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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시인들> 20. 이상개

작성일 : 2026.02.15 07:41

부산의 시인들

 

20. 이상개 1

90년대 초 문단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일근 시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만났더니 문예지를 같이 해보자는 것이었다. 필자는 당시 문단 상황도 잘 모르던 때였는데 정시인의 제의에 얼떨결에 승낙을 했다. 문예지를 하기 위해 정시인이 모은 동인들은 이상개, 정순영, 강영환, 최영철, 정일근 시인과 소설가 김하기 그리고 평론을 하는 필자와 최갑진 선생이었다. 빛남출판사는 그때부터 필자의 오랜 아지트가 되어 버렸다. 지평의 문학동인들이 어울린 여러 이야기는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모자랄 만큼 다사다난했다. 서울의 유명 문인들을 불러 행사를 하기도 하고, 우리끼리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그곳 문인들을 만났다. 정일근 시인 취향 주도로, 만나고 먹고 즐기고 하던 우리 동인 시절이었는데 고은, 안도현, 김용택 시인이나 이문구, 현기영, 김형경 소설가들도 우리와 몇 번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 동인의 좌장은 나이가 제일 위인 이상개 시인(1941-2022)이었다. 물론 필자가 이 시인과 가깝게 된 건 그 동인지를 출판하기 위해 후원자를 물색하러 늘 같이 다니면서 소정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거니와 동인들 중 주당의 자격 수준이 비슷하게 맞았던 것도 이유이다. 아무튼 술자리에는 두 사람이 항상 끼어 있었다.

사실 이상개 시인의 출판사는 직원 월급도 제때에 주기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대개 다른 출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소설집은 해성출판사에서 많이 출간했고 전망은 평론집이나 여타 서적들을 그리고 빛남은 시집을 많이 출간하는 편이었다. 주로 이 세 출판사에서 문학 서적을 많이 출간했는데 재정 형편은 모두들 어려웠다. 이상개 시인도 출판사 수입으로는 생활하기가 어려워 사모님이 늘 부업을 하고 있었다. 열심히 사시는 목여사님이라고 우리는 존경과 응원을 보내 드리곤 했다. 그래서 집도 중앙동 출판사 옆의 조그마한 건물 2층 셋집에서 딸 둘과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 빛남출판사가 제법 큰 돈을 만지게 되었다.

1993년 필자의 친구인 전신마비 장애인 이충기 선생이 빛남에서 기다리는 나무라는 시집을 출간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과정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필자가 이상개 시인에게 장애인의 시집이 잘하면 돈이 될 수 있다고 설득하면서 기획출판을 해보자고 제의했는데 이상개 시인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당시 주로 시인들이 자비출판을 하면서 명맥을 이어갔는데 기획출판은 출판사 입장에서 무리라는 것이다. 그래도 손해가 나면 필자가 일부 부담한다는 조건으로 초판 3천 부를 찍기로 했다. 그런데 책이 나올 때쯤 부산일보에 이충기 시집이 출간된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 며칠 전 필자가 당시 문학 담당이었던 김종명 기자를 데리고 이충기 선생을 방문하고 나서였다. 이충기의 형편을 본 김종명 기자가 조금은 특별한 기사를 문화면이 아닌 신문 2면 사회면에 싣게 되고 그 기사가 많은 독자를 감동시킨 것 같았다. 그 기사가 나가면서 아직 인쇄 중인데도 불구하고 시집 주문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사실 서점을 통해 팔리는 것이 정상이지만 개인뿐만 아니라 학교, 교회 등의 단체에서 바로 출판사로 오십 권, 백 권씩을 주문하는데 심지어 3백 권을 주문하는 학교도 있었다. 아마 이충기 선생을 잘 아는 교대 동기가 교사로 있는 초등학교였던 것 같다. 그래서 출판사에서도 인쇄소에 연락하기가 바빴다. 5천 권 빨리 인쇄해 달랬다가 며칠 뒤 다시 만 권, 그 며칠 뒤에는 2만 권 그렇게 10만 부 가까이를 팔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이충기 선생의 후원금도 제법 들어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빛남은 필자 덕(?)으로 떼돈을 벌게 되었다.

그 얼마 후 이상개 시인이 필자 집 가까이서 소주 한잔하자는 전화를 했다. 소주잔을 놓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하는 말씀이 필자 집 근처에 아파트를 하나 마련했다는 것이다. 부산 온 지 수십 년 만에 처음 사보는 집이었다. “이게 모두 당신 공이니 당신에게 가장 먼저 이야기한다.”면서 필자의 손을 꼭 잡는 것이다. 필자도 그저 감격해서 형님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앞으로 좋은 일 더 많을 겁니다.”라고 축하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새집을 구하고 우리 동인들은 집들이를 거창하게 했다. 필자는 내 집 드나들 듯이 자주 들리기도 했고, 마침 집 뒤가 백양산이라 휴일이면 동인들이 함께 등산도 가곤 했다. 그렇게 구한 집이었는데 몇 년 뒤에는 중앙동의 셋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몇 년 반짝하던 출판사 사정이 다시 어렵게 된 것이다. 안타까웠지만 그것이 출판사의 생리, 이상개 시인의 숙명이었던 것이다.

몇 년 전 이상개 시인이 운영하던 주점 한길을 오랜만에 들렀다. 그런데 이상개 시인은 계시지 않고 사모님 목여사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선생님 왜 안 계십니까?”하고 물었더니 요즈음은 건강이 별로 안 좋아 가게에 잘 나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래도 박선생이 왔으니 나오시라고 연락하겠단다. 그렇게 오랜만에 술자리를 마주하게 되었다. 술도 별 자시지 않고 할 말도 별로 없었다. 건강 이야기만 주로 나누다가 따님들 이야기를 물었다. 늘 하는 이야기대로 자식들하고는 남남인 듯 별로 연락 안 하고 지낸다는 말뿐이었다. 딸들이 부모 속 많이 썩혔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딸 중 한 딸의 이름이 빛남이였다. 그래서 출판사가 빛남출판사였는데 자식은 그 부모 사랑의 십분의 일이라도 알았으면 하는 생각을 이전 출판사를 자주 다닐 때부터 하고 있었다. 그날 그렇게 만난 게 이상개 시인과의 마지막이 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박횽배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