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윤일현의 책상과 밥상 사이
작성일 : 2026.03.03 09:19
성실이 어리석음이 되지 않는 사회
/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주식과 부동산 시장의 거센 파고 속에서도 여전히 새벽 다섯 시 알람 소리에 몸을 일으켜 하루를 시작하는 이들이 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거리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가게 셔터를 올리며, 병동의 불을 밝히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익숙한 것은 경제 뉴스의 복잡한 그래프가 아니라 오늘 내가 맡은 일의 무게다. 손에 쥔 것은 화려한 수익률의 계좌가 아니라 정직하게 박힌 굳은살이며, 주된 관심사는 시세 차익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과 마주 앉을 저녁 식탁이다. 이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가장 야무진 기둥이자 보이지 않는 실핏줄이라는 사실이 너무 자주 간과된다.
연일 쏟아지는 아파트값 변동 소식과 단기 투자 성공담은 땀 흘려 번 월급을 초라하게 만든다. 몇 년 사이 자산 가격은 몇 배로 뛰었지만, 임금 상승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통계는 이제 낯설지 않다. 누군가는 코스피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고 환호하지만, 그 숫자의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이들이 체감하는 박탈감은 조용히 사회의 균열을 넓힌다. 더욱이 부의 과도한 집중을 경계하라 말하면서도 뒤로는 특권을 통해 이익을 챙기는 지도층의 위선은 좌절을 분노로 바꾼다. 공정과 정의를 말하는 입과 사익을 추구하는 손이 따로 움직이는 풍경 속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의 삶은 조롱당한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성실함이 미덕이 아니라 ‘순진함’으로 소비되는 사회는 결국 공동체의 신뢰를 잠식한다.
이럴수록 국가의 역할은 무거워진다. 자산 격차가 커질수록 정치는 계층을 갈라 세워 지지를 얻으려는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갈등을 증폭시키는 대신 균형을 회복하는 일, 그것이 공적 권력의 본령이다. 그래서 종종 묻고 싶다. 우리가 언제부터 땀보다 숫자를 더 존중하게 되었는가. 애덤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 말한 ‘공정한 관찰자’의 양심은 시장이 지속되기 위한 도덕적 전제다. 타인의 처지를 상상하는 능력과 정직한 행위가 뒷받침되지 않는 번영은 오래가지 못한다. 지도층의 언행일치와 제도의 신뢰성이 회복될 때만 사회적 신뢰는 다시 살아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투자를 부정할 수는 없다. 위험을 감수한 대가와 자본의 순환은 경제를 움직이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투자 그 자체가 아니라 노동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폄하되는 분위기다. 한나 아렌트는 노동을, 생명을 유지하고 세계를 지속시키는 토대로 보았다.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일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공동의 삶을 떠받치는 힘이다. 숙련 노동자와 새벽을 여는 이들의 정직한 땀이 없다면 어떤 성장의 수치도 공허하다. 노동이 존중받지 못하는 번영은 뿌리 없는 나무와 다르지 않다.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다시 희망을 품기 위해서는 노동의 보상이 삶을 안정적으로 지탱해야 하며, 주거와 교육 같은 기본 영역에서 자산에 따른 과도한 격차가 완화되어야 한다. ‘얼마를 벌었는가’보다 ‘어떻게 살아왔는가’라는 과정의 고귀함을 존중하는 문화가 우리 사회 전반에 뿌리 내려야 한다. 정직하게 일하고 세금을 성실히 내는 시민이 그에 상응하는 공정한 기회와 촘촘한 안전망으로 응답받는 신뢰 구조가 확립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도전은 일부의 특권이 아니라 모두의 권리가 되고, 사회적 연대는 불안을 넘어 확신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자본은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지만, 성실은 사회를 지탱하는 뿌리다. 뿌리가 메마른 나무는 아무리 화려한 꽃을 피워도 오래 버티지 못하며 결국 작은 바람에도 쉽게 쓰러진다. 우리는 투자로 성공한 이를 축하할 수 있다. 그러나 묵묵히 일상을 지켜온 사람에게 더 깊은 존중을 보내는 사회여야 한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일이 시대에 뒤처진 선택이 아니라 가장 품격 있는 삶의 방식으로 인정받을 때 우리 사회는 비로소 흔들림 없는 균형 위에 설 것이다. 정직한 땀방울은 초라함이 아니라 존엄의 표지다. 성실을 조롱하는 사회는 자신의 뿌리를 잘라내는 사회다. 성실이 존중받지 않는 곳에 희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