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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5.12.08 11:19
부산의 시인들
10. 김상훈3
‘살구꽃 피는 마을 / 피는 꽃이 저리 곱다 / 피는 꽃 그 너머로 / 지는 꽃도 어여쁘다 / 목숨도 오가는 날이 / 저리 꽃길이고져’ (김상훈, 「행화촌」 전문)
민락동 어느 횟집에 아직 이 시화가 걸려 있는데 필자의 고향 마을에 살구꽃이 많이 피어 특히 필자가 좋아하는 시다. 김상훈 시인(1936-2016)이 이 꽃길을 따라 간 지가 벌써 십 년이 다 되어 간다. 그는 언론인보다는 진짜 시인이 되고 싶었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필자와 거의 함께 지내던 돌아가시기 전 몇 년 동안에는 화려했던 언론인 시절보다는 늘 문사들과 어울려 다니던 대구나 서울 시절의 이야기를 더 많이 떠올렸다. 그 이야기에는 김원일 조병화 등의 이름도 들어 있다. 두주불사, 마치 ‘명정사십년’에 나오는 주당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이 술 이야기가 많았다.
김상훈 시인은 사실 문학인으로는 부산에서 크게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대구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등단 시절부터 함께 한 문인들이 그 필력을 인정해 주었기에 그냥 시인으로 충분히 통했다. 필자가 그의 사무실을 정리할 때 조그만 통 하나를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그분의 젊은 시절 상장들이 여러 장 말려 들어있었다. 아주 오래된 상장이라 잘못하면 종이가 부서질 것 같은 것들이라 조심히 살펴보았는데, 대개 이런 상장들이었다.
‘상장, 시부 입선, 김상훈, 단기 4288년, 학도호국단 주최 문예현상모집, 대구사범 학도호국단장’ / ‘상장, 본선 차상, 김상훈, 단기 4292년, 개천절 경축 제3회 전국백일장위원회 위원장 이재학’ / ‘상장, 시 1등, 육군 상병 김상훈, 단기 4293년, 6.25 제10주년 기념 문예작품 현상모집, 육군참모총장 최영희’ / ‘상장, 시조 당선, 1967년, 신춘문예, 매일신문사 사장 김영호’
이런 상장으로 볼 때 이미 대구사범 다니던 고등학교 때부터 출중한 문학적 역량을 인정받고 있었던 것 같다. 거기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개천절 백일장 입상은 전국에서 모인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국회의사당 광장에 모여 마치 과거시험 치르듯이 경쟁한 대회인데 장원 없이 차상에 뽑혀 이재학 국회의장에게 직접 상을 받은 그 경력은 어느 신춘문예보다도 나은 등단이었다고 회상했다. 또 하나, 전국의 글 쓴다는 군인들이 다 모인 가운데 벌인 경쟁에서 시 부분 1등을 하고 귀대하자 전부대원들을 모아 놓고 부대장과 함께 열병식을 했다는 재미있는 일화도 들려주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전국의 권위지였던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까지 김상훈 시인의 문학적 역량은 당시 누구에게도 뒤질 바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 상장들은 지금 ‘김상훈 기념관’에 액자로 모두 걸려 있다.
그런 그가 부산일보 논설위원으로 부산에 오게 되었다. 박응석 시인이 필자에게 전한 말에 의하면 당시 이미 부산 문인들은 김상훈 시인의 문학적 명성을 알고 있었기에 헤게모니를 뺏기지 않기 위해 문단에서 다소 소외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산에서는 문인들보다는 대학이나 언론계 사람들과 많이 어울렸는지 모른다. 어쩌면 부산문협 회장 출마는 억눌린 문학적 욕구에 대한 한풀이였을 것이다. 회장이 되고 나서 부산 문단을 부흥시키고자 하는 의욕은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러나 이미 주변 환경은 그가 문학인으로 크게 활동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회장을 맡고 있는 중에 부산일보 사장이 되고 근 10년을 그 일에 매이면서 그의 문학에 대한 꿈은 결실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후 시인 김상훈보다는 부산일보 사장 김상훈으로 모든 이들에게 회자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람 부는 날 / 바람처럼 떠나야지
무거운 짐 다 부려놓고 / 가진 것 다버리고 / 입성도 다 벗고 / 아무 욕탐도 미련도 없이 / 훌훌 가볍게 떠나야지
…
바람 부는 날 / 바람처럼 떠나야지’ ( 김상훈, 「바람처럼 떠나야지」 중 )
“그는 우리 시대의 풍운아였다. 그러나 한 평생 자기를 찾고자 했지만 결국 김상훈은 좌절하고 말았다. 아내도 자식도 떠나고 가까운 사람까지 곁을 떠났다. 김상훈은 삶의 종점에서 아무도 알 수 없는 깊은 시름과 회한을 안고 외롭고 쓸쓸한 최후를 마쳤다.”
가까이 지낸 동아대 정영도 교수가 어느 잡지에 올린 글이다. 그렇게 김상훈 시인은 우리 곁을 떠났다. 장례 기간 내내 필자는 빈소를 지켰다. 많은 이들이 다녀가고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말년의 어려웠던 삶을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이제 그는 오래되어 분양도 하지 않았지만 박노석 시인의 조카 덕분으로 어렵게 구한 백운공원묘지 양지바른 언덕에 잠들어 있다. 마침 한 블록 떨어진 곳에는 청마 시인도 누워있다. 김상훈 시인의 자애롭게 웃는 모습, 넉넉한 인품이 생각나는 요즈음이다.
<박홍배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