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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시인들

<부산의 시인들> 6.조순

작성일 : 2025.11.10 11:36 수정일 : 2025.11.10 11:38

부산의 시인

 

6. 조순

1995년 박노석 시인의 장례를 문협장으로 치르고 있을 때다. 그때 장례식장에서 몸집이 작은 신사분이 애처로이 애도해 하는 모습을 보고 누군지 궁금했다. 곧이어 필자에게 수고한다는 말과 함께 자신은 박노석 시인과는 <갈숲> 동인인 조순 시인으로 평소 고인과 아주 가깝게 지내 왔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발인 때까지 몇몇 문인들과 함께 거의 장례식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필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기도 했다. 알고 보니 문학평론을 하는 부산대 국문과 김정자 교수의 남편이었다. 조순 시인은 경남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문과를 나온 재원인 김정자 교수의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으로 선생님을 너무 사모해 결국 부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그 뒤에 듣기도 했다.

그런데 박노석 시인의 장례 그다음 해인 1996년 갑자기 조순 시인이 돌아가시게 되었다. 그전에 보았을 때 허약해 보이기는 했지만 돌아가시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정말 인생무상이었다. 그때도 박노석 시인 때처럼 같은 <갈숲> 동인이었던 김상훈 문협회장의 영향과 도움으로 문협장으로 치르게 되었다. 그런데 앞의 박노석 시인 때는 장례식을 남산성당에서 치렀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이번에는 문협 사무실이 있는 시민회관 광장에서 장례식을 치르기로 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이크 시설에다 천막이며 의자, 플래카드 심지어 부의금 접수처까지 다 준비해야만 했다. 어쨌든 문협 사무국장이던 필자의 주도로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장례식 전날 강의까지 빼먹고 준비했는데 거의 밤 12시가 다 되어 겨우 마쳤다. 그때 마이크가 잘 안되어 애를 먹었는데 음향시설을 잘 알고 고인과 친분이 있었던 부산대 음악과 제갈삼 교수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장례식은 그런대로 많은 문인을 비롯한 조문객이 다녀가고 큰 탈 없이 치러져 준비한 사람으로서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고생한 장례식이었는데 기백만 원의 장례비용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사실 부의금 중에서 일부 행사 비용으로 쓸 것으로 기대했는데 유족 측에서 부의금을 전부 가져가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유족 측에 상황을 자초지종 이야기해보기도 하고 김정자 교수와 같은 과 교수였던 임종찬 교수가 김정자 교수를 설득해 비용을 돌려받으려고 해보았지만 그것도 허사였다. 당시 문협 살림살이로서는 큰 액수였는데 몸 고생하고 마음고생까지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끝난 장례식의 경비 문제가 김정자 교수와 필자와의 조그만 갈등으로 남아 아마 오랫동안 관계가 서먹했던 것도 같다.

조순 시인 (1926-1995)은 경남 의령군 화정면 출신으로 해방 직후 진주사범을 거쳐 중앙대 정치과를 졸업하고 부산상고, 부산여고, 경남여고 국어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만년에는 경남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한 뒤 대학 강사로 강단에 서기도 했다. 문단에는 부산에 별로 시인이 없었던 50년대 말부터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19584월호 자유문학항아리를 발표한 이래 주로 자유문학지를 통해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시인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양왕용 교수는 만년에는 <갈숲> 동인으로 열성적으로 동인지를 주재하다가, 심장질환 때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다정다감하면서도 사려 깊은 인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만년까지 낭만과 시적 분위기를 잃지 않은 시인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조순 시인은 낭만적이고 여린 내면의 성정을 잘 형상화 한 서정적 시인이었음에도 몇몇 시들에서는 6.25 이후의 상흔과 모순된 현실을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작품 경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어찌 보면 그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시인들의 숙명이었을 지도 모른다. 오늘의 슬픔을 모르는 항아리의 눈에서 몰 역사의식을 찾는 시인의 관념이 시 항아리에서 돋보인다.

< 오늘의 슬픔을 모르는/ 항아리의 눈은/ 자꾸만 파아래진다.

소녀는 전쟁의 비릿내를 망각하고 어머니의/ 고독을 닮은 항아리의 生理傳說한다.> (항아리)

<박홍배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