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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80주년에 보는 등대 역사

<광복80주년에 보는 일본이 기록한 등대역사> 26. 등대공사 (제2년보, 1906년 – 1907년)

작성일 : 2026.03.16 08:36

 

26. 등대공사 (2년보, 19061907)

 

김민철 (공학박사, 등대전공), 석영국(등대 역사전문가)

 

 

이미 제1년보에 서술한 바와 같이 원래 한국 연안은 무수한 도서 및 암초가 도처에 산재하고, 또 동해안은 기세는 평탄하지만, 서해안은 현저하게 산봉우리가 험하고 또한 곶(岬角)이 굴곡졌으며, 해조 때 간만의 차는 동양에서는 그 비할 수 없게 심한 차가 있으며 특히 해류가 급격하면 또 해무가 많을 때에 따라 상시로 항해자가 곤란을 감지하고 해난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때가 많다.

 

이제는 한국은 일본의 보호하에 속하게 되며 통상 무역의 발달에 따라 교통은날로 번번하게 되는거로 이에대한 안전을 계획하자면 아즉 상태에 주요한 지역을 대상으로 수 많은 등대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인 사업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따라서 통상 무역의 추세에 감안하여 가장 급히 건설을 요하는 것부터 점차적으로 착수하고 광무 10(1906)부터 융희원년(1907)을 통하여 등대 13, 입표 6, 부표 50, 계등부표 5, 육표 14개소, 무경호 6개소, 기타 사무소 및 퇴식소(숙소) 등의 공사를 준공하였다. ,

 

그리고, 장래 건설하여야 할 항로표지는 등대 23, 부표 9, 무경호 8개소로서 총계 40여 개소이다.

 

신설공사

 

전장의 계획에 따라 광무 10(1906)부터 기공하여 본년에 이르기까지 게다가 한국의 지역은 도처마다 교통이 매우 불편하고 물자도 부족하여 재료를 공급하기 힘들고 공사 종사자의 고용도 힘들고 특히 등대 건설의 지역은 대부분 암초로 이루어진 고도로서 사방이 노도와 같은 파도 조류가 분등(솟구치는 물결)한 지역에 있지 않으면 즉 갑각 또는 절벽으로서 인적이 거의없는 지역이다.

 

그래서 이러한 공사 시행에 있어서 가장 고심하며 노력해야 할 일이며, 불행하게도 계획 그 당면성을 상실하면은 단순히 공사에 차질을 가져올 수 있을뿐더러 공사비도 역시 과다하게 소요하게 된다.

 

여기에서 본국의 건설사업은 가급적 직영으로 시공하기로 결정함과 동시에 공인 재료 내지 식량 등은 모두 인천에서 준비하고, 약간 부족한 것은 현장의 지방에서 구하기로 하고 본국 공작창을 인천에 설치하여다.

 

등대 기타 각종의 건축 재료는 조립 조작으로 정리하고 또한 지붕, 건구, 벽 등의 재료를 구입하고 수시 현장을 향해 이를 운반하기로 하였다.

 

본년(1907)에 있어서는 전년에서의 계속사업인 소청도 및 죽도 2개소의 등대 건축과, 본년에 있어서도 서도, 자매도, 시하도 및 목포구의 4개소의 등대 건축과 옹도 및 수원단등대 무경호 2개소의 설치, 마산포, 진해만 및 등무다리 3개소의 입표 건축, 진남포 및 목포항 부표 3개소의 정지, 우도 및 장덕도 이원퇴식소 2개소의 신축, 압록강 항로표지 설비 및 월미도 가스 증조소의 설치 등 모두 본년 중에 준공을 보게되고 지금 그 설치의 이유 및 설계개요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