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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6.01.25 06:36
부산의 시인
17. 박응석
부산 시인들의 출신 고등학교는 다양하다. 물론 부산에서 활동하는 시인이라서 부산에 있는 학교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가끔 외지의 학교 출신들이 부산에 터를 잡는 경우도 더러 있기도 하다. 그런데 술자리 같은 데서는 시인 선후배 상관없이 같은 고등학교 동문이면 문단 동료 이상의 정으로 위아래가 분명하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시인들 중 동아고등학교 출신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물론 필자의 모교인 동래고등학교 외 몇몇 고등학교도 더러 있는 편인데 동아고등학교와는 비교가 안된다. 압도적이다. 우선 보더라도 문단의 중심 역할을 했던 김용태, 강남주, 임수생, 임종찬, 류명선 등이 모두 그 학교 출신들이다. 언젠가 동아고 교사를 지낸 어느 평론가와 이런 대화를 나눈 기억이 있다. “문인 중 동아고 출신들이 왜 그렇게 많은 것 같소?”, “떼거리가 워낙 많은데다 자유로운 학교 분위기 탓 같은데.” 동아고등학교는 주간 야간 합하면 전교생이 다른 학교 배 이상은 되고, 다른 학교 학생이 부러워할 정도로 두발, 교복 등이 자유로웠던 편이다. 오늘 박응석 시인(1939-2016)의 자료를 찾다가 또 박시인이 동아고 출신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전 중앙동에서 더러 어울릴 때 강남주, 임수생, 류명선 등의 성함을 함부로 말하길래 그래도 되나 했는데 같은 동기나 후배였던 것.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아마 동아고 출신 시인들 중 가장 양반은 박응석 시인이 아니겠나.’
박응석 시인은 참 다정다감한 분이다. 필자가 문단에 나온 얼마 뒤부터 중앙동 빛남출판사에 자주 들락거렸다. 빛남에서 출간하는 문예지 ‘문학지평’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주로 거기에 모이는 문인들과 고스톱, 술자리 등의 자리를 함께했다. 벌써 30년도 더 전의 일이다. 빛남에서 고시회(고스톱 치는 시인회의)가 끝나면 바로 주변 술집을 번갈아 술판이 벌어진다. 필자는 그때 출판사와 직장이 가까웠고, 술도 좋아하는 편이라 그들과 자주 어울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고시회에 늘 참가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종종 들리는 부류로 박응석 시인이 있었다. 다정다감하면서 화끈하기도 했다. 술도 잘 사고 말씀도 거침이 없었다. 간혹 자신은 경제과 출신이라 고스톱 점수 계산이나 술값 계산이 빠르다는 농담을 했던 기억도 난다. 당시에는 성적이 뛰어난 학생들이 들어간다는 부산대 상대 출신이어서 더한층 말빨이 섰던 것도 같다. 거기다 196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이어 19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까지 문단 경력을 갖고도 충분히 말빨을 세울 수 있었으니 중앙동 술판에서 박응석 시인의 존재는 우리들에게 늘 흠모의 대상이었다.
60년대 초 이처럼 두 곳의 신문사가 공모한 신춘문예에서 시 부문을 잇달아 통과하여 혜성처럼 나타난 박응석 시인은 황해도 황주 태생으로 부산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성장했다. 등단 이후 『신춘시』 동인, 『신어』 동인, 『石筆』 동인 그리고 『詩와 自由』 동인으로 활동하였는데 50년이 넘는 오랜 시단 활동과는 달리 기이할 정도로 1985년에 낸 시집 『化石 곁에서』가 유일하게 내놓은 박응석 시인의 시집이다. 어떻게 보면 그의 삶이 그랬을 것 같은데 어디에 얽매이며 사는 삶을 거부하는 자유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시에 있어서도 작품을 꼭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없었고 그냥 쓰고 싶으면 쓰고 직장 다니고 싶으면 다니고 아니면 놀고 하는 식이었다. 이건 순전히 필자 눈에 비친 박시인의 모습이지만 김석규 시인도 이렇게 평하기도 했다. “50여 년이 넘는 문필생활을 통하여 어느 문학 단체의 임원을 맡아 지냈거나 그 많은 문학상 하나 수상한 기록이 없음을 볼 때, 시인은 참으로 개결한 삶을 살다 간 우리 시대 선비의 초상이라 하겠다.”
박응석 시의 특징은 크게 장시와 난해시 그리고 저항시로 분류해 볼 수가 있다. < 옛날에 죽은 불길이 거꾸로/ 戒銘처럼 돌 속에서 磁場하고 있다./ 불길 속에는 사슬에 꿰인 불티들이/ 수천만 촉광 잿빛 그리움으로 날고 있다 … > 「化石 곁에서」라는 이 시는 장장 37행의 장시다. 그 밖에 「문제풀이」 같은 시도 47행으로 이루어진 장시다. 아마 60년대 직후 발표되던 시들은 대개 호흡이 긴 시들이 특징이었는데 박응석 시도 그런 시류를 따라 장시가 두드러졌다고 보여진다. 난해시나 저항시 또한 그런 의미에서 6,70년 대의 시류적 특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박응석 시를 김준오 교수는 “초기 시에서는 생경한 관념어의 남발로 현실의 구체성을 확보하지 못했지만 후기의 시 「問題풀이 2」의 <뼈 있는 말은 양쪽으로 날선 시퍼런 칼날>이나 <남도 베이고 나도 베이는 것>에서 보여주는 것은 유신체제 하의 억압적 상황을 점잖게 비꼰다”고 분석하고 있기도 하다. 즉 박응석 시인은 강요된 침묵과 획일성을 요구하는 당대의 시대상황에 대하여 언론의 자유와 다양성의 획득을 위해 저항할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침없이 다정다감한 분, 박응석 시인이 급성폐렴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이상개 시인에게서 전해 들었다. 이상개 시인이 운영하는 <한길>에서다. 정말 형님다운 분이었는데 참 안타까웠다. 저승에서도 동료들과 어깨 으쓱하며(박시인의 루틴) 술한잔 기울일 것이라 생각하고 우리도 술잔을 들었다.
<박홍배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