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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6.03.30 12:57
부산의 시인들
26. 정영태
외국의 어느 통계에서 장수식품의 1위로 술이 선정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좀 의아했으나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술도 잘만 마시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늘상 우리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의 시인’, 이 글을 연재하면서 필자가 술에 관한 이야기를 유독 많이 하는 것 같다. 아마 필자가 술을 다른 이들보다 더 좋아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시인들이 대부분 술을 유독 좋아해 필자와의 관계에서는 술 인연으로 맺어진 경우가 많아서 생긴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지금 쓰고 있는 글들은 모두 작고 시인 이야기로 술 영향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장수한 분은 없어 술 이야기가 자연스레 많아진 듯하다. 거기다 이 글들은 대개 30년 전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어 지금과 다른 그때의 술문화가 준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시인 중 술 하면 필자에게 떠오르는 주당이 몇몇 있는데 의사 시인 정영태가 그 주당의 우두머리인 것만은 확실하다.
정영태 시인과 같이 활동하던 의사 시인이 당시에 더러 있었다. 강경주 배광훈 김경수 시인 등이 있었는데 강경주 시인은 술을 제법 좋아하긴 했지만 다른 시인들은 그렇게 많이 마시는 것 같지 않았고 유독 정영태 시인만은 두주불사였다. 작달 만한 체구에 머리숱도 별로 없고 약간 사시에 남에게 호감을 주는 인상은 아니었다. 특히 처음 보는 이들에게는 거부감이 들 정도로 노려보는 경향도 있다. 필자에게만 그런 줄 알았는데 그분의 처음 사람 만나는 버릇인 것을 뒤에 알고 고소를 금치 못하기도 했다. 정시인의 술 마시는 특징은 끝까지 간다는 것이다. 맨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기도 하지만 그 술집이 문을 닫을 때까지 마신다는 거였다. 만약 새벽까지도 허락한다면 밤새워서라도 마시는 타입이다. 그러니 같이 마시는 문인들이 혼이 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집에 갈려고 해도 붙잡는 데는 어쩔 수 없었다. 같이 대작하는 수 밖에. 그렇게 필자도 여러 번 당하다가 슬쩍 도망가는 기술을 익히기도 했다. 아마 중앙동의 ‘계림’에 정시인이 낸 술값은 집을 몇 채 사고도 남을 돈이었지 싶다.
그런 정영태 시인이 결국 쓰러졌다. 처음에는 뇌경색이었으나 뒤에는 뇌출혈로 수술까지 받게 된다. 사지를 바로 쓰지 못하게 되자 개원해 있던 병원까지 접고 요양에 들어갔다. 요양한 지 얼마 뒤 어디에선가 만났더니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라도 마셔야지 마시지 않으면 바로 죽을 것 같아 술도 마시고 답답해서 병원도 조그맣게 다시 열었다는 것이다. 정말 술꾼 정영태 시인이다 싶었다. 그 얼마 뒤 전어 철이었다. 강의를 마치고 연구실에 앉아 있는데 학생 몇이 찾아와 전어에 소주 한 잔이 어떠냐며 필자를 꼬드기는 것이다. 자주 있었던 일이다. 필자도 전어 생각이 있어 7,8명의 학생을 데리고 다대포 해수욕장에 있는 횟집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마침 정시인이 개업한 병원이 있어 인사차 들렀다. 손님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몸도 잘 쓰지 못하는 의사가 있는 내과 의원에 환자가 올까 싶기도 했다. 우리를 만난 정시인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오후 3시쯤밖에 되지 않았는데 바로 병원 문을 닫고 우리를 따라가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날 저녁은 푸짐한 전어회로 우리 학생들이 신나는 날이 되었다. 심지어 2차로 정시인의 집에까지 모두 가서 그 서툰 섹스폰 연주를 듣기도 했다.
정영태 시인의 말년은 대학 시절 문학 동아리 활동을 같이했던 정대영 시인과 주로 술친구로 지냈다. 하반신을 전혀 쓰지 못하는 정대영 시인은 집에서만 생활하고 있었다. 정영태 시인은 같이 술친구로 받아주는 이들이 별로 없자 언제라도 가서 술을 마실 수 있는 정대영 시인을 택한 것이다. 정대영 시인은 필자와 특히 가까운 사이였기에 심심하면 두 시인의 술자리에 불려가곤 했다. 밤 9시, 10시는 괜찮은 편이다. 어떨 때는 아침 출근했는데 전화가 와서 불러내는 데는 방법이 없었다. 병원은 어떡하냐고 물으면 환자도 없는 병원은 문 안 열어도 된다는 것이다. 참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두 사람의 술주정은 없는 편이다. 술 마시면 두 분 모두 시 이야기로 밤을 새운다. 진짜 시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 시인 옆에 필자는 앉아 듣기만 한다. AI가 가르쳐준 정영태의 별명은 ‘밤의 시인’이다. 평론집 『밤을 위한 시론』과 밤과 연관된 시들도 많지만 그런 생활을 한 연유도 컸을 것이다.
1985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한 정영태 시인(1949-2005)은 『결국 우리의 아픈 침묵 속에』(1986), 『형틀위의 잠』(1997), 『꿈의 끝이 여기에 있다』(1989). 『테크노피아의 폐허 위에』(1989), 『우주관측』(1992), 『어머니와 함께 블루스를』(1993) 등을 출간하면서 부산 시단에서 ‘밤의 시인’으로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남송우 교수도 “의식의 저변에 산재한 무의식의 파편들을 상상력을 통해 풀어내어 꿈꾸는 세계를 보여준다”고 그의 시를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80년대 『전망』 동인에 이어 90년대에 들어서는 다시 신서정의 기치를 걸고 태동한 『신서정시그룹』의 멤버로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 밤의 꿈을 펼치지 못하게 된다. 다행히 그가 1994년 창간한 시 전문 문예지 『시와 사상』은 김경수 의사 시인이 맡아 지금까지 최장수 문예지로서 활발한 활동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어디까지 읽었더라/아무리 되풀이해 읽어 보아도/사랑을 다 읽을 수 없다./모두 돌아간 빈 들판,/나무 찍는 소리가 아직 들린다./두려워 잠 못 드는 풀과 나무에게/소리 내어 성경을 읽어준다./천상의 별보다 더 밝고 따뜻한/지상의 낡은 램프 하나 켜들고/나의 사랑은/만리길 더 갈 신발을 깁는다./성경의 말씀들이 바람에 날려/한갖 먼지로 쌓인다 해도/그대 가고 있는 들판을 향해/더 큰 목소리로 성경을 읽어주마 … > (정영태, 「성경을 읽으며 6」 앞부분)
<박홍배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