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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시인들

<부산의시인들> 15.강남주

작성일 : 2026.01.11 05:55

부산의 시인들

 

15. 강남주

 

부산 문화계에는 여러 거목들이 거쳐갔다. 음악계, 미술계, 연극계 등등의 문화판에는 그 실력으로 아니면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또는 대인관계가 원만한 인품으로 거목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처세술이 뛰어나 그런 인물이 될 수 없음에도 거목인 체 나대는 이들도 없지 않다. 올해 작고한 강남주 시인(1939-1925)은 부산 문화계의 여러 굵직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문화인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던 분이다. 필자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인간적으로 그렇게 괜찮다고 인정하는 분도 아닌 것 같고, 대인관계가 원만한 것도 아니고, 실력이야 부산 시인의 고만고만한 수준, 그런데 국립대 총장에다 초대 문화재단 대표 등 화려한 명함이다. 나름 어느 정도 언변은 있었던 것 같고, 겉으로 보이는 친화력도 있었다. 자신의 안일을 더 앞서 생각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태도가 출세의 밑바탕이었다면 그는 분명 거목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 대인관계의 갈등은 지나친 편이다. 그래서 문단 내 한 평론가와의 갈등은 소송까지 이어지고 그것 때문에 문화재단 대표 자리도 자진 사퇴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여기저기 참 말많은 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하는 강시인의 여러 행태들이다.

강남주 시인은 문화계 여러 분야에 나대는 분이라 필자와도 여기저기 걸리는 데가 많았다. 몇 건의 좋지 않은 일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필자가 근무하던 대학과 경성대학의 통합에 강시인이 반대해 결국 통합이 불발된 사건이었다. 양 대학의 책임자들이 통합을 결정하고 우리 대학 교수들은 송별 회식까지 하고 난 뒤였다. 새학기 개학을 며칠 앞두고 필자가 근무하던 대학에서 짐을 쌀 준비를 하는데 통합이 무산되었다는 통보가 왔다. 우리 대학의 이사장이 일방적으로 취소해 버렸다는 것이다. 우리 대학 교수들의 실망은 이마 저만이 아니었다. 후에 이사장 아들인 총장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당시 우리 대학 이사였던 강남주 시인이 연로한 이사장을 설득해 통합을 무산시켰다는 것이다. 아마 자신이 정년퇴임 후에 총장으로 갈 수 있는 대학이 없어지는 데 대한 막음장치였을 것이라는 총장의 견해였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 많은 이들의 희생을 치르게 한 이기적 행태를 그때 강시인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다.

그 외에도 필자의 봉생문화상 수상 심사에서 강시인이 추천한 다른 후보에게 밀릴 뻔한 일도 있었다. 겨우 필자가 수상하긴 했지만 강시인은 자신이 추천한 이가 선정되도록 몇몇 심사위원을 설득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강시인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얼마 전 작고한 필자의 고교 은사도 강시인에게 설득당해 다른 후보를 밀었다고 미안하다며 필자에게 직접 사과하기도 했다. 그리고 통영에서 살고 있는 김보한 시인의 해양문학상 심사 때문에 강시인과 필자의 갈등이 생기기도 했고, 지금은 작고한 연극인 김경화씨로 인해 강시인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일도 있었다. 이래저래 강시인과 필자는 그렇게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느 날 나를 불러 만났더니 필자가 근무하던 대학의 학장(지금의 총장)을 하란 것이다. 이사로서 이사장에게 모든 걸 위임받았으니 필자만 결정하면 되고 본인이 여러모로 도와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데도 필자는 어려운 학교의 여러 여건상 학장의 역할이 뻔해 보였으므로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강남주 시인의 시는 전통 서정시 계열의 시인으로 분류된다. 1972년 시집 海底의 숲을 발간하고 1974시문학에 추천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시인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1976년에는 동인지 목마를 결성, 이후 오랜 기간 그 동인 활동을 중심으로 부산 시단의 중추적 역할을 한다. 목마는 강남주, 원광, 이문걸, 임명수 시인으로 출발해 신진, 조남순 시인 등이 참여하면서 90년대 후반까지 장수 동인지로 자리 잡는다. 목마의 지향점은 쉬운 생활시를 쓴다는 것, 그리고 철저한 인간주의를 내세운다는 것, 그래서 목마는 현실 독자와의 만남을 특히 강조하기도 한다. 90년대 이후 시인과 독자와의 만남이 잦아진 데는 이 목마의 역할이 컸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강남주 시인은 부산지역 동인지들의 활동이 뜸해진 1990년에 신서정의 기치를 내세우며 다시 신서정그룹을 결성한다. 거기에 참여한 시인은 이몽희, 이병구, 배광훈, 정영태로 시작해 강경주, 김형술, 문정임, 임명수, 탁영환이 가담하는데 당시 부산 시단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시인들로 강남주 시인이 좌장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강남주 시인은 학교와 동인 활동에 주로 참여하면서 시인 역할을 충실히 하기도 했다. 그러나 2천년대 이후로 오면서 학교, 조선통신사, 문화재단 등의 일을 맡게 되고 아울러 여러 구설수에도 오르면서 시인 본분을 벗어나기도 했다.

강남주 시인이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약주도 하지 않고, 운동도 많이 하고,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데 생각보다 일찍 돌아가셨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그날 저녁 대학에 같이 근무하던 이들과 술자리가 있었는데 모두들 강시인의 죽음을 그렇게 애도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지은 죄가 컸던가 보다.

꽃잎이 지면 / 화안히 솟아오르는, / 고요의 내부에서 / 화안히 솟아오르는 / 사연이 있다. // 허나 / 그것은 / 지날수록 / 안타까운 / 勿忘의 소리. // 시방도 싸늘해진 / 체온 속에 / 사념은 외곬으로 피어오르고 / 마음은 자꾸 / 비등하려는 것이다 / 비등하려는 것이다.’ (강남주, 里程標)

<박홍배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