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광복80주년에 보는 등대 역사
작성일 : 2025.12.01 07:38 수정일 : 2025.12.01 07:40
11. 세관공사부 등대국
김민철(공학박사, 항로표지 전공) / 석영국(등대 역사가)
이시바시가 러일전쟁 중에 조선에 파견되어 압록강 항로를 측량하고 압록강 내륙수로 약도를 제작하여 부표 및 육표 등 총 38기의 위치를 결정하면서, 러일 전쟁 기간중에 압록강하구에 위치한 대화도에 등대를 설치하고, 조선 서해의 진입항로 입구인 칠발도와 남해안의 관문인 거문도에 등대를 설치하고 점등하였다. 대화도에는 제6등등명기를, 칠발도에는 제1등등명기를, 거문도에는 제3등등명기를 설치하였고 등질은 모두 백색섬광등을 발광하도록 하였다.
서해의 다도해 입구의 중요한 항로 기점인 죽도에는 등간을 설치하였고, 압록강에는 등부표 1기와 부표 9기를 설치 완료하였다.
러일전쟁 당시의 일본이 주도한 등대 건설공사는 일본 항로표지관리소의 기사(技師), 기수(技手), 직공(職工)들이 조선으로 대거 입국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특히 러일 전쟁 중의 등대 설치공사는 대한제국정부의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가운데서 수행되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등대의 관리와 보수라는 명목으로 그대로 눌러 않아, 을사조약 이후 창설되는 세관공사부의 등대국 직원으로 흡수되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통감부가 업무를 개시하기 직전인 1905년 12월 재정고문부 산하에 세관공사부가 설치되었다. 재정고문부는 세관공사부를 설치하면서 전문(全文) 11조로 구성된 「세관공사부 조직 (稅關工史部 組織)」이라는 일종의 내규(內規)를 만들었다. 정부의 정식기구가 아니었기 때문에 관제(官制)라는 용어 대신 조직이라는 모호한 용어를 써서 재정고문부 내부지침으로 정하였다.
세관공사부 조직 내규 증 본 주제와 관련된 조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세관공사부는 총세무사 겸 재정고문의 관리에 속하는 공사 일체의 사 무를 관장함
제2조 세관공사부에는 공무국과 등대국을 둠
제3조 세관공사부에는 다음의 직원을 둠
부장(部長) 1명
국장(局長) 2명
기사(技師) 9명
기수(技手) 30명
서기(書記) 12명
제7조 기사는 상관의 지휘를 받아 공사를 관장함.
제8조 기수는 상관의 지휘를 받아 공무에 종사함.
제10조 공무국에는 공사과와 서무과를 둠.
제11조 등대국에는 공사과와 회계과를 둠.
세관공사부 조직 내규 제2조에 따라 세관공사부는 공무국과 등대국으로 구성되었으며, 공무국은 총세무사 겸 재정고문의 관리에 속하는 토목· 건축공사를 처리하고, 등대국은 등대와 기타 항로표지의 설치와 관리를 맡는 것으로 업무를 분장하였다.
해관등대국이 아직 탁지부 관할의 별도기구로 존치하고 있을 때, 세관공사부에 등대국을 두기로 결정한 것은 세관공사부 설치 시 이미 해관등대국의 흡수를 예정에 두고 있었다고 보여지며, 실제로 해관등대국은 1906년 3월 세관공사부로 흡수되었다.
또한, 공무국에는 공사과와 서무과를 두고 등대국에도 공사과와 회게과를 각각
두고 일반 서무와 회계업무까지도 완전히 독립적으로 관장하는 체계로 운영된 것은, 공무국은 일본 대장성 임시건축부 및 임시 세관공사부의 계열이었고, 등대국은 체신성 항로표지관리소의 산하기구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실제로, 1907년 12월 공무국과 등대국이 각각 탁지부 산하의 독립관청인 임시세관공사부와 등대국으로 개편되는 사실에서 확실히 알 수 있으며, 재정고문부는 세관공사부의 재정관계 업무만 관여 했을 뿐 실제 조직의 운영은 일본 대장성과 체신성 산하의 공사 기구들이 맡았던 것이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세관공사부가 설치된 이후에도 얼마동안 해관등대국은 존속되었지만 해관등대국의 업무를 세관공사부로 차츰 이관함에 따라 그간, 등대국 컨설던트인 하딩의 업무를 대체할 인력으로 1905년 8웧 월본 120만원의 촉탁기사 신분으로 래한한 일본 동경대학 건축과 출신의 건축기사인 이와타 사츠키미츠루(岩田五月滿)를 고용하게 된다. 이와타가 고용되기 전까지 해관등대국의 등대 기술자들은 모두 일본 체신성 항로표지관리소에서 파견된 형식으로 온 일본의 현직 관리들이었으나, 해관등대국에 상근하는 토건기술자로 고용된 것은 이와타 사츠키미츠루(岩田五月滿)가 최초였다.
건축기사 이와타 사츠키미츠루(岩田五月滿)는 1872년 생으로 만학의 나인 27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899년 9월에 동경대학교 토목과에 입학하여 1901년 7월까지 2년간 토목공학을 수학한다. 그 해 9월에 건축과로 전과하고 1904년 7월에 졸업을 졸업한 후 동경포병공창에서 월급 75원의 고원으로 근무하면서 병기제조소 등의 신축공사를 설계 감독하다기 1905년 3월에 사직한 후, 1905년 8월에 33세의 나이로 해관등대국 촉탁기사로 월본 120원에 고용되어팔미도 등 인천 연안의 등대시설을 설계하였다.
해관과의 인연으로 세관공사부, 임시세관공사부 기사가 되고, 1907년 8월 10일에는 통감부 기사로 임명되었다가, 1908년 8월 13일에는 건축소 기사가되고 그 후 건축과 감독 계장으로 보임되었다가 1910년 7월에 한국에서 장티푸스로 병사하였다.
사망후 「건축잡지」에 실린 그의 추도문에는 건축업적으로 “ 거문도, 칠발도, 대화도 등의 등대공사와 인천, 부산, 진남포 등지의 각 세관의 청사, 관사, 창고공사와 탁지부 청사, 경성고등법원청사에 이르는 설계 · 감독 총 691건이 한국 13도에 널리 퍼져”라고 회고하는 것을 볼 때 초기의 등대 건축 설계 감독 이외에도 세관의 건축공사와 관영 건축공사에도 많은 업무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해관등대국의 업무가 세관공사부로 흡수되어가는 과정에서 그 때까지 남아있던 소수의 구미인과 청국인 직원들도 모두 떠나가게되어 세관공사부는 일본인 일색으로 구성되게 된다. 세관공사부의 등대국에는 해관등대국을 흡수하기 이전에 기사와, 기수, 기수보, 등대 감수 등 25명의 직원이 있었고 흡수와 함께 직원의 수는 대폭적으로 증가하여 77명의 직원이 근무하였다..
세관공사부 직원으로 근무한 한국인은 등대국에서 근무한 서기보 1명, 등대감수 조수 4명, 광제호 2등 운전사 1명 등 총 6명이 전부였으며, 세관공사부의 등대국장으로는 1906년 2월 3일 일본 항로표지관리소 기사인 다케다 간타로(竹田關太郞)가 부임하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