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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시인들> 24.정대영1

작성일 : 2026.03.15 09:01 수정일 : 2026.03.23 08:16

부산의 시인들

 

 

24. 정대영 1

1994년쯤인가, 그때 집에서 전화를 받게 되었다. “박홍배 선생이세요? 나는 정대영이라는 사람인데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정대영 시인과의 다시 만남이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근 십 년 넘게 이어졌다. 정시인과는 80년 입학 동아대 국문과 대학원 동기였다. 그때도 하반신 장애가 있었다. 소아마비는 아닌데 절뚝절뚝 걷는 모습이 늘 불안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어 다리 마비가 서서히 오고 있었던 것이다. 청년 시절에는 운동도 잘하고 건강한 분이어서 예쁜 동료 여교사와 결혼도 할 수 있었다. 결혼 후 딸 하나를 낳고 학교를 영도의 남여상으로 옮겼는데 그때부터 다리 마비가 오기 시작했다. 마침 딸아이가 초등학교를 들어갈 무렵 우리와 만났고 만나던 그해 그만 딸아이를 잃고 말았다. 그때 집에 조문을 가서 본 정시인의 슬퍼하던 모습은 정말 예사롭지가 않았다. 딸아이의 죽음도 정시인이나 그의 모친처럼 몸에 마비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다른 이들에 비해 딸아이는 일찍 죽음에 이를 정도로 증세가 심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정시인은 하반신 마비로 고생은 했지만 열심히 공부도 하는 것 같았고 우리 대학원생끼리 자주 어울려 주경야독의 고충들을 털어놓으면서 술잔도 기울이고 했다.

정시인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학교를 구덕고등학교로 옮겼는데 그때부터는 다리 마비가 허리까지 올라와서 결국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그에게 모든 것은 절망뿐이었다.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하지만 자존심 강한 정시인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나다니지 않고 방안에만 갇혀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국어선생으로서 학생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본인이 직접 시를 써서 1978현대시학초회 추천으로 시인까지 꿈꾸고 있었지만 모든 것이 의미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마치 자신이 아프게 된 것이 밤낮없이 파고들었던 시 때문이라는 생각까지 들더란다. 그래서 방안에 갇혀서라도 신문쪼가리 하나라도 활자화된 것은 보지 않겠다 다짐하고 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목각 취미도 잠시뿐 그냥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 생활을 보다 못한 정시인의 부인이 어디서 구했는지 이충기 시집 기다리는 나무를 방 이불장 위에 몰래 올려놓아 두었다. 절대 시를 가까이 하지 않겠다던 정시인이 그날은 이상하게 그 시집을 들게 된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말할 수 없는 충격에 빠진다. 바로 자신의 이야기를 이 시인은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장애인으로서 자신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지만 이렇게 자기 이야기를 해내고 있다. 단번에 팔십 몇 편의 시를 읽어 내려갔다.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시집 맨 뒤의 해설란에는 박홍배란 이름이 있다. 대학원 동기란 것을 알고 며칠을 고심하다가 출판사에 필자의 전화번호를 알아 전화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연산동의 어느 음식점에서 만났다. 그런데 정시인의 외출은 보통 사람들의 나들이보다 복잡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무거운 몸으로 휠체어를 타고 내리고 차에 다시 타고 변 처리할 준비까지 옆에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혼자서 할 수 없다. 필자도 장애인들이 그렇게 복잡하게 움직이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늘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부인의 그 고생에 정말 고개가 숙여졌다. 처음 만나자 정시인은 인사 대신 이런 말부터 했다. “박선생님, 저를 세상과 좀 연결시켜 주세요하는 것이었다. 5년 넘게 방 안에서만 갇혀 살았는데 그 시집을 읽고 깨달았다. 나도 다시 내 이야기를 쓰고 싶고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 자초지종 자신의 지금까지 지내왔던 삶을 눈물겹게 말하면서 도와 달란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판단으로는 힘에 부치기도 했다. 사실 당시에 장애인 이충기 시인을 돌보고 있는 처지라 두 사람을 어떻게, 그렇지만 마음 약한 필자는 그러마고 쉽게 승낙해 버렸다. 그렇게 정시인과의 또 다른 인연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한 주에 한 번 이상씩은 만났다. 집에서 만나거나 아니면 필자의 차로 가까운 데 여행을 가곤 했다. 거기에는 최영철 시인, 배재경 시인 등이 자주 동행을 했는데 어떨 때는 이충기 시인과 같이 동행을 해 송도 어느 바닷가 여관에서 하룻밤 묵고 온 적도 있었다. 정시인의 부인은 식당을 운영하기 때문에 자주 참석할 수 없어 필자가 주로 궂은 일을 도맡아야 하는데 한 번 나들이 하면 팔이 다 빠질 정도로 힘이 들기도 했다. 정시인은 바둑 두기도 좋아해서 집에 가면 너댓 점을 놓게 하고 한 판 오천 원 바둑을 두기도 한다. 그 모은 돈으로 짜장면, 탕수육에다 소주 한 병 그렇게 점심이나 저녁을 때우곤 했다.

필자와 정시인의 만남은 단순한 편이었다. 집에서 만나면 세상 이야기 아니면 바둑, 한 번씩 외출하면 바닷가나 낙동강을 구경하거나 아는 문인들 불러 식당에서 술 한잔하는 것.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 때 정시인은 시 이야기를 꺼냈다. 등단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78현대시학에 초회 추천까지 받았는데 굳이 등단 절차를 밟을 필요가 있겠는냐, 그냥 시만 열심히 쓰면 된다고 만류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고집 센 정시인의 의견대로 등단 절차를 밟기로 했다. 그동안 써놓은 시들이 수백 편은 넘어 있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기성 시인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혼자서 늘 시 공부를 하고, 시를 쓰고 있었다고 부인이 귀띔을 해 주기도 했다.<박홍배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