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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시인들

<부산의 시인들> 11. 차한수 1

작성일 : 2025.12.14 06:25

부산의 시인들

 

11. 차한수1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1년 후 다시 동아대학 국문과 2학년에 편입했을 때다. 그때는 전임교수나 시간강사의 차이도 잘 알지 못했다. 그냥 다 교수님으로만 알고 있었다. 시간강사였던 차한수 시인의 시와 관련된 강의가 지루하기도 하면서 뭔가 특이한 것도 같았다. 그런데 학기 초 교대를 같이 졸업한 친구와 필자가 차시인과 함께 강의를 마치고 동아대 앞의 주점에서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시 등단을 준비하던 친구와 차한수 시인이 이미 약속한 자리였던 것 같다. 필자에게는 특별한 자리였다. 시인과의 술자리도 처음이고 거기다 직접 나를 가르치는 스승과의 자리는 몸 둘 바 모르는 어려운 자리다. 그 처음의 자리에서 느낀 그분에 대한 인상은 말씀이 좀 어눌하시지만 참 순수한 분이구나 그리고 약주를 참 좋아하시는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분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강의를 그만두고도, 필자가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우연히 한 번씩 만났다. 만나면 두주불사, 술에 많이 취해 집에 들어가곤 했다. 특히 필자가 박사과정에 입학했을 때 동아대 국문과 전임으로 오는 바람에 만남의 횟수는 훨씬 더 잦아졌다. 박사과정 동기인 조의홍 시인과 필자 그리고 차시인은 한 주에 한 번 이상은 술자리를 가졌다. 세 사람 다 주당이라 한 번 마시면 어떨 때는 소주병이 근 스무 병이 된 적도 있다. 우리에게는 어딜 가나 술자리였다. 하단 대신동 자갈치 중앙동의 술집들은 말할 것도 없고 차시인 댁이나 조의홍 시인 댁 필자의 집까지, 심지어 남해나 삼천포 등 우리들의 고향을 여행하면서도 술집부터 챙겼다. 그렇게 우리 세 사람의 주당 행렬은 필자가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까지 이어졌다.

차한수 시인은 약삭빠르지 못하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데도 좀 둔한 것 같다. 술이 들어가면 하고 싶은 말씀들을 하시지만 술 없이는 도통 말씀이 없다. 그런데 눌변이라 취중에 하는 말도 실수가 있다. 그것 때문에 조시인과 필자는 주석에서 더러 상처를 받기도 했다. 당연히 필자와 조시인 둘의 자리에서는 차한수 시인이 술안주가 되어 씹히기도 한다. 동아대 국문과 홍양추 교수가 돌아가셨을 때다. 당시에는 빈소를 주로 고인이 살던 아파트에 차리는데, 그 아파트의 옥상에서 돗자리를 펴놓고 국문과의 교수, 대학원생 등이 술자리를 가지고 있을 때다. 마침 다른 곳에서 술에 많이 취한 필자와 가까운 친구인 문학평론가 최갑진 선생이 문상을 하고 우리 자리에 앉았다. 그때 차한수 시인과 최선생은 별로 아는 사이가 아니었는데 술에 좀 취한 차시인이 최선생에게 기분 나쁜 말로 시비를 걸었다. 인사를 바로 하지 않는다는 투였다. 가만 듣고 있던 최선생이 갑자기 일어서더니 몇 마디 욕설과 함께 차시인의 머리를 그대로 발로 차 버렸다. 주변 사람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큰 싸움이 될뻔한 동아대 국문과의 재미있었던(?) 일화 중 하나다. 사실 그다음 날 최선생과 필자가 만나게 되었는데 전날 있었던 일을 전혀 모를 정도로 술에 많이 취해 저지른 실수였다. 그 뒤 차시인께 용서를 구하러 가느라 최선생과 필자가 서너 번은 광안리 차시인 댁을 방문했을 것이다. 겨우 용서를 구하고 셋이 어느 포장마차에서 어깨동무까지 해가며 술 마신 기억이 난다.

차시인과 조시인 필자가 술 마실 때면 당연한 듯 계산은 조시인과 필자가 돌아가면서 한다. 차시인은 술값 계산하는데 아주 인색하다. 그것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데 약한 일면이다. 사실 거의 계산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경제적 여유는 셋 중에서 제일 낫다. 사모님이 초등학교 교장이었고, 민락동에는 해변가에 몇 층짜리인가 건물도 있다. 우리말로 재벌이다. 그래서 그 짠돌이 인품도 조시인과 필자의 술안주거리가 되곤 했다. 한 번은 필자와 아동문학가 조명제 선생과 차시인이 광안리 어느 술집에서 한잔한 적이 있었다. 조선생은 필자와 같이 근무한 적이 있는 친구이자 차시인에게는 부산상고 제자이기도 하다. 술이 거나해지자 필자가 큰맘 먹고 차시인에게 오늘 계산은 교수님이 하십시오했더니, 대뜸 너희가 나를 불렀는데 왜 내가 계산을 해하시면서 거절하시는 거였다. 그러자 필자가 지금까지 교수님께서 저희를 불러놓고도 늘 우리가 계산하지 않았습니까하고 술취한 김에 시비조로 나가버렸다. 이어 차시인의 언성이 높아지고 약간의 다툼으로 번지다 다시는 보지 말자고 헤어졌다. 좀 후회되기는 했으나 한편으론 후련하기도 했다. 그날 술값은 결국 조명제 선생이 치렀다.

그런데 그 얼마 후 차시인이 일본에 3년간 교환교수로 가게 되었다. 일본으로 가기 전날 차시인과 조의홍 시인 두 분이 한잔하면서 필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다. 다음날 새벽 조시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일본 가시는데 제발 전화라도 한 통 하라는 것이다. 신신당부에 못 이겨 차시인에게 전화를 했다. ‘정말 죄송하다, 앞으로 조심하겠다, 건강하게 잘 다녀오시라등의 내용이었다. 그렇게 그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교환교수를 끝내고 다시 돌아와서도 필자와의 관계는 이전 같지 못했다.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인가 조시인과 함께 수영 어느 낙지볶음집에서 식사한 게 마지막이었다. 암 수술 뒤라 건강이 많이 좋지 않아 보였고 말씀도 없으셨다. 좀 건강해지면 만나기로 했는데 부음을 접하게 된 것이다.

<박홍배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