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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5.12.08 11:09 수정일 : 2025.12.08 11:12
12. 한국세관공사부 등대국 제1년보 발간 연혁
김민철(공학박사, 항로표지 전공) / 석영국(등대 역사가)
가. 1년보를 연재하며
일본은 을사조약 이후 1905년 11월, 대일본의 메가타 재정고문은 그 때까지 대한제국의 관세사무를 관장해온 브라운으로부터 총 세무사직을 인수하여 재정업무와 관세사무까지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해관을 인수한 재정고문 메가타 는 대한제국의 관세 수입을 식민지 수탈을 위한 항만수축과 항로표지 건설 및 세관시설공사 등에 지출하기로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하여 공사 전문기구로 세관공사부를 만들어 전임 총세무사 브라운이 만들었던 해관등대국을 1906년 3월에 세관공사부로 흡수하였다.
제목에서 한국은 공식명칭인 대한제국이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한국이라고 약칭을 사용한 것은 일본보다 약소국으로 경시한 것으로 보여지며, 표지에 대한제국의 황제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일본의 연호를 사용한것도 대한제국 황제의 권위를 무시하고 일본의 지배권을 과시하기 위해 일왕의 연호를 공문서 등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일본이 1906년 3월에 등대설치에 대한 전권을 이양받아 1906년, 1907년, 1908년간의 등대와 기타 항로표지 건설 사항을 연보 형식으로 1907년, 1908년, 1909년 3년간 발간한 기록이다. 1910년에 한일합병이 되어 그 이후에는 등대보의 형식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등대보 1권에서는 총 5편으로 나누어 기록하였으며, 1편에서는 연혁과 세관공사부의 조직과 직원, 2편에서는 세관공사부 창립 이래 등대 건설의 계획과 신설공사, 3편에서는 1906년말 대한제국의 항로표지의 일람표
와 등대의 등급, 구조, 등질 및 광력의 일람표, 4편에서는 등대 사무와 문서 건수, 그리고 5편에선 회계 관련 사항을 기록하였다.
일본이 기록한 아픈 역사로서, 일부 내용은 일본에 유리하도록 조금 왜곡된 사항이 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등대의 시발과 가장 근접한 역사의 기록으로 등대 역사 탐구에 많은 도움이 되는 기록이다.
나. 1년보에 기록된 등대의 연혁
등대 사업은 메이지 27년(1894년) 28년(1895년) 청일 전쟁에 즈음하여 군함의 통항 상 그 설비가 없음을 이유로 그 필요를 느껴 한국 전 연안에 있어서의 개략적인 등대 건설 위치 및 설비해야 할 등대의 종류 등에 관해 그 측량 및 설계의 조사에 착수, 일본 정부로부터 참모총장과 체신대신이 상의하여, 체신기사 공학 박사 이시바시 아야히코(石橋絢彦)를 한국에 파견을 명하여, 동 기사는 보조원 야마자키 엔조(山崎園藏), 야마나카 츠토무(山中勤) 두 사람을 거느리고 메이지 28년 6월부터 9월에 이르기까지 4개월간 기선 메이지마루(明治丸)를 이용하여 한국 전 연안에 있어서의 항로 표지 건설해야 할 위치 및 설계 개요 등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메이지 34년 (1901년) 5월, 한일무역규칙 정이(井二) 해관세목 등에 관한 피아 양국 간에 체결된 해당 조약 중 '제31관'에 "한국 정부에 있어서 이후 통상 각 항구를 수리하고 및 등대 표지를 건설한다"는 취지에 의거하여 주한 하야시 일본 공사와 한국 정부와의 교섭 결과 한국 총세무사 "브라운"은 관세 수입 중 우선 25만원을 지출하여 설비 자금에 충당하기로 하고, 일본 정부에서 등대 건설에 경력이 있는 기사의 초빙을 하고, 건설의 위치 및 기타에 관하여는 일본 외무성이 상의한 체신성에서 해군성, 항로표지관리소, 일본우선회사 및 오사카상선회사 등의 의견을 청취하여, 한국에서 주요한 인천항로에 등대 5기, 서해안 및 남해안 항로에 9기, 부산항에 3기, 목포항로에 1기, 마산항로에 3기, 동행안 항로에 2기, 원산항로에 2기, 성진항로에 1기 및 대동강 항로에 4기 등 총계 30기로 하고, 이 건설비 개산액은 실로 209만 1천여 엔이나 된다.
그래서, 동년 11월 중 체신기사 공학박사 이시바시 아야히코는 항로표지관리소 기수 야마나카 츠토무와 함께 한국에 파견을 명받고 래한하여 총세무사 "브라운"과 한국연안등대건설의 문제를 가지고 협의하여, 이시바시 기사는 답사한 결과 한국 전 연안에서 항해상 등대 설치가 불가피하게 필요한 77개소를 선정하였으나, 총세무사 브라운은 당시 경비 지출이 다방면으로 많으므로 그 수를 감하여 32개소를 건설하기로 하고 1903년 3월에 해관등대국을 인천 차이나 동에 두고 먼저 인천항로부터 등대의 건설에 착수하고 동년 5월 16일을 기하여 소월미도, 팔미도, 북장자서 및 백암 등 4개소에 등대건설공사를 개시하고 이어서 다음해 4월 동 항로의 부도등대의 건축에 착수하고 그 후 차레로 에정대로 공사의 진척을 보고 소월미도등대 외 3개소는 모두 1903년 6월에 또 부도등대는 다음 해 4월에 처음으로 등대를 점등하게 이르게되니 이것이 한국에서의 등대의 효시이다.
이에 앞서 1902년 12월 중에 이시바시 기사는 병으로 일본에 귀국하고, 다음해 1903년 6월중에 항로표지관리소 기사 아오야마 덴노스케(青山鼎之助)가 교체되어 한국 정부의 초빙에 응하여 래한하였으나, 총세무사 "브라운"은 이미 상하이 해관 등대 고문 기사 영국인 "하딩"에게 등대 건설 기사의 사무를 위촉하여, 전적으로 등대 설계 등을 담당하게 하고 아오야마 기사는 등대 설계 등에 참여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아오야마 기사는 1903년 11월에 해약 하고 귀국하게 되었다.
메이지 36년(1903년) 3월 중, 항로표지관리소 기수 야마나카 이사오(山中勤及) 및 같은 해 4월 중 항로표지간수 세키카와 타다하루(關川忠治) 두 명은 한국 정부의 초빙에 응하여 등대 건축 사업과 등대 감수 업무에 종사하였다.
메이지 37년(1904년) 2월, 러일 양국이 파열하고 일본 함선의 항통상 압록강 방면에 등대의 급설을 느끼고, 해당 압록강 입구에서 안둥현에 이르는 항로에 등대와 부표의 설치가 필요하다고 여겨 같은 해 4월 중 체신 기사 이시바시 아야히코가 해당 공사의 감독으로, 대본영의 촉탁이 되어 한국에 파견되었다.
이시바시는 착임 이래 압록강 항로에 수많은 부표를 정치하고 또한 대화도에 같은 해 5월 등대 건설 공사를 기공하여 같은 해 6월에 그 낙성을 마치고 다음달부터 점등을 하였다.
또 동연 중 한국 서해안 칠발도에 등대를, 동해안 죽동에 등간을, 남해안 거문도에 등대 건축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중 항로 표지 관리소 기수 야마모토 시게사부로(山本茂三郎), 카지야마 유라(梶山由良), 동 38년(1905년) 4월 중 동 소 기수 나카바야시 타쿠신(中林卓信) 3명은 모두 대본영의 위탁 명령에 의해 공사 감독으로서 이시바시 기사의 지휘 하에 등대 건축에 종사하였다.
이후 그 공사의 진척에 따라 거문도는 1905년 4월, 죽도는 같은 해 5월, 칠발도는 같은 해 11월에 모두 준공을 마치고나서 각 등대가 점등을 개시하였다.
기타 일본 해군에서 한국 남해안의 우도 및 홍도, 동해안 울기 및 갈마각의 4개소에 모두 등간을 건설하였다.
한국 정부의 사업으로서 부산항구의 제뢰(鵜瀨)에 계등 입표를 세우고, 고관에 도등을 건설하였으며, 동 1905년 6월부터 점등하였다.
메이지 38년(1905년) 12월 러일 사건의 평화 회복과 동시에 이시바시 기사 및 카지야마, 나카바야시 두 기수는 모두 귀국 명령을 받아 해촉되었으며, 또 야마모토(山本) 기수는 칠발도 등대 공사 감독 중 메이지 39년(1906년) 2월에 병에 걸려, 동년 4월 4일에 인천에서 사망했다.
메이지 39년(1906년) 2월 항로표지관리소 기사 다케다 간다로(竹田關太郎)는 한국 정부의 초빙에 의해 내한하여 등대국장으로 취임하고 해관 등대국을 계승하여 세관 공사부 등대국으로 하고 총세무사의 관리 하에에 속하여 등대의 사업을 등대국이 관장으로 하는 것으로 되었다. 여기에 앞서서 먼저 해관 등대국 기사 시마 시게하루 외 수 명의 기술자가 취직이 되어있었지만 장래의 국 업무의 확장을 기하려면 수명의 직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시 동년 4월 중 항로표지관리소 기수 카지야마 유라(梶山由良), 동 기수 타니노 이쿠타로(谷野幾太郎), 동 서기 우에마츠 쇼이치(松正一及) 및 체신속관 미시마 시카노스케(三島鹿之助) 4명을 초빙하였다.
부언(附言) 메이지 38년(1905년) 10월 중 총세무사 "브라운" 사직과 함께 "하딩"의 위촉을 해제하고, 또한 동 39년(1906년) 2월 중에 항로표지관리소 기수 나카야마 츠토무의 초빙을 해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