다.//
네 안에 잠적한/내 흔적이 뚜렷이 자리 잡아/지우면 지울수록/내가 되살아나던/뼈저린 아픔.//
이제 알겠다,/너를 지운다는 것은/결국 나 먼저 없애는 일이라는 것을.> (임종성, 「지우개2」 전문)
뼛속 깊이 자리 잡은 너를 지운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정대영의 시 「목탄지」에서처럼 목탄지에 그려진 그림이야 찹쌀지우개로 지우고 또 지우면 없어지지만 내 마음속에 깊이 응어리진 너는 내가 없어지지 않고서야 지울 수가 없다. 그런 응어리를 늘 안고 살아가야 하는 임시인의 자화상, 그 모습은 항상 그 작은 키, 축 처진 어깨, 그리고 늘 가지고 다니는 오래된 가죽 손가방에서 나타난다. 정말 한결같은 모습이다. 거기다 주로 정장이었다. 이런 그의 겉모습은 임시인이 살아온 삶, 그의 시인으로서 자존심 등을 느끼게 한다. 남달리 어려운 처지에서 더 힘든 나날을 겪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임시인에게 얼마나 많은 것들을 지우고 싶었을까. 출신 지역의 괴리감에서 오는 정체성 혼란, 남다른 외모의 콤플렉스, 그것들보다 훨씬 더 아니 모든 것을 아우르고도 수백 배 수천 배나 더 힘들었던 외동아들의 폭력에 의한 죽음, 이런 아픔들을 견디며 그래도 임시인은 시인으로서의 길을 끝까지 걸었다.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동아대 국문학과를 다닌 학생들은 조향, 구연식 시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주지하다시피 조향, 구연식은 모더니즘 시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시인들이었다. 당시 쉽게 풀어쓴 시가 유행하면서 시가 운문과 산문의 경계를 허문다고 여겼던 그들은 서구의 다다이즘 시운동 등 초현실주의 계열의 시들을 적극 옹호하게 되고 자연히 그들이 교수로 있는 동아대 국문과 출신들을 중심으로 그 계열의 동아리 활동을 적극 장려했던 것이다. 필자도 대학 국문과 시절 <한놀>이라는 시 동아리 활동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지도교수로 있던 구연식 교수의 이런 주장이 기억나기도 한다. “시는 상징성이 그 으뜸이야. 압축성과 은유가 없으면 그것이 산문이지 어떻게 시가 될 수 있겠어.” 그러면서 다다이즘 운동이 일어났던 유럽 예술의 분위기를 우리가 감히 가까이 갈 수 없는 선진적 운동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구연식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도 「한국시의 고현학적 연구」로 한국시를 서구 모더니즘 시와 비교하면서 다다이즘을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동아대 국문과의 분위기에 일찍 탑승한 시인이 임종성이다. 특히 구연식 교수가 임종성 시인을 아꼈던 것도 사실이다. 필자도 구교수에게서 임시인 시가 매우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도 있다. 임시인은 당시 동아대 국문과 출신 시인 중 가장 촉망 받던 시인의 한 사람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부산에서는 시인으로서 그의 이름을 드높이기도 했다. 시행사에는 어디를 가나 그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의 시들은 많은 문예지들에 자주 등장한다. 어느 문예지에서 뽑은 시의 일부다. <…무기력한 식은 재/하지만 벅찬 희망은/소복한 잿더미 속에서/뻔히 눈뜨는 불씨.//내가 바라는 새날은/갑자기 오지 않고/와서는 이내 가버리니.//빛나는 내일을 향해/눈보다 맑고/눈보다 환한 신새벽을 내다보며/나의 내면에/오래된 미래를 새겨 두리.(「첫눈」)의 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임시인 시풍의 서정성이 돋보이는 반면에 모더니즘 특유의 이미지즘적 경향을 함께 볼 수 있는 시다. 김준오 교수는 그의 시를 일러 “도시의 일상적 삶을 취재하면서도 그의 묘사력은 매우 참신하다. 그의 신선한 감수성에 의해 그의 시편들은 두드러지게 신서정을 창조한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임종성 시인은 부산시민들의 문학운동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여 주었다. 오랫동안 『문예시대』 주간을 맡아 부산의 문학 활성화에 기여하기도 했는데 긍정적 의미든 부정적 의미든 『문예시대』를 통해 많은 시인들이 탄생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임시인은 거기다 시낭송 운동에도 적극 참여한다. 본인이 시낭송 모임을 이끌기도 하고 직접 출연해 멋진 시낭송을 들려주기도 했다. 아마 경상도 사투리가 많이 섞여 있는 일반 시인들보다 표준어 발음에 가까운 임시인의 목소리가 한결 매력적일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임시인은 여러 문예강좌에서 시론 등을 강의했는데 자신이 직접 설립한 ‘청옥문예대학’의 학장을 맡아 많은 문학인들을 길러내기도 했다. 아마 늘 정장을 하고 손가방을 가지고 다니던 것도 그 문예대학의 강의나 시 행사가 그의 생활 전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린 심성의 임종성 시인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마음이 아팠다. 만약 그 아들을 잃는 일이 없었다면 그런 힘든 날을 보내지 않았을 테고 이렇게 일찍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필자와 얽힌 사건들도 정말 마음에 걸렸다. 폭력과 차별이 없는 저승에서는 편안한 삶을 누리시길 기원해 본다.
<박홍배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