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부산의 시인들

부산의 시인들

<부산의 시인들> 18.임수생

작성일 : 2026.02.03 12:58

부산의 시인들

 

18. 임수생

< / 인민을 위해 죽은 혁명가는 위대하다. / 시인은 피로써 / 피의 짙은 아름다움을 위하여 죽는다. / 그 아름다움을 위하여 투쟁하다 죽는다. >

임수생 시인(1940-2016)은 경남 하동 출신으로 1959년 부산 경남 한글백일장에서 지붕이란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는데 60년대 초 자유문학지를 통해 정식으로 등단하면서 부산문단에 자리 잡게 된다. 임수생 시인을 생각하면 앞의 이 혁명철학이란 시가 먼저 떠오른다. 우리 부산 시단에서 투철하게 참여 시인으로 일관한 그의 시 행적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면서 그의 시는 호, 불호의 대표적 시비거리가 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언론계에 몸담으면서 언론의 자유, 펜의 힘을 직설적으로 표현해낸 시들로 인해 사직당국의 문초를 피해갈 수도 없었다. 본인은 그런 그가 늘 자랑스러웠다고 스스로 말한다. <자유의 힘을 위해 투쟁의 깃발을 펄럭일 때/죽음을 초월한 힘의 자유를 기록할 때/펜은 펜으로서의 위력을 발휘한다>고 고백한다. <서푼어치 지식으로/민중을 들먹이는/허튼소리 지껄이는 자여/너는 무엇인가>라고 순수파 시인들의 시를 나무라기도 한다. 이런 정신으로 50년 넘게 시를 써온 임수생 시인이다.

그의 시는 거칠고 직설적이다. 정훈 평론가는 그의 거칠고 직설적인 어법이, 다소 섬세하지 못한 측면에서 야기하는 시적 형상화의 단순함과 비례하여 어떤 절실함을 불러일으킨다면 시인의 목소리는 진실함이 배어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 그의 시는 시적 형상화에는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그 진실성에서 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시가 우리 삶의 더 나은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라면 임수생 시인의 시는 좋은 시가 될 수 있다. 오래전 일이다. 초량의 어느 주점에서 류명선, 강영환, 최영철 시인과 필자가 술잔을 나누다가 임수생 시인 이야기가 나왔다. 필자의 입에서 가벼운 말로 그분 시는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라고 했던 순간 류시인에게 뺨을 한 대 얻어맞고 말았다. 필자도 맞고만 있을 수 없어 둘은 서로 주먹다짐으로 그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었는데, 결국 류시인의 사과를 받아내긴 했지만 정말 떨떠름한 사건이었다. 류시인의 해명에 의하면 임수생 시인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에다 존경하는 고등학교 선배라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시비를 걸어 그만 흥분했다고 사과는 하지만 앞으로 조심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과연 시간이 흘러 임수생 시인의 삶과 그의 시들을 보았을 때 임시인의 가치가 어느 시인 못지않게 괜찮았다는 것이 필자가 느꼈던 그간의 소감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지향점이 있다면 그것은 시인에게서 찾을 수 있는 큰 특징 중 하나다. 그래서 시인은 자유에의 집념이 강한 편이다. 억압과 구속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는 것 또한 시인으로서 책무 중 하나가 되어버린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임수생 시인은 시인의 표상이라 할 만하다. 불만을 표출하거나 나무라는 데는 거리낌이 없다. 주변 환경이나 위아래를 따지지 않는다. 시원치 않게 행동하는 후배를 사정없이 나무라는 광경을 본 적도 있다. 그렇게 임수생 시인은 자유분방한 분이다. 한 번은 임수생 시인과 필자가 통도사 극락암에 명정스님을 뵈러 간 적이 있었다. 명정스님은 극락선원 선원장으로 오래 전부터 필자와 가까이 지낸 사이인데 이분 또한 매사에 거리낌이 없는 분이다. 주지를 오래 역임한 큰스님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데서나 곡차()를 마다않는 분이다. 그날도 주지스님 방에서 곡차를 대접받고 언양까지 가 어느 고기집에서 찐하게 한 잔을 또 했다. 필자가 가만히 보니 둘은 정말 죽이 맞았다. 세상 불만, 위정자들에 대한 훈계, 대중의 위선에 대한 신랄한 비판 등, 그렇게 우리 세 사람은 재미있고 의미있게 극락암 일정을 보낸 바 있다. 물론 그 뒤론 두 분은 서로 만나지 못했지만 필자가 서로를 만나면 늘 하는 이야기가, ‘그 스님 너무 멋졋어’, ‘그 기자 대단하던데하는 칭찬이었다. 지금 모두 이 세상 분이 아니지만 자유분방한 두 분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시인은 가난하다. 가난해야 한다는 당위를 많은 이들이 말하곤 한다. 등따시고 배부르면 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임수생 시인 또한 그런 투의 지론을 자주 펼치기도 했다. 임시인이 자가가 없이 전세로 전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필자가 어느 주석에서 형님은 기자로 오래 생활했는데 어떻게 집도 없습니까?” 농담인 듯 노골적으로 물었다. 대답이 걸작이었다. “돈이란 놈은 내만 피해 다니네. 내하고는 원수지.” 자초지종 설명은 이전에 모아 놓은 돈에다 은행 융자까지 내어 신축할 아파트 하나를 분양 받았는데 그 회사가 유령회사였다는 것이다. 돈 몽땅 떼이고 전세로 전전할 수밖에 없었단다. 필자에게도 그 비슷한 일이 있어 동병상련을 느끼기도 했다. 아무튼 임수생 시인은 가난한 시인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참 시인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계실 때 소주 한잔이라도 더 대접해 드렸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운 마음이다.

<돈 안생기는 시를 뭐하로 쓰냔다/그렇지/정신의 쾌감, 영혼의 불꽃/돈 안생기는 시를 뭣하러 쓰노/돈 생기는 일을 했으면 지금쯤 떼부자/ /시인의 행위는 자유인 것을/자유를 위한 것인 것을/자유 그것인 것을/하지만 돈 안 생기는 시를 뭣하러 쓰노/ 정신의 쾌감, 영혼의 불꽃/시를> (임수생, 시를 뭣하로 쓰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