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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6.04.12 08:14
부산의 시인들
28. 임종성 1
임종성 시인(1950-2019)은 전북 진안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생활해 왔다. 동아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을 거쳐 동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임시인은 1976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이후 줄곧 교단생활과 시 활동을 하면서 임종성이란 이름을 부산 문단에 각인시켜 왔다. 특히 필자에게 깊이 각인된 임시인의 이미지는 다음 세 가지 사건에서 연유한다.
첫 번째 사건은, 1995년 문협 사무국장으로 있던 필자의 기획으로 부산일보 대강당에서 ‘부산 문예지의 현주소’에 대한 토론회가 열리면서다. 『오늘의 문예비평』, 『시와 사상』 등 그때 부산에서 나오던 9개 문예지를 대상으로 각 문예지 주간들이 패널로 참가해 벌인 토론회였다. 당시 『문예시대』 주간 자격으로 참가했던 임종성 시인은 각 패널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문예시대』는 지나치게 수준 낮은 사람들을 등단케 함으로써 문인들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것이 주 공격 포인트였다. 거기다 계간지로서 매회 마다 신인상 수상자가 너무 많아 문인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데 『문예시대』가 크게 한몫을 한다는 것이다. 사실 문예지들의 그런 행태에 대해 대부분 문인들이 걱정하고 있었던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문예지의 표본이 『문예시대』라는 것도 당시 많은 문인들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토론회는 『문예시대』에 대한 다른 문예지 주간들의 성토로 끝이 났다. 토론회가 끝나고 필자는 각 패널에게 수고비로 책정된 얼마씩을 봉투에 넣어 그 자리에서 지불했다. 그런데 임종성 시인은 받자마자 그 봉투를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내동댕이치면서 필자에게 『문예시대』를 골탕 먹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획했다는 등 거친 말을 퍼부었다. 의자에 던진 봉투가 떨어져 찢어지고, 돈은 흩어지고 가관이었다. 필자는 한참 만에 돈을 다시 주워 임시인에게 전달했지만 불쾌한 맘을 금할 수 없었다. 정말 한 대 패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리 그렇지만 분노 조절이 그렇게 안되나 싶기도 했다.
두 번째 사건은 술값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90년대 초의 일이다. 동아대에서 학회를 마치고 박사과정 재학생 몇 명이 자갈치에서 한잔하고 2차로 주례에 있는 노래주점으로 갔다. 노래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술값을 계산하려는데 갑자기 임종성 시인이 자는 체를 하는 거였다. 우리가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자 최갑진 평론가가 안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는 각자 술값만큼 돈을 꺼내고 지갑은 다시 넣었다. 그러자 임시인은 갑자기 눈을 떠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야 이 새끼, 도둑놈!” 등 임시인은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술집 밖을 나와서도 그 고함은 그치지 않았다. “최갑진 이 죽일놈!” 듣고 있던 최 선생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너 오늘 죽어봐라. 평소에 너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리고는 죽지 않을 만큼 임시인을 패는 거였다. 아마 같은 학교 재단에서 근무하는 사이라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던 것 같다. 덩치는 어른과 아이 수준이었다. 임시인의 귀에서, 입에서 피가 나기에 안되겠다 싶어 필자는 말리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덩치로 처음에 달라 들던 임시인은 결국은 한 번만 살려달라고 최 선생에게 매달리는 정말 비참한 광경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도망가다시피 임시인은 가고 최 선생과 나는 당시 주례에 있던 필자의 집에 가서 한 잔을 더하고 같이 잤다. 다음 날 아침 일요일이었는데 필자의 집으로 임시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사건으로 최 선생과 필자를 고소한다는 거였다. 필자는 폭력 방조죄란다. 최 선생과 나는 고소해도 어쩔 수 없다며 기다리자고 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그날 저녁 임시인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오늘 하루 종일 교회에서 기도를 했는데, 예수님께서 용서하라 하기에 용서는 한다. 그런데 우리의 인연은 끊자. 내 박사과정도 그만둔다.” 다행이라 해야 할까, 그런데 정말 슬픈 일이었다. 이후 임시인은 박사과정을 포기했는데 한참 지나서 박사학위를 받기는 했다.
세 번째 사건은 필자와 관계없는 임시인 개인의 일이다. 그 폭력 사건 이후 얼마가 지나서다. TV를 보는데 뉴스에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보도 되었다. 부산 대신동에 있는 모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전교 1등 하는 학생이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뉴스다. 아무리 그래도 교실에서 학생이 맞아 죽다니, 교직에 있었던 필자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며칠을 계속해서 뉴스로 나왔다. 그런데 한 번은 사망한 학생 부친의 인터뷰가 있었다. 세상에! 바로 임종성 시인이었다. 필자의 충격도 이전의 그 사건이 있은 뒤라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침 그 인터뷰에서 임시인이 하는 말이 기독교인의 마음으로 가해자 모두를 용서한다는 거였다. 바로 최갑진 선생에게 전화를 했다. 최 선생은 알고 있다고 했다.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 선생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빈소를 알아보니 가야 백병원이라길래 필자는 혼자 빈소를 찾았다. 그래도 임시인은 빈소를 찾아주었다고 필자의 손을 꼭 잡아 주는 것이다. 평소 빈소에서는 눈물을 잘 흘리지 않던 필자도 그날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임시인에게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위로의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그 이후 종종 임시인을 만날라치면 필자가 의도적으로 자리를 피하곤 했다. 마주하기가 너무 미안했다. 그 금쪽같던 외아들을 그렇게 잃고 지금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그런 생각뿐이었다. 간혹 해운대 지하철역의 먼발치에서 보곤 했다. 늘 정장차림에다 손가방 하나 들고 어깨 축 늘어뜨리고 걷는 조그마한 임시인, 정말 그날의 일을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아프다. 이 세상에 폭력은 사라져야 한다. <박홍배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