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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6.03.16 08:32
Ep 10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격어 본 하조도, 소란스러운 이별
야모토 세이치시(山本 淸一)(전 목포신보 주간), 번역 정순종(전 등대장)
편집 석영국(등대 역사전문가), 김민철(등대 전공 공학박사)
하조도(下鳥島)
하조도는 장죽 수도와 거차 수도 사이에 흩어져 있는 섬들중 가장 큰 섬으로, 동서 약 4마일, 폭 약 1마일 반이다. 부근은 목포와 서선(西鮮) 항로에서 중요한 해로로 연간 통과 선박 수 약 2,600척 내외. 해마다 증가 일로를 걷고 있다.
특히 이 섬 부근은 ’조선 총도(叢島)‘라 하여 많은 작은 섬과 암초가 산재해 있을 뿐 아니라 조류가 심하여 일단 바람과 조류, 즉 풍조의 흐름이 서로 상반될 때는 인근의 수도가 무서운 급류를 형성하게 된다. 요즈음 같은 농무기가 되면 위험성이 더욱 높아지며, 수도를 통과하는 선박은 모두 이를 피하여 오리무중의 해상에 임시 정박하게 되어있다. 이러한 선박들에게 각종 식료품뿐만 아니라 음료수까지 제공하고 있다.
출발 전 원기를 회복한 일행은 오후 12시 반 하조도에 도착, 관현악단에 이어서 상륙했다. 이곳의 등대는 장죽 수도의 수호소(守護所)로 진도와 마주 보면서 목포 항로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부근에는 많은 암초가 흩어져 있어서 수로가 좁아 해난사고가 빈발하기로 유명하다.
관현악단이 연주한 ’도나우강의 강물‘은 등대 직원과 그 가족들을 기쁘게 했는데 특히 이학사의 독창 ’섬 아가씨‘는 큰 갈채를 받았다. 집에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 나서 못 견디던 일행은 정성껏 마련된 환영 파티에서도 식사를 하는둥 마는둥하고 철수, 오후 3시 반 섬을 떠났다. 일행의 부재중에 갑판 위에서 낚시질을 하던 사람은 둑중개, 붕장어 등 십여 마리를 낚았다고 의기 양양해 했다.
대개 기차나 기선이나, 석별의 정경이란 어쩐지 섭섭한 법인데, 지금 광성호가 하조도를 떠나면서 등대와 이별할 때처럼 미친 듯이 소란한 장면을 과거에 본 적이 없다.
처음에는 서로 손수건을 수기로 이별의 인사를 나누었지만 관현악단이 섬사람들에게 나팔을 불자 섬에서는 무적을 요란하게 울리면서 답하는 식으로 그 떠들썩한 이별의 풍경은 필설로 다할 수가 없다. 요란하게 석별의 정을 나누었던 하조도 등대원은 다음과 같다.
수석 : 가메로 요시테루(龜井 義揮) 처자 2인
간수 : 나카지마 아오처 처 1인
간수 : 도쿠다 아키라(德田 明)
조수 : 하마다 미루노(濱田 實) 처자 3인
용무원 : 김호일(金好日) 처자 4인
Ep 11 사이토(齋藤 實) 총독이 방문 했던 자지도(者只島)
자지도 등대는 우리가 흔히 ’항문도 등대‘라고 부르고 있는 등대이다. 1932년 6월 24일 사이토 총독(5대 총독)이 금강호를 타고 목포 앞 바다의 다도해를 순시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사이토 총독은 대흑산도, 완도, 나로도, 항문도 등의 섬들을 순시하고 나서 항문도 등대에 들렀다. 이런 일은 역대 총독 중 사이토 총독이 처음이었다. 더구나 사이토 총독은 등대 직원과 그 가족들의 불편을 고려, 여러 가지 신경을 쓰는 등 성의를 다하여 위문을 한 것이다
이러한 벽지 등대를 총독이 직접 순회하면서 위로하는 모습을 본 것은 항문도뿐 아니라 한국 등대 역사상 대서특필해야 할 영광으로 직원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눈물겨울 정도로 감격한 것이 결코 무리가 아닌 당연한 일이다.
광성호가 다음 위문 등대인 자지도에 접근할 무렵 파도가 거칠어져서 오후 6시 반에 자지도의 뒤쪽에 정박했다. 약 3,000평의 뒷산 언덕길을 넘어야 했기 때문이 의지가 약한 사람들은 ’사양하겠어‘하고 꽁무늬를 뺐지만, 대장격인 가토 소장이 ’젊은 사람이 그래서야 쓰냐!‘하고 질타하자 맥없이 일행의 뒤를 따라 땀을 흘리며 겨우 등대에 도착 했다.
등대 정면에는 1909년 2월 24일 조선 의병들( 편집자가 문구 수정 : 원문은 폭도들)의 습격을 받아 참살된 등대 직원의 순직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비문은 대한제국 탁지부 차관이며, 통감부 참여관 아라이 겐타로(荒井 賢太郞)씨에 의해 건립되었다.
그 후 일행은 등대 직원 부인들이 손수 만든 양갱을 맛보았다. 관현악단이 연주를 시작하기 직전, 이미 황혼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일행 중 몇 명은 어둠 속에서 산길을 넘어야할 것을 걱정한 나머지, 등대 직원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살금살금 등대에서 내려가 버렸다.
이 등대에는 무선방위 신호소도 설치되어 있어 기선회사가 신청한 소속 선박의 통과를 발송해야 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많은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수원 : 쓰노다 겐조(角田 建三) 처자 2인
간수 : 시모모토 나오키요(下原 直淸) 처자 3인
와타나베 마사오 (渡辺 政雄) 처자 3인
무라카미 간이치(村上 貴一)
사쿠라이 다케시(櫻井 武志)
조수 : 호노 히데오(輔野 秀雄) 처 1인
용무원 : 고명옥(高明玉) 처자 4인
’천국과 지옥‘, ’푸른 소나무‘ 2곡을 연주한 관현악단과 목포 위문단의 일부는 마치 후지산에서 몰이사냥을 하는 것처럼 횃불을 몇 개 들고 밤 9시 등대에 작별을 고했다.
일부러 언덕을 넘어 바닷가까지 일행을 전송해 준 등대 직원들은 횃불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자 일행 중 무라카미씨가 어디서 가져왔는지 불꽃을 3발 쏘아 올려 횃불에 화답했고, 일행은 우레와 같은 갈채를 보냈다. 이별이든 무엇이든 상대방이 기뻐하기만 하면 위문의 목적은 달성한 것이라고 모씨는 시치미를 떼었다.
선실에 들어온 김용진씨의 말에 의하면, 이 자지도는 천선재(千善才)씨의 개인 소유로 섬의 농민들은 모두 천씨의 소작인. 소작인들은 토지를 자기 소유 로 만들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으로 보고 몇 번인가 천씨와 교섭 1만 2000엔에 양도하여 주라고 요청했지만 천씨는 1만 9000엔이 아니면 팔지 않겠다고 거절하여 소작인들이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김씨는 ’당신들이 그렇게 자작농이 되고 싶다면 2,000엔이건 3,000엔이건 현금을 마련하여 목포의 재산가 천씨에게 간청해 보는 것이 어떤가. 당신들이 만족할 만한 방안은 얼마든지 있으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지주 대 소작인‘이라는 사회문제에 대한 이야기꽃이 피었다.
광성호는 10시 반에 소안도 앞 바다에서 임시 정박했다.
날이 새고 16일 오전 5시 광성호는 햇살을 받으며 닻을 올리고 해남군 송지면 통호리의 피서지로 일약 유명해진 해안에 접근을 시도했으나 수십 정 거리에 이르렀을 때 암초에 부딪혀 수심이 7m인 지점까지 물러났다. 사하쿠 학사는 친구가 이 근처에 머물고 있으므로 당분간 자기도 여기서 휴양하겠다며 혼자 하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