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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시인들> 27. 이정모

작성일 : 2026.04.06 07:50 수정일 : 2026.04.06 07:52

부산의 시인들

 

27. 이정모

어린 시절 아니면 학창 시절 꾸었던 꿈들을 이루어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대개는 환경 탓이나 여러 사정으로 그 꿈을 포기하고 만다. 노래를 잘해 가수가 되고 싶었는데 부모님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여러 경연 덕분에 결국 이루어냈다는 요즈음 가수를 여럿 보기도 했다. 필자도 하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런데 집안 사정 때문에 그 근처에도 못 가보고 이렇게 마음에 없었던 문학판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신세다. 오히려 주변 직장동료나 지인들 중에는 학창 시절 시인을 꿈꾸었던 문학도들이 의외로 많았다고 짐작된다. 시인이 되고 싶었는데 돈이 되지 않으니까, 아니면 능력이 부족해서 등으로 시인이 되지 못했다는 넋두리를 주석 등에서 자주 듣곤 한다. 20여 년 전에 은행 지점장으로 퇴직한 이정모 씨를 만났는데 그분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이정모 시인(1949-2023)은 춘천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을 보내고 줄곧 부산에서 생활한 부산맨이다. 부산상고 재학 중이던 1960년대 말 연세춘추의 전국 고교생 문예작품 현상공모에서 장원을 했고, 부산 시내 고교 연합 문학 동아리를 이끄는 등 일찌감치 시인을 꿈꾸었지만 어려웠던 집안 형편상 어쩔 수 없이 은행에 취직을 하게 되고 그때부터는 시인의 길과는 다른 은행원으로서만 생활하게 된다. 그렇게 몇십 년, 은행을 퇴직하고서야 그간 쌓은 경제적 여력을 바탕으로 시인의 꿈을 다시 찾아 나선다. 마침 필자가 문협에 관계하고 있던 터라 필자에게 시인 되는 길을 구체적으로 묻기도 했다. 그래서 필자는 조의홍 시인의 도움으로 이정모 씨를 2007심상의 신인상을 받게 하면서 그의 꿈은 이루어지게 된다. 시인이 된 후 그는 누구보다 詩作에 열정적이었다. 그래서 2010년 첫 시집 제 몸이 통로다를 시작으로 기억의 귀, 허공의 신발등 연이어 발표한 시집으로 각광을 받기도 했는데 안타깝게도 2012년 간암 판정을 받고 투병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병상에서도 간간이 시를 써 2023백 년의 내간체라는 시집을 내고 간암이 폐까지 전이되어 결국 그해 1027일 사망하게 된다.

필자와 이정모 시인은 그의 등단 이전에는 늘 만났지만 등단 이후에는 자주 보지 못했다. 자주 만날 때는 조의홍 시인과 박종숙 시인 등이 주로 함께 했는데 마시지 못하는 술을 한 잔이라도 할라치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곤 했던 것 같다. 이시인의 등단 직후 우리는 몽골을 같이 여행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와는 너무 다른 이색적 풍경에 다른 이들은 감탄사를 연발할 때 이정모 시인은 떠오르는 시상을 수첩에 적느라 여념이 없었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만큼 시심이 열정적인 진짜 시인이었다. 그 몽골에서 이정모 시인은 어느 여류시인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여류시인이 작가회의 소속이었고 그래서 한국에 온 이후 이정모 시인은 문협을 떠나 본인 주장으로 더 젊은 단체라고 여겼던 작가회의 회원이 된 듯하다. 그때부터 필자와는 자주 보지 못하다가 한 번씩 문단 모임 등에서 보기도 했다. 그러다 몸이 많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절에서 요양을 좀 해야겠는데 혹시 통도사 극락암에 요양할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는 것이다. 언젠가 필자를 따라 극락암에 가서 주지 스님을 만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는 극락암 사정을 잘 알아 극락암은 선원이라 일반인을 안 받는다고 했더니 다른 절을 알아보고 거기서 요양을 좀 했던 것도 같다.

이정모 시인은 누구보다 뜨겁게 시를 쓰는 시인이었다. 늦깎이로 등단한 몫을 톡톡히 하면서 시로서 승부를 거는 승부사였다. 다른 시인들이 세상 다른 일들에 관심을 가져도 말년의 이시인은 오로지 시뿐이었다. 좋아하는 노래도 가사가 아주 시적인 노래만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정모 시인의 유작 시집 격인 백년의 내간체작가의 말에는독자에게 걸어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오체투지였다. 좀 더 다른, 나만의 시로 가는 길에는 나귀도 마방도 없었다는 치열한 시심을 보여준다. 아마 그가 몇몇 작가회의 회원들과 중국 샹그릴라를 다녀왔다는데 그때의 상황을 빗대어 쓴 글 같다. 손음 시인은 항암치료를 하느라 화장실에 기어가면서도 시를 쓰신 분이었다이분을 보노라면 누가 함부로 시집을 내는가라는 생각이 들 만큼 치열하고 뜨겁게 시를 대했다고 추모하기도 했다. 그가 사망하자 나온 국제신문의 부고란에는 그는 등단 이후 깊고 정갈하며 감각적인 시어에 삶과 자연과 세상에 관한 성찰을 담아내며 빼어나고 고요한 시 세계를 축조했다. 특히 생명에 관한 예민한 감각과 아름답고, 섬세하며, 사뿐한 표현은 탁월했다.”고 어느 평자의 글을 옮기기도 했다. 눈 지그시 감고 멋지게 노래 부르던 그의 모습이 그려진다.

<정자를 지을 때 흙 한 삽도 퍼내지 않았다는 곳 이런 말에는 고래가 있어 온돌의 구들장처럼 오래 드나든 불길이 보인다 사람에 초석을 둔 역사는 고작 문자로 남아 있겠지만 자연이 비워놓은 자리는 시간이 지나도 쓸모가 들어 있는 게라고, 낙향한 몸은 정치보다 정자에 마음을 두기로 했겠지 그보다 고향은 늙은 에미다 안기고 싶겠지 아마 정자는 여기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한양에서 금했던 것을 모두 풀어 놓고 초입부터 청죽 댓바람 소리로 묵객의 발소리에 운을 띄웠으나 계곡 물소리 외 무엇 하나 제대로 율을 맞추지도 못하는데 시절도 모르는 매화야 너는 무엇으로 그리 당당하여 속 깊은 향기를 공중의 붓에 묻혀 백 년의 사연을 내간체로 쓰고 있느냐 …… 음풍농월은 어느 주막에서 술 한 잔으로 잠을 청하려는지,> (이정모, 백 년의 내간체)

<박홍배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