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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5.11.10 11:47 수정일 : 2025.11.10 11:50
Ep 3. 한국전쟁과 부도등대에서 고난
/곽춘만(등대장)
1949년 4월 그동안 정들어 가꾸어온 격열비도등대를 떠나 부도 등대로 부임할 때는 아쉬움이 앞선다. 그러나 1948년 3월 내가 격열비도등대 등대장으로 부임하면서 지금까지의 시련은 놓았다.
부도 등대는 인천에서 남서 간 24.4마일 떨어진 한섬으로 인천시 영흥면 외리 산 227번지이다. 인천항 입·출항 항로인 동수도에 위하는 등대는 서해안 항로를 오가는 선박의 연안표지 역할을 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1904년 4월 신설 점등하였다.
등탑 구조는 백색(석회 칠) 원형 석조(화강암) 12.1m이며, 등명기는 제4등급(프랑스에서 제작) 후레넬식 프리즘렌즈 중추 회전식이다. 석유 백열등의 백색 불을 20초를 격하여 10초에 4섬광으로 밝히고 광달거리는 17.5마일이다. 등고는 평균수면에서 40.9m이다. 등탑은 1층에 중추를 감는 중추실(1일 2회 중추를 감아 주면 중추가 풀리면서 등명기가 회전한다.)이 있으며, 철재 주물로 제작된 나선형 계단으로 3층의 등롱실을 오르내린다.
낚시질에 명승지라고 부르고 싶은 격열비도의 고기를 남겨둔 채 부도 등대에 오니 등대의 건물은 건물이 형편없이 되어 있었다. 건물에 유리 한 장 끼워져 있지 않고 실내 마루도 뜯어가 버렸으므로 거처할 수 없는 실정에서 등대 사무실, 동력실, 직원 퇴식소등 보수가 필요한 곳을 인천항로표지관리소에 보고하여 다시 공사를 착수하여 순조롭게 공사를 진행하게 되었다.
이 등대에서 약 20∼30m 지점은 동수도로 수만톤급의 화물선의 중요한 통항로이므로 시급히 등대 시설을 복구하던 중에 북괴가 남침하여 6.25사변이 일어난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중에도 부도등대에 근무하면서 온 바다에 포 소리가 들리고 많은 배들이 남쪽으로 몰려가는 것만을 이상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점점 심해져 가는 포 소리는 주·야 없이 지축을 뒤흔들며, 불안함 속에서 약 1주일이 지나자 지나가는 배 그림자조차 볼 수 없어 마음이 몹시 착잡해지는 심정이었다.
그 당시 등대 보급이 2개월 정도 지연되어 등대 직원들이나 가족들이 보급선에 식량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인천 쪽을 바라보면서 다시 15일 정도 지났다.
어느 날 선창에 범선 3척이 도착하여 반가움과 고마운 마음으로 내려가 보니, 이 배들은 전쟁이 일어나자, 옹진반도에서 섬으로 피신 다니다가 그나마도 지방의 적색분자들 때문에 목포 쪽을 향하여 아래로 내려가던 도중 식수가 떨어져 배를 섬에 붙인 것이다.
뱃사람들은 등대는 피난을 가지 않고 사느냐고 묻는데 3척의 배에는 피난민이 약 150명 정도 타고 있는데, 말을 들어보니 앞길이 막연하기만 하여 맥이 없는 것을 보고 식수와 땔감을 제공해 주고 직원들을 집합시켜 놓고 정부도 남하했다는데 버티어도 식량이 없으니 책임자인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선편이 있을 때 각자 자유행동으로 살길을 찾는다면, 뒷날 다시 복구되면 다시 와서 등대를 지키자. 모든 책임은 등대장이 질 것이니, 모두 피신하라 명령하였으나, 직원들은 입을 모아 가지 않겠다며, 나를 따르려 한다.
사람은 먹어야 사니까 “어서들 살길을 찾아라. 보다시피 등대에는 식량이 떨어져 고도에서는 식량 없이는 더욱 곤란하다. 어서 살길을 찾아 나서라”고 명령을 하여도 등대직원들 모두가 한결같이 우리는 등대장님을 따라 여기에서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보여,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모든 등대 가족들을 모아놓고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고 등대에서 떠나 살길을 찾으라고 안내를 하였다.
하지만, 등대 가족들도 역시 죽으나 사나 등대장님을 따르겠다고 하며, “우리는 등대장님을 부모같이 믿고 있는데 등대장님이 떠나시지 않는데 우리는 등대장님을 따르겠다”고 대답할 때 한편, 고맙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여 어찌해야 좋을지 방도가 생각나지 않고 식량이 없으니 나 자신보다 등대 가족 전체의 생계를 생각하니 앞이 막막하고 난감할 뿐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나, 한 사람의 노력이 없으면, 등대 가족 전원이 절명 당하겠구나. 더욱이 봉급도 2개월이나 받지 못하였으니, 돈도 떨어져 빈손으로 피난으로 접안 한 배 선주들을 찾아다니며, “배를 승봉도에 좀 내려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지금은 선주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배에 탄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어야 된다고, 기다리라” 한다. 그나마도 찬성보다 반대가 많아 그 일마저 성취되지 못하였으나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살아날 기회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다시 승선 인원 중에 활약이 있을 듯한 분을 찾아가 인사들이고 사정을 하니 그래도 말이 통하여 승봉도까지 건너갈 수 있었다.
그때는 승봉도에 가면 해결 볼 줄 알았는데 막상 승봉도에 도착하여 보니, 이곳도 육지와 연락이 끊어져, 돈 가지고도 식량을 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희망을 가슴에 가득 않은 채 무거운 발걸음을 황인덕씨 댁으로 옮겨 우선 숙식처로 삼고 매일 같이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만 보며, 감히 말하지 못하고 부잣집들만 쳐다보고 궁리를 해본다. 이때 덕적면 부면장과 친분이 있었으나 나의 말에 신용하여주느냐, 신용을 해주지 않느냐가 문제가 되어 생각하다 승봉도 리장 천동조씨가 마음씨가 착하고 정직하게 보여 그 집으로 발길을 돌렸으나, 둘이 마주 않아서 말문이 막혀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농주를 들여다 대접을 받고, 부탁할 사항은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다른 이야기만 하고 일어나 나오고 말았다.
다음 날 다시 찾아가면 오늘은 꼭 이야기해 보겠다고 다짐하였으나, 이날은 동네에서 돼지를 잡았다고 또 농주를 내놓아 대접하여 미안한 마음만 날로 더하여 갈 뿐 등대 양식을 원조해 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 다시 찾아갈 때는 몸과 마음이 무거워 발길조차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으나 이 생각 저 생각하며 걷던 중에 그 집 문 앞에 당도하여 기침하고 안으로 들어가 인사를 하니 “곽 대장님 무슨 부탁이 있으신 것 같군요”. “예! 사실은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하고 말을 얼버무렸더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 줄 터이니 말씀해 보세요”.
“감사합니다. 실은 국내정세 관계로 등대에 양식이 떨어졌고 현찰도 없이 맨주먹으로 식량을 빌려달라고 부탁해야 해서, 몇 일간 그 일로 찾아왔으나 감히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지금 쌀은 떨어졌고 보리는 나누어 먹을 만큼 있는데, 얼마나 필요 한가요?”
“나만이 아니라 등대 전원이 먹을 식량입니다. 아무것이라도 좋으니 얼마나 주시겠습니까”? “연자방아가 있으니 찧어서 보급해 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정부가 올라오면 손해 없이 꼭 갚아 드리겠습니다”.
“우선 당장 먹을 것을 좀 주시고 다음에 꼭 가져다 주시지요. 만약 훗날에 갚아 드리지 못할 때는 등대라도 저당 잡지요”. 하고 너무나 고마워서 이런 말까지 하니 “알았습니다. 염려 말고 건너가시오. 꼭 전해 드리리다”. 이리하여 어려운 대화의 고비를 넘기고 나는 밖으로 나와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우선 겉보리 소두 7말을 얻어서 등대로 건너가니 직원과 가족들은 배를 움켜지고 내가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다가 약 일주일 만에 만나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까지 흘리며 반가워한다.
나는 직원들을 모아 회의를 열고 우선 1인당 1홉씩 할당하여 피나무 혼식으로 연명하게 하여 약 20여일 간 지탱 하였으나 소두 7말이 다 떨어지고 승봉리 리장 천동조씨는 마주 보이는 섬이나 전마선 한 척 없으니 교통이 두절되어 어이하랴····
다만 그분이 약속을 어기고 아니 올 분은 아니라는 인품에 기대를 걸고 마음을 안정시키며 기대를 걸고 있던 어느 날 밤 21시경 승봉리 리장 천동조씨가 보리쌀 1가마를 배에다 싣고 동생 분과 함께 왔는데 그간의 경위를 들어보니 이러하였다.
승봉리에서도 급기야는 섬을 버리고 떠나 이 섬, 저 섬으로 피신 다니다가 이날 밤 등대로 올라올 때 그분 역시 등대에 몸을 의탁하고자 식량을 준비하여 가지고 왔다고 하였다.
다음날 날이 밝자 또 다시 옹진반도에서 군, 경, 및 그의 가족들이 함께 섬으로, 섬으로 피란 다니다가 등댓불이 켜지고 낮이면 태극기가 휘날리고 하여 안심하고 등대를 찾아왔노라고 하는데 전체 인원이 약 60명이나 되어 신분을 조사하고 나서 숙소를 마련해 주었다.
그들이 온 지 몇일 안 되어 밤이면 등댓불을 끄고 날이 밝으면 태극기를 올리지 말라고 주장하였으나 나는 그럴 수 없다고 하며 계속 밤이면 등댓불을 켜고 낮이면 태극기를 올려 태연한 자세를 보였다.
내 생각에도 그들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알고 있으나 사면팔방에 괴뢰가 있고 영흥도는 더구나 이승엽이 출생지라는 점, 근처로는 괴뢰의 배들이 왕래할 것이라 감히 들어오지 못하게 여유 있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그대로 밀고 나가기로 하였다.
이 문제로 한때는 협박까지 받게 되어 자못 험악한 공기가 돌았으나 나는 더욱 용기를 내서 나의 자세를 바르게 하고 조직단을 편성하여 등대 내의 60명을 뭉쳐 보초를 서며 생명을 보존하기도 하고 스스로 조직부장이 되고 부단장으로부터 단원 5명을 선출하여 조직단 편성을 하고 모든 식량을 모아 배급제로 하고 주·야 보초를 세우며 날이 잔잔하면 전원이 지키고 바람이 심하게 불어 파도가 거센 날은 보초 1명 외에 전원은 단잠을 자곤 하였다.
이때 태극기를 오래 계속 다니까 바람에 날려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낡아 다다미방 돗자리를 걷어 페인트로 태극기를 그려 매일 달고 등댓불을 한 번도 소등시킨 바 없이 계속 점등하고 비상약으로 병이 난 피난민들을 치료하여 2개월 이상을 지탱하자 다시 식량이 떨어져 가는데 때가 때 인만큼 승봉도도 갈 수 없는 시기라 궁지에 또 다시 빠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