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일본 등대원의 희노애락

일본 등대원의 희노애락

<조선 등대에 근무한 일본 등대원의 희노애락> 1.제1화 성진 등대의 최후

작성일 : 2026.04.20 01:47

조선의 등대에 근무한 일본 등대원의 희노애락(· · · )

 

발굴 및 번역 정세모(한국해양대학교 교수)

편집 석영국(등대 역사전문가), 김민철(등대전공 공학박사)

 

프롤로그 (Prologue)

 

일제 강점기(1910819458) 우리나라의 유인등대에서 등대원 또는 해사 관련분야에서 근무하였던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광복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서 1961선광회(鮮光會)라는 친목 단체를 만들고 선광회보를 발간하면서 한국의 등대에서 생활하였던 기록을 남겼다..

 

일제 강점기 시대 항로표지 관련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으나, 다행히 선광 회보에 일제 강점기 특히 광복 직후 우리나라 등대 생활상을 기록으로 남겨 두어 그 당시 항로표지 분야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된다.

 

한국해양대학교 정세모 교수께서 1999년도에 일본 등광회(燈光會)에서 입수하여 번역하였으며, 최근 정부애서 유인등대가 많이 없어지는 등 본래의 항로표지의 목적이 퇴색되어가는 시점에서, 문명의 발달이 절해고도까지 미치지 못해 어려웠던 시절의 등대를 지키기 위한 등대원들의 노력과 생활상 들을 통해 해상교통 안전이라는 항로표지 본래의 사명감을 잊지 말고 더욱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편찬하였다

 

이 글은 당시 일본인등대원 및 관계자의 기록이므로 오해 없기를 바란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34c40001.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183pixel, 세로 271pixel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34c4049c.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245pixel, 세로 310pixel

선광회보 글쓴이의 육필로 선광회보에 실린 글

 

1성진 등대의 최후

 

글쓴 이 성진 방송국 국장 전야수웅 轉野秀雄(196110)

 

종전의 날(1945.8.15.)로부터 사오일 간 성진 시가지는 너무 조용하여도 불길한 감이 도는 밤낮이 계속되었다.

 

나는 그때 하루를 성진 등대에 가본 기억이 있다. 그 시기에는 조수 기무라(木村), 등대장(松山 龍二)과 단둘이 생활하고 있었고 가족들과 그 누구도 없었다. 즉 가족들과 별거하고 있었다.

 

등대장도 기무라씨도 아직 등대를 인도할 생각은 없었다. ‘모든 것이 충성스러움 그 자체였다. 두 사람 모두 깊은 말은 하지 않았으나 등대장과 기무리씨의 결의는 결정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나도 성진 방송국 일이 걱정되어 장시간 등대에 머물 수가 없었다.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을 따라서는 두 번 다시 등대를 방문할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고, 나는 꾸벅꾸벅 걸어서 방송국으로 돌아왔다.

 

소련군이 얼마 있지 않아 진주해 올 것이다. ‘방송국을 인도해라고 말하며, 조선공산당원이 방송국으로 뛰어 들어왔다. 헌병대도 이제는 오지 않는다. 이제 나의 힘만으로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무서운 표정의 공산당원 앞에 아무 말도 없이 인도를 하였다. 다음날부터 공산당원에 의한 방송이 시작되었다.

 

북조선에서 걸어서 남하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날이 지나면서 점점 늘어났다. 남자도 여자도 모두 어두운 얼굴에 피곤에 지친 표정으로 발걸음을 내딪고 있었다. 매일 수 십리 길의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서, 걸어서 남으로 남으로 향하고 있었다.

 

소련군이 성진 시내로 돌입하였다. 비보가 날아들었다. 기무라씨가 그날 밤 총 한정을 가지고 저항하였으나 등대 바닥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등대장은 등대에서 바다로 투신하였고 다음 날 시신은 해안에서 발견되었다.

 

나는 많은 것을 쓰지는 않았으나 등대장과 기무라씨가 최후의 날까지 등대를 사수하였고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나는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 두 사람의 얼굴과 결의에 찬 모습에 대한 기억을 지금도 떨쳐 버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