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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5.12.08 11:05
Ep 7. 제1대 연평도 등대장
/곽춘만 등대장
`다시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 버리고 흐르는 세월 속에 내 청춘이 저물어 가는데 등대에서 보내는 쓸쓸한 심기를 노래 속에 담으며 하루하루의 생활을 하던 중 나는 다시 연평도 등대 근무를 명 받았으니, 서기 1959년 11월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 가는 때였다.
연평도는 경기도 옹진군 송림면에 유인 도서로 북쪽 땅 등산곶이 육안으로도 보이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며, 해주항으로 출입하는 선박들도 보인다. 연평도 해역 부근은 우리나라에서 조기와 꽃게가 제일 많이 잡히는 어장으로 유명하다. 이런 어장의 안전 조업을 위하여 1959년 무인 등대로 점등 운영하였으며, 연평도 등대는 유인 등대로 전환하기 위하여 건축물 및 각종 기계 설치 공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초임 등대장 (1959년 11월 ∼ 1960년 10월) 으로 부임하고 보니 신설 중이라 숙소가 없었다.
직원 정인근, 최정선과 더불어 나까지 3명이 여관에서 유숙하고 교통부 표지과 건축계 허기사, 최기사, 두 분이 현장감독으로 등대 건축 공사(1960년 3월 준공)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공사 업자는 등대원은 자기 발에 때만치도 생각지 않고 본부에서 온 감독자에게는 아량을 베푸는 것이다.
본부 허기사는 “등대장님에게 말씀이지만 저는 경험도 적고 나이도 어리니까 공사 업자가 감독 지도를 듣지않고 마음대로 공사를 진행하는데 어찌했으면 좋겠습니까?” 라고 조언을 구하였다.
그래서 현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다음날 건축 중인 등대원 퇴식소, 동력실 무신호실을 다 조사해 보니 이미 공사는 엉망으로 시공되어 있었다. 벽돌은 건드리기가 무섭게 우수수 모래가 떨어지고 기초를 파보니까 기초도 규정에 어긋나고 어그러져 있으므로 벽돌을 새로 찍어 이중 보강 공사를 하게 하고, 퇴식소는 진흙으로 기분대로 붙혀서 3cm가량 더 두꺼워 내부가 어두워 벽을 긁어내게 하였다. 무신호실은 준공도 하지 않았는데 옥상에 금이 가서 내부의 철근이 다 보여 기둥 6개를 요구하여 육지에서 트럭으로 1차 물품을 갖다가 무신호실 내부에는 철근 기둥으로 보강 공사를 시켜 건물 준공을 보았으나 기계는 아직 설치하지 못했다.
연평도 부락 여관에서 약 4개월간이나 유숙하며 등대에 올라가 감독을 하다가 1960년 2월 초에 준공된 등대 퇴식소(2동)로 숙소를 옮기고 격열비도등대에 가서 살림살이와 가족을 동반하여 임지인 연평도에 왔다.
연일 무신호기, 발동 발전기 설치공사에 착수하여 순조롭게 진행되어 준공하니 무신호기는 에어 탱크(철조 60kg) 5개, 무신호 기계는(CP엔진 Ford사 제작 45HP) 2대, 충전용 발동 발전기는 엔진 BUKM사 제작 23HP, 제네레다 4kw용) 각각 2대씩 설치하여 등대 운영에 만전을 기하게되었다.
신설 등대라 밭이 없어서 채소는 부락 시장에서 사다 먹으며, 직원들이나 가족들까지 힘을 합하여 등대 부지 주변의 부지를 개간하여 밭으로 조성하여 3세대별로 나누어 채소를 심으니, 판매할 정도의 상품은 못 되어도 동절기에 김장 김치로는 자급자족할 수 있을 만큼은 되었다..
등대 직원들은 시간만 있으면 각자 분배된 경작 밭에 나가 보기도 하고, 등대 가족들도 왔다 갔다 하여, 등대 당직에도 자연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등대 가족들의 살림 경제에 도움도 되며 소일하는데 재미와 시간을 헛되이 낭비시키지 않는다는 보람도 있었다.
한때 등대 공사 시공 중에는 업자 측 현장감독의 명칭을 소장이라고 호칭을 하였는데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의 노임 관계를 해주지 못하여 돈 받을 사람들이 섬에 잡아놓고 돈이 올 때까지는 섬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현장소장은 송사 시공 중에는 돈을 잘 쓰고 작은 마누라까지 새로 얻어 살림하면서, 정든 애인 때문에 연평도를 떠나지 못하던 차에 마을 사람들이 섬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니, 현장소장은 애인 관계로 도랑에 빠진 소의 신세가 되어 버렸으나 회사 차원에서 노임을 해결해 주지 않으니 핑계김에 잘 되었다며 계속 머물러 있었다.
등대에는 내가 등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공사할 때부터 이 사람을 가리켜 등대 소장님으로 불러왔기 때문에 등대 공사가 끝난 후에도 부락민들은 그 사람이 등대 책임자로 오인하고 나를 옆에 두고서도 등대소장님하고 부르면 그 사람은 서슴치 않고 대답하는 것을 보니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그뿐이랴, 어떤 사람은 등대 소장이 높으냐 등대장이 높으냐 하는 질문까지 하여 더욱 한심스러운 마음에 웃어 버리고 말았다.
못 난소는 엉덩이에 뿔이 나고, 과일 망신은 무화과가 시킨다고 등대 망신은 빗쟁이 소장이 시키는 것을 참아 볼 수 없었으나 좀 더 참고 있으려니 마음도 올바르지 못하여 지역주민들에게 등대장과 등대공사 현장소장과의 관계 등을 설명해 주고, 지역에 있던 상이군인도 함께 현장소장의 잘못된 행동을 꾸짖어 주는 등의 노력으로 주민들이 등대와 등대장 위치를 헷갈리지 않게 해 줌으로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었다.
이리하여 연평도 등대에서 외롭지 않게 일하며, 등대 공사도 마치고 한가로워졌는데, 한 가지 해결하지 못한 일은 업자 측과 주민들 중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 간에 노임 문제를 정산하지 못한 채, 나는 1960년 10월 27일 선미도 등대로 발령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