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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5.12.01 07:32
Ep 6. 굴 따러 가세
/곽춘만 등대장
1957년 인천항에서 가까운 팔미도 등대(1957년 3월부터 1958년 10월)에 부임하였다.
팔미도 등대는 수도 문호의 관문 등대로서 국·내국인의 방문객이 가장 많이 오기 때문에 등대 내부 시설과 경내 정비 정돈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되었다.
봄이면 화단을 정리하여 여러 가지 꽃을 가꾸는 등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를 찾아오는 국·내국인들에게 앞으로의 등대 발전과 현 위치를 구상하는데, 신경을 기울였다..
팔미도에는 굴이 많이 생산되어 굴을 따러 오는 배들이 날로 늘어 갔으니, 덕적도, 이작도, 영흥도와 인천에서까지 많은 배들이 몰려와 다른 동네 주민을 잡고 자기 자신은 굴을 따고 다른 사람들은 못 따게 하고 또 등대 허락도 없이 천막을 치는 것도 준비해 오는 배도 있는가 하면 서로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하여 저희끼리 다른 섬에서 오는 배들과 옥신각신 싸우는 것이다.
그런 것을 볼 때 무법천지라 아니 할 수 없어 어이없는 일이다. 선장들을 불러 자리 싸움하지 말라고 하니 굴 따러 온 아낙네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시에 도착해 있는 배는 6척, 사람은 약 250명 되는데 해방 후 굴을 따러 팔미도에 입도하는 것을 말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둔 까닭은 어려운 삶을 하는 아낙네들이 불쌍하여 내 버려두었는데, 서로가 좋은 터를 차지하려고 말다툼도 하길래 너무도 심한 듯하여 할 수 없이 그 자리는 아무도 못 내보내고 물이 많이 들어오는 때를 기하여 다른 섬에서 온 배들은 자기가 갈 곳으로 보내는데도 많은 다툼이 있어 주의 깊게 보곤 하였다..
다음부터는 직원을 시켜서라도 굴을 따러 오면 선착장에 배를 대지 못하게 하여 정상을 많이 벗어난 행동은 막았으나 굴을 따서 벌어 개인의 이익이 되는 것이 곧 국가의 이익이라 생각하여 굴 따는 것, 전체를 막을 마음은 없었다.
한편 떼무리(대무의도) 어선 조합장 등 유지급들이 팔미도에 와서 부천군 군수 영감님하고 이야기가 있어 굴 양식을 한다고 하여 생각해 보니 상부의 지시는 아니더라도 개인이 국가 소유인 무인도에 굴 양식을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들의 독립적 생각이며, 등대원은 국가의 공무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들 손에 넣으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어 팔미도에서 굴 양식은 반대하였다.
다만, 굴이 많이 생산되는 섬이니 떼무리 주민까지는 굴 채취 허락을 해주겠으니 그리 알고 일단 팔미도에 굴 따러 오면 허락을 받으라고 하였으며,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팔미도에 국·내의 관람객들이 많이 오니까 관람객들에게 좋은 인식을 시켜 말썽이 생기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라고 설득과 이해를 구하였다.
팔미도 정상을 보니 그때만 하여도 퇴식소(등대 관사)에서 등탑까지 진입도로 주변에 소나무가 많이 늘어서 있는데, 이 나무는 당시 팔미도 등대 등대원 조경호씨와 함께 부임하여 산에 솔씨가 많이 나기에 직원들과 더불어 잡초를 베고 하나하나 가꾼 것이, 지금은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만든 것을 생각하니 새삼 감개무량 하다.
팔미도 등대는 낚시질을 다녀도 반찬거리 하나 잡지 못하는 섬이라, 밭에 심는 채소류로 부식을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하다가 1958년 12월 12일 격열비도 등대장으로 임명되어 다시 옛날에 정든 격열비도를 향하여 아끼고 사랑하는 팔미도 등대를 떠나게 되었는데, 인천지방 해무청 표지 보급선을 탔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 표지선은, 항로표지를 관리 운영하는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항상 무거운 임무를 띠고 항해를 한다고 생각하니 우리나라와 같이 도서가 많은 해양국으로서 해운과 수산의 활발한 움직임이 곧 국가의 경제 부강을 이룰 수 있으며, 이 활동을 뒷 받침해 주는 것이 바로 항로표지 시설이라 아니 할 수 없으며 주간이나, 야간이나, 무중이나, 시계가 불량할 때나 선박의 위치를 정확히 측정케 하고 선박 안전 항해를 가함으로 경제 공익성을 높여 우리나라 해안을 항해하는 모든 선박의 안전 운항에 기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