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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의 건설기행

<박하의 건설 기행> 1.길림성편 /연변

작성일 : 2026.03.01 01:33

건설 기행-중국 지린성 편

연변의 재중동포, 남북통일의 지렛대로 삼아야

박원호 기술사

하우엔지니어링 부사장

다시 연변에 가다

최근 10년 만에 연변에 다시 다녀왔다. 10년 전 분위기와는 모든 게 대비되었다. 그때는 무채색 같은 도시였는데, 이번에는 곳곳마다 오색단청을 입힌 듯이 생기발랄한 도시로 변신한 느낌이었다.

10년에는 두만강 하구 훈춘에서 국제물류 세미나에 참석차 왔지만, 이번에는 연변/백두산 문학기행으로 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코스는 연길, 도문, 백두산 등정으로 대동소이했지만, 그 느낌은 크게 달랐다. 이 글에는 익히 알려진 곳은 제외하고, 엔지니어 관점에서 인상적인 곳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재미교포, 재일교포처럼 이글에서는 조선족대신 재중동포’, ‘연변동포로 표기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 개요

공식명칭 ; 延边朝鲜族自治州

청사소재지; 옌지시

면적: 43,474(남한 면적의 43%)

인구; 2,180,000(2024)

자치구 설치: 1952

민족구성: 한족 60.3%, 조선족 35.4%

시화: 진달래

주요산업; 관광업, 농업, 서비스업 등

주요도시; 옌지, 투먼, 훈춘, 돈화,

룽징, 허룽, 왕청 등

첫째 날-연길(延吉)에서 옌지로!

10년 전에만 해도 이곳은 연변이고, ‘연길이라 불렸다. 그런데 10년 만에 옌볜’, ‘옌지로 말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연길공항 건물 위에는 여전히 延吉연길이라 표기되어 있었다(사진 1참조). 다만 대형 광고판에는 중국의 전통문화인 경극(京劇) 배우의 얼굴과难得有空(놓치기 아까운 기회)’라고 적혀있다. 이 광고의 의도가 뭘까?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고유문화에도 중국화를 심고자 하는 의도가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지 가이드 장걸씨의 말에 의하면, 2년 전부터 초등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가 조선어 교과서 대신 중국어 교과서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런 정책의 변화는 이곳이 조선족 자치주인데도 불구하고, 조선족의 정체성을 흐리게 하는 동시에 중국화를 빠르게 진행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글에서는, 조선족 동포들은 여전히 연변, 연길, 도문이라고 말하는데 한국 사람들이 옌볜. 옌지, 투먼이라 하는 게 못마땅하다고 했다.

 

두만강변에서 바라본 북한의 남양

묶음 개체입니다. 연길 시내에서 점심을 먹자마자 전세버스를 달려 두만강변의 도시 투먼으로 왔다. 예전에는

 

건너편 북한 풍경을 자유롭게 촬영했으나, 지금은 공안(경찰)이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중국인에게는 허용하는데 한국 관광객들에게만 금지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북한 측 입장을 고려해 금지 시늉만 내는 것 같았다. 크게 실망하고는 강변 따라 늘어선 기념품 가게에 들렀는데, 요행히 조선족 동포가 운영하는 가게였다. 그곳에서 모자를 하나 샀더니, 주인장이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건너편 북한이 바로 남양시랍니다. 이 건물 옥상에 올라가 구경하세요!”

공짜로요?”

그럼요! 방금 모자 사셨잖아요. 다만 조용히 구경하세요!”

 

조선족 주인장의 선심 덕분에 가까이 있던 일행과 옥상에 올라갔다. 그곳에는 망원경이 두 대나 설치되어 있었다. 남양역 김일성 부자 초상화 바로 아래는 남양역글자가 있었고, 역사 우측으로는 5층짜리 연립주택 강변을 따라 나란히 열대여섯 동이 서 있었다. 그 앞으로는 투먼에서 남양을 연결하는 교량 두 개가 놓여 있다. 하지만 교량 위에는 사람도 트럭도 전혀 다니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묶음 개체입니다. 둘째 날-얼음장에 덮인 백두산 천지

이도백하는 백두산의 관문 도시로, 왕조호텔은 상상 이상으로 좋았다. 저녁 식사 후 노천온천에서 온천욕을 하며 피로를 풀었다. 그 바람에 여행 첫날 밤은 곤하게 잘 수 있어서 좋았다.

이른 아침 7시 반, 호텔을 출발하여 백두산 등정에 나섰다. 호텔에서 무려 50분을 달려 주차장에 도착했고, 다시 그곳에서 셔틀버스로 갈아탄 뒤, 20여 분 달려 백두산 아래 주차장에 내렸다. 천지에 오르는 길은 2코스인데, 먼저 단거리 코스를 택했다.

내심으로 고진감래(苦盡甘來), 성스러운 천지를 보려면, 등정 과정에 땀깨나 흘려야 하는데, 10분 남짓 만에 천지를 본다는 게 백두산 산신령께 미안하기까지 하다.

10년 만인데도 놀라운 사실이 따로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백두산 천지가 꽁꽁 얼어있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0년 전에 왔을 때는 8월 말이라 천지는 하늘 구름이 비치는 호수였기 때문이다. 천지 아래 마그마가 들끓고 있다는데 어떻게 천지에 얼음이 얼 수 있단 말인가? 얼음장에 덮인 천지를 보니, ‘백두산 화산 활동설은 연구자들의 허풍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도백하의 아침, 그리고 일송정 답사

뒷날 새벽, 커튼 틈 사이로 훤한 빛이 새어 나왔다. 커튼을 젖혔더니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시계는 새벽 4! 마치 북유럽의 백야 현상 같았다.

새벽 5시 반, 호텔 로비에 일행이 모였다. 호텔을 빠져나와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볼 요량으로 대로변으로 나섰는데 지나가는 택시가 우리 곁에 서는 게 아닌가.  즉석에서 택시를 타고 미리 검색해 둔 진달래광장(杜鵑廣場)으로 가자고 했다. 그때 이후, 아침 시장, 미인송 조각공원, 웬딩 시장골목(云頂市集) 등을 돌아보았다. 특히 웬딩 시장골목에 갔더니, 한류상품 전시관이 따로 마련되어있고, 한국 음식점들도 즐비했다. 조선족들의 한국 사랑이 절로 느껴졌다.

다음으로 일송졍(一松亭)을 찾아갔다. 일송정은 선구자노래에 나오는 정자로, 일제 치하 만주의 독립군들이 이곳 일송정을 비밀통신문의 교환 장소로 이용했다고 한다. , 상대방이 몰래 일송정 소나무 아래 연락사항을 묻어놓고 가면, 다른 상대가 이곳에서 통신문을 찾아 작전에 반영했다고 한다. 일송정은 지린성 소재, 용정시 비암산에 있다.

우리 일행은 비암산관광단지에서 전동차를 타고, 일송정까지 갔다. 그곳에 갔더니 화강석 비석에 一松亭이 새겨져 있는데, 가운데 나무 계단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입구 양측에 세워진 자연석 비석의 비문은 매끈하게 뭉개져 있었다. 추측하건대, 조선족자치주에서 일송정에 얽힌 유래를 새겼을 텐데, 그 내용이 일제하 중국군의 항일 활동을 배제한 내용이라 중국 정부의 방침에 거슬렸던 것이다.

처음엔 일송정 비석이 본래 일송정이었던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비탈진 산길을 2km 남짓 걸어갔더니, 높다란 언덕 위에 팔각정 정자가 나타났는데, 그곳이 바로 일송정이었다.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하략)”

일행은 일송정 위에서 해란강과 용정을 굽어보며, 일제히 그곳에서 선구자 노래를 합창했다.

 

생기발랄 도시 연길의 5가지 요소

연변은 10년 만에 몰라보게 변했고, 그 변화의 중심에 연길이 있다. 10년 전 첫인상을 사람 얼굴에 빗대어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온통 마른버짐이 퍼진 소년의 얼굴이었다면, 지금은 생기발랄한 처녀의 얼굴같다. 연변의 변화를 이끈 도시, 그 중심에 연길이 있다. 지난 10년간 발전의 5가지 원인을 정리해 본다.

 

첫째, 부루하통하 강변 재생과 친수공간 조성

부르하통하(布尔哈通河)‘는 연길의 도심을 흐르는 강으로, 두만강 수계의 2차 지류인데, 총길이는 30km가 넘는다. 이 강을 따라 산책로가 잘 가꿔져 있다. 마치 서울의 청계천 느낌인데, 강폭이 넓은 곳은 한강 느낌도 난다. 지난 10년간 대대적인 정비사업을 벌인 끝에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하천으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강 양측으로 산책로·자전거도로·조경 등이 조성되었다. 자연 친화적 공간과 문화예술 시설이 어우러져 시민과 관광객 모두에게 여유롭고 쾌적한 휴식처로 거듭났다.

 

둘째, 도시 공원과 녹지 확장

연길 곳곳에 녹지공간이 수두룩하다. 대표적인 곳으로, 인민공원을 들 수 있다. 일행이 투숙한 호텔 부근이라 저녁 식사를 한 뒤 공원으로 나들이를 갔다.

묶음 개체입니다. 밤에 아름다운 도시가 진짜 아름다운 도시다!‘, 일행은 조명이 환한 언덕 위로 올라갔더니, 그곳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다. 얼추 1000평에 가까운 둥그런 백사장이 있고 그곳에는 삼삼오오 어린이들이 모래 장난에 여념이 없었다. 마치 여름밤에 해운대 해수욕장의 분위기와 흡사하다. 우리 일행도 갑자기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셋째, 문화·관광 활성화

연변 나들이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단연 연변조선족 민속촌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 이라고 단오제 축제를 하고 있었다.

무대 규모가 거창할 뿐 아니라, 내용도 다채로웠고, 단체 출연진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처럼 건강하게, 처럼 장수하게‘, ’은 세상의 보물이고, 는 인강의 소망일세

 

단체 출연진들이 들고 있는 오색 현수막의 글씨들이다. 우리나라 풍물패라면 보나 마나 農者天下之大本일 텐데도 농사꾼 대신 건강, 장수 등 개인의 행복을 기원하는 글들이라 재미있었다.

 

옹헤야같은 전통민요는 물론이고, 풍악놀이와 강강수월래를 섞어놓은 듯한 흥겨운 공연도 있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어깨가 절로 들썩여질 지경이었다. 메들리 공연에 취해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지만, 다음 일정이 있어 떠나야만 했다. 후문 쪽으로 가는 동안, 행인들의 옷차림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마치 누가 누가 더 예쁘게 차려입었는가?‘, 한복 맵시 경연 대회를 하는 느낌이었다. 한복의 맵시가 이렇게 아름다운 줄 미처 몰랐다. 경복궁이나 용인민속촌도 아닌, 중국 땅 연변에서 한민족과 한복의 자부심을 느껴보다니! 상상도 못 한 일이라 일햄 모두 싱글벙글 얼굴들이었다.

 

넷째, 연변 발전의 종잣돈

지난 10년간 연변은 몰라보게 발전했는데, 그 발전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여러 가지 원인 중에서도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한국에서 벌어들인 돈이 고스란히 연변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 돈으로 자식들을 베이징, 상하이 등 대도시의 대학에 보냈고, 생활 환경도 현대적으로 탈바꿈을 시켰다.

연변의 조선족 동포들에게 한국은 밉고도 고마운 나라로 불리웠다. 이유인즉, 미운 나라의 의미는, 조선족의 젊은 부모가 한국에 돈 벌러 간 뒤로, 조선족 아이들에게 한국은 부모를 빼앗아 간 미운 나라, 고마운 나라인 이유는 부모들이 번 돈으로 자신들이 대도시 대학에 가서 공부할 수 있게 해준 고마운 나라였던 것이다.

 

다섯째, 고속철 까오티에(高鐵)의 연장

동북3성은 지린성, 랴오닝성, 헤이룽장성으로 내륙에 갇혀있다, 즉 바다가 없기에 아무리 값싸고 품질 좋은 공산품을 생산해도 수출할 길이 없다. 따라서 오래전부터 동북 3성의 숙원은 차항출해(借港出海-항구를 빌어 바다로 나가다)’였다. 그렇다면 항구는 어디란 말인가? 바로 북한의 나선시(나진선봉)의 나진항과 블라디보스토크의 나훗카항이다. 이들 항구로 가기 위한 연변의 도시가 바로 두만강 하구의 훈춘이다. <그림 9>에 보듯이, 중국의 고속철 노선은 지린성의 성도 창춘을 비롯하여, 옌지, 훈춘, 투먼까지 노선이 깔려 있다. 주요 도시들이 역세권으로 인구 유입이 날로 늘어나고, 관광객 유입도 급증하고 있다. 다만 문제는 역세권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대신, 농촌 지방은 인구가 갈수록 줄어든다는 점이다.

 

연변박물관의 아쉬움

산에 산에 진달래, 마을마다 열사비(山山金达莱 村村烈士碑), 연변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처음 만난 구호가 강렬했다. 이 시구는 한족 출신 중국 시인이 연변을 돌아본 뒤, 그 감상을 시로 적은 것이라고 한다. 소월의 진달래만큼이나 이곳 연변에도 봄철이면 산야에 진달래가 만발하고, 마을마다 항일 투쟁으로 인해 순직한 열사들의 추모비가 많았다는 뜻이다.

연변박물관에 전시된 내용들을 보면, 거의 90% 전시물이 일제강점기 항일 투쟁 관련인데, 청산리전투도 봉오동전투도 보이지 않고 무장 투쟁의 영웅들, 예컨대, 김좌진, 홍범도, 지청천 장군 이름 하나 볼 수 없다는 점이다. 하나 같이 중국 공산당과 합 묶음 개체입니다. 동 작전을 벌인 것으로 바꿔 놓았고, 한국전쟁도 항미원조 보위조국‘(抗美援朝 保爲祖國-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조선을 도우고, 조국을 지켜내기 위한 전쟁)으로 도배를 해놓은 느낌이었다. 연변박물관인데도 불구하고, 19세기 후반부터 일제강점기 동안 한반도의 조선인들이 만주로 이주하여 척박한 땅을 옥토로 바꾼 개척사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만 소개해 놓은 점이 아쉬웠다.

 

연변 조선족, 통일의 지렛대인가?

국내 거주 중인 연변 조선족은 2024년 기준, 70만 명에 이른다.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에 1~3년 정도 머물다 간 사람들 또한 50만 명은 족히 될 것이다.

연변과 우리나라 사이, 개인에 따라 애증의 깊이는 제각각이다. 하지만 남북통일이라는 대승적 차원에서 볼 때, 연변 동포들이야말로 남북을 이어주는 다리처럼 소중한 존재들이다.

 

이번 여행에서 새삼 깨달은 사실은 증국 국적의 조선족들, 즉 재중동포들에 대한 재발견이다. 이들은 남북한을 쉽게 오갈 수 있다. 이들을 잘만 활용한다면, 얼마든지 통일을 앞당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지난 10년 동안 연변의 변화는 참으로 놀랄만한 것이었다. 그 변화의 상당 부분은 연변 사람들이 남한에서 땀 흘려 벌어간 종잣돈에 있다고 보였는데, 연변의 발전상이야말로 양국 간 상호 협력의 확실한 증거가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