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광복80주년에 보는 등대 역사

광복80주년에 보는 등대 역사

<광복80주년에 보는 일본이 기록한 등대역사>10. 러일전쟁과 압록강 부표 설치 등

작성일 : 2025.11.24 08:40 수정일 : 2025.11.24 08:43

 

10. 러일전쟁과 압록강 부표 설치 등

김민철(공학박사, 항로표지 전공) / 석영국(등대 역사가)

 

19042월에 러일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일본 해군은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압록강 도하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압록강 하구의 뱃길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했던 상황에서 19044월에 일본군 작전을 총괄하는 참모총장 오야마 이와오(大山巌)는 통신과 교통을 담당하는 체신대신에게 "압록강 입구에 배가 다닐 수 있도록 표지판(등대 등)을 설치해야 하니 전문가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으며, 1904414일에 체신대신 오우라 가네타케는 본 건에 대하여 의뢰하신 취지를 승낙하였으며, 이에 체신기사(고등관) 이시바시 아야히코(石橋絢彦)를파견 조치하겠사오니,이와 같이 회답하나이다.”라고 회신하여 1904416일 일본 육군 대본영은 접수된 회답을 근거로 체신기사(고등관 2)이시바시 에게 정식으로 "출발하라"는 지령을 내린다.

 

이시바시는1904419일 병참총장 남작 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가 참모총장 오야마 이와오(大山巌)에게 보낸 문서에서 대본영 촉탁인 체신 기사 (고등관 2) 공학박사 이시바시 아야히코에게 등대 및 항로 표지 설치를 위하여 약 3개월의 예정으로 한국으로 출장을 명해 주시기를 이에 상신(요청)하나이다.라고 요청하였다.

 

발신자인 고다마 겐타로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실질적인 전략가이자, 훗날 대만 총독과 내무대신을 역임한 일본 근대사의 매우 중요한 인물로서, 당시 일본군 보급과 병참을 총괄하는 병참총감 자격으로 이 문서를 결재하였다. 이러한 자료들은 러일전쟁 수행을 위해 일본군 최고위층(참모총장 오야마, 병참총감 고다마)이 직접 관여하여 한국 연안의 등대 건설을 지휘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증거들로 볼 수 있다.

 

한편 이시바시는 3개월 일정으로 압록강 통항을 위한 항로표지 설치를 위해 19044월에 압록강 하구로 파견되었으나, 체신부에서 대본영 소속으로 변경됨에 따라, 일본 해군의 러일 전쟁 수행을 위한 전략적 목적에서 거문도와 매가도(梅加島, 삼백도)에서 등대 건설을 지휘하는 등 러일전쟁을 위한 등대 건설에 계속적으로 참여한 내용은 다음 문서로 확인할 수 있다.

 

190492일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훗날 초대 조선총독이 되는 인물)가 참모총장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에게 보낸 문서는 에는 대본영 촉탁(위촉직)인 체신기사 이시바시 아야히코는 현재 한국 거문도(巨文島), 매가도(梅加島) 등의 등대건설 감독에 종사하게 하고 있습니다만, 그 공사가 방대하여 도저히 혼자서는 임무를 완수하기 어려우므로, 추가로 항로표지관리소기수(기술자)1명을 파견해 줄 것을 체신대신에게 조회하였습니다.이에 대하여 아래의 자를 파견하겠다는 취지의 회답이 있었으므로, 이에 이첩 하나이다. - 파견자 : 항로표지관리소 기수 1급 야마모토 다케사부로(山本武三郎)라고 기록되어있는 이 문서를 통해 당시 일본군이 한반도 전역(압록강에서 남해안 거문도까지)의 해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등대 설치를 얼마나 급박하고 광범위하게 진행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외교적으로도 일본 외무대신이 주한 일본공사에게 190441일 보낸 문서에는 우리 군대가 전진함에 따라 압록강 하구에 항로의 표식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한국의 등대국에는 진작부터 용암포를 위해 계획한 예비 등대가 있다고 한다. 만약 이 등대를 사용하고 우리가 상당한 편의를 제공할 때는 한국 정부의 부담액 1만원 정도면 준공할 수 있게 됨. 또 등대국에 있는 일본인 야마나카(山中)의 말로는 총세무사 브라운이 승낙하면 곧 착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한국 정부에서 이미 의주 및 용암포를 개설한다고 밝힌 이상 우리 군대의 요구가 없어도 조만간 압록강 하구에 등대를 설치할 필요가 생길 테니, 귀관은 브라운이나 다른 인사와 교섭해서 이번에 그 등대의 건설을 실행하도록 전력을 기울이기 바람.이라고 한 내용 등을 볼 때에는 러일전쟁수행을 위해 일본군부와 외교부에서 합동으로 중요항로에서의 항로표지의 설치를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제국 한국등대국 제1년보에서도 명치 37(1904) 2월 러일 간의 국교가 결렬되어 일본 함선의 항해상 압록강 방면에 등대의 급설(급한 설치)을 느끼고, 해당 강 입구에서 안동현에 이르는 항로에 등대와 부표의 설치를 필요로 하였다. 같은 해 4월 중 체신기사 이시바시 아야히코(石橋絢彥)가 해당 공사의 감독으로서 (일본군) 대본영의 촉탁에 의해 한국에 파견되었다.

 

이시바시가 부임한 이래 압록강 항로에 수많은 부표를 설치하고, 또한 대화도(大和島)19045월 등대 건설공사를 일으켜 같은 해 6월에 그 낙성을 알리고 다음 달부터.이를 점등하였다. 또 같은 해(1904) 중 한국 서해안 칠발도(七發島)*에 등대를, 같은 해안 죽도(竹島)에 등간(燈竿, 등대 기둥), 남해안 거문도(巨文島)에 등대의 건축을 착수하였다.

 

19049월에 항로표지관리소 기수 야마모토 다케사부로(山本德三郞), 카지야마 유라(梶山由良), 19054월에 항로표지관리소 기수 나카바야시 타카노부(中林卓信) 3명이 모두 대본영의 촉탁을 명받아 공사 감독으로서 이시바시 기사의 지휘하에 등대 건축에 종사하였다.

 

이후 그 공사의 진척에 따라 거문도는 이듬해 19054, 죽도는 19055, 칠발도는 190511월부터 모두 그 준공을 알림으로써 각각 점등을 개시하였다.

 

그 외 일본 해군에서 한국 남해안의 우도(牛島) 및 홍도(鴻島), 동해안 울기(蔚崎, 울산) 및 갈마각(葛麻角, 원산) 4개소에 모두 등간(燈竿)을 건설하였다.

 

한국정부의 사업으로서 부산항 입구의 가마우지 여울(제뢰, , 우노세)**에 괘등입표(掛燈立標), 고관(古館)에 도등(導燈)을 건설하여 동 386월부터 점등하였다. 명치 38(1905) 12월 러일 사건(전쟁)의 평화 극복(포츠머스 조약 등)과 동시에 이시바시 기사 및 카지야마, 나카바야시 양 기수는 모두 귀국을 명받아 해촉되었다.

 

2년보에서도 1908년 발간한 등대보 2권에서도 압록강 항로표지에 대하여 설명한 내용에서 러일전쟁 당시 일본 육군이 부표, 가스 부표 및 육상 표지 등을 설치하여 오로지 군사상의 목적으로 사용하였으나, 금년 3월 이것을 본 국()에서 인계받아 관리함과 동시에 더욱 그 발전을 기하고자 한다라고 하였으며, 190712월 현재 압록강에는 가스 부표: 1, 철제 부표: 33, 목제 부표: 6기 등 부표 40기와 육상 표지: 14기 등 총 54기 설치되어 있으며, 1907년에 일부 표지를 추가 설치하였다고 하더라도, 러일 전쟁 당시 많은 수량의 부표와 육상 표지가 설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압록강의 부표는 강 입구에서 동서 양 수도를 거쳐 안동현(安東縣)에 이르는 사이에 설치한 것이며, 또한 이를 보조하기 위해 육상 표지를 사용하였다. 이중 압록ㄷ강 입구에 설치된 가스부표는 '핀치(Pintsch)'식 가스를 점화하는 장치로서 프랑스 제()로서 러일전쟁 당시 오사카 축항사무소로부터 구입한 것이며, 철제이며 지름 6피트의 원추형을 이루고, 해면에서 등화까지의 높이는 12(), 광달 거리(빛이 도달하는 거리)4해리이다. 등화는 적색 부동등(不動燈)이며 60일 주야로 점등을 계속할 수 있다.

 

부표는 철제 및 목제의 2종류가 있다. 철제인 것은 또한 대소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대부분은 인천 철공장에서 제작한 것으로 지름 4피트 내지 8피트에 이르며, 모두 원추형을 이루며, 콘크리트 침추를 사용하였다.

 

목재 부표는 가설적(임시)인 것으로 돛대(mast) 형태를 이룬다. 사슬 대신 철삭(쇠줄)을 사용하고, 침정()으로는 콘크리트(混凝土) 덩어리를 사용한다. 대저 이 강의 항로는 대조(사리) 때 혹은 증수(물 불어남) 등의 때에 모래톱(沙堆)의 신축 또는 변위 등으로 인하여 변화가 끝이 없고, 게다가 중국 배(支那船) 또는 뗏목() 등이 표지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태연히 충돌하여, 부표가 이 때문에 혹은 그 위치를 바꾸거나 혹은 멀리 외해로 떠내려가는 일이 있다. 그 재설치의 번거로움을 실로 감당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불안한 위치에는 가설적인 부표를 설치하여 상황에 따라 고쳐 설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육상 표지(육표)는 요컨대 좁은 수로를 표시하는 것으로서, 장대 끝에 삼각형 또는 '()'자 형태의 목표물을 씌웠으며 모두 목제를 사용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러일전쟁 당시의 대한제국에서의 항로표지 설치는 총세무사 브라운이 계획하고 설치하는 것 보다는 일본 군부에서 전쟁 수행을 위한 지원시설로서 설치를 하였으며, 이시바시 등 체신성의 등대 관련 기술 관리를 일본 군부에 촉탁으로 발령을 내어 러일전쟁이 끝날때까지 군사 지원 기술을 제공하도록 하였다.

 

또한, 러일 전쟁 수행을 위해 설치가 긴급한 압록강 부표 뿐만 아니라 대화도, 칠발도에 긴급히 등대를 설치하고 점등을 하였고, 군함의 작전상 필요한 중요항로인 죽도, 우도, 홍도, 울기 및 갈마각 등에 등간(燈竿)을 건설하고 점등하면서 대한제국과 협의없이 항로표지를 임의로 설치하고, 관보게재나 항로고시 등의 절차를 이행하지 않았다.

 

등대 설치와 관련한 기술자 역시 일본 체신성의 직원 외에도 해군의 기술진을 투입하였으며, 일본의 여러 기록에서 당시 투입된 일본인 기술자의 기록을 보면 19045월에는 해군 기술자 이노우에 사토시에게 등표 설계를 수행하게 하였고, 190410월에 조선의 등대 건축 관련 업무를 총괄하게 하였으며,

 

190411, 야마네(山根)기사는 부산 등표소 근무를 명받았으며, 19056월에 항로 표식 사무 담당자로 임명되었다. 190510월에는 고베상선학교(神戶商船學校) 조교수 야마네 다다시(山根忠)를 조선에 파견하여 항로 표식 건설에 종사하게 하였다.

 

19054, 일본인 의용군이 조선 서해안으로 진출함에 따라, 감리소 기술자 야마네 다다시((山根忠)는 그해 4월 중순에 조선 서해안으로 파견되어 군산·목포·제물포(인천)의 등대 건설을 담당하도록 하였으며.

 

그 결과, 19056월 중순에 군산등대를 완공하고, 7월 중순에 목포등대 완공,하고, 8월 중순에 제물포등대를 완공하였다.

 

19056년 일본 본국의 아타미등대장(熱海燈台長)과 가와이 기사(河井技師)를 조선에 파견하여 군산, 목포, 인천 등 3개의 항구에 대한 등대 설치에 대한 완공 검사를 실시하였다.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으로 대한제국 탁지부고문으로 일본인 메가타 다네타로(目貫田種太郎)가 취임하면서 맥리 브라운은 사임 압력을 받았으나, 조선 해관의 전권을 가지고 있던 그는 일본의 사임 압력에 버티다가 1905827일 일본공사 하야시가 조선정부에 해임을 강요하고, 190595일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종전됨에 따라 조선정부에서 1905112일 훈1등 태극장 훈장과 15년분 급여를 퇴직위로금으로 받는 조건으로 19051130일 메가타 다네타로에게 해관 전권을 넘기고 사임함으로서, 이후의 조선의 등대 설치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으로 전권이 넘어가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