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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80주년에 보는 등대 역사

<광복80주년에 보는 일본이 기록한 등대역사>8. 청일전쟁에 감쳐진 조선의 등대

작성일 : 2025.10.31 03:22 수정일 : 2025.10.31 03:26

 

8. 청일전쟁에 감쳐진 조선의 등대

 

김민철(공학박사, 항로표지 전공) / 석영국(등대 역사가)

 

 

연재를 시작하면서 의심이 가는 사항은, 아무리 이시바시가 영국에서 등대 관련 기술을 습득하였다고 하였다고 하여도, 현재와 비교하면 느린속력인 최대속력 11.5노트의 메이지마루호를 타고 항해하면서 단 60여일간(1897. 6. 29 9. 10)만에 어떻게 등대 설치 예정지를 선정하여 측량을 하였는지는 의문이 갈 수 밖에 없다.

 

관련 자료에 근거하면, 일본의 등대 설치에 대한 조사는 이시바시가 측량하기 20여년 전부터 조선정부와 어떠한 협의도 없이 외교관례를 무시한 무법적으로 사실상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본은 조선에서의 상업적 활동을 하기 위하여 18767, 오카미 스케하치로(岡見助八郎)가 한국의 개항장을 순회하며 상무(商務)를 조사하고, 조선해에 제11호 등표(燈標)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실행은 되지 않았다.

 

건의 이후, 일본정부는 조선 연안에서 1884년에 에치고마루(越後丸)가 난파(難破), 18873월에 마루야마마루(丸山丸)가 침몰 및 18905월 나가오마루(長尾丸)의 사고 등 당시 잦은 해난(海難)의 원인이 조선 연안 항로의 불명확함과 항로 시설의 불완전함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일본은 조선 정부와 사정 어떠한 협의도 없이 18887월에 일본 해군성 등대국이 조선해 측량을 개시하였으며, 같은 해 9월 마산포 부근에서 측량점을 확정하고, 부산·마산포·목포·인천 각 항구의 위치를 확인하였다.

 

18907월에 다시 측량대를 파견하여 이듬해 18914월까지 약 10개월간에 부산·마산포·목포·인천의 항만 측량을 완료하였다.

 

18923월에 다시 부산항과 목포항의 수로를 정밀 측량하고, 같은 해 12월 해군의 히구치 스케노스케(樋口助之) 기사에게 항로표지(등대 등)의 설계를 담당하게 하여, 등표 설치가 필요한 지점을 정하고, 등대 건설 계획을 수립하여 일본 정부에 등대 건설을 청원하였다.

 

18947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이 발발되었으며, 1894725일 일본 해군이 충남 아산만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국함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청국군함과 청국 증원군을 태운 영국수송선 가오슝호(高陞號)를 격침하여 수천명을 수장시킴으로 청일간애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이 진행 중 전략적으로 조선해 항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8948월에 등대기사 이노우에 사토시(井上敏)를 조선해에 긴급 파견하여 등대 설치공사 공사 감독을 임명하였으며, 이노우에 기술자는 야마자키 신스케(山崎新助) 기술자와 함께 자재를 조달하여 이듬해 18954월 조선에 도착하였다.

 

도착 즉시 부산항 동쪽 원두(元東方) 지역에서 기초 공사를 시작하여 건조 기초 공정을 완성하였으며, 같은 해 7월에 일본 정부는 등대 기사 1명을 추가로 파견하여 등대의 건설·설계 등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후 일본 외무성에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는 전신(電信)에 의한 항로 통신보다 등대 설치가 필요하다는 논의가 이루어져, 일본우선주식회사(日本郵船會社)와 오사카상선주식회사(大阪商船會社)의 선장들로부터 의견을 수렴하여, 마산포·부산·인천·군산·목포·진남포·원산 항로에 각각 3, 그리고 남조선 연안에 9, 15기의 등대를 건설하기로 계획하였다.

 

189510월에 해군의 등대 담당 히구치樋口) 기사와 야마자키 신스케(山崎新助) 기수(技手)에게 다시 한번 조선 연안 항로 측량을 맡겼고, 18976월에 이를 완료하였으며, 18984월에는 항로 표식 설치 지점을 확정하였다.

 

1898(메이지 31) 5, 조선정부는 감리관청(監理官庁) 야마카와 사쿠조(山川捨蔵)에게 등대 건설 사무를 담당하게 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전신·등대 기사 칸다 마사히데(神田昌秀)에게 등대 건설 감독을 명하였다.

 

또한 일본 정부는 등대감독 오가와 쓰루조(小川鶴蔵)를 파견하여 건설 감독에 종사하게 하여, 18985월부터 1899(메이지 32) 3월에 이르기까지,

마산포·부산·군산·인천·목포·원산의 여섯 항구에서 차례로 등대설치 공사가 착수되어, 18993월 마산포 등대 완공, 18996월 인천 등대 완공, 18998월 군산 등대 완공, 18999월 부산 등대 완공, 189910월 목포 등대 완공, 189912월 원산 등대 완공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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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3월에는 북한의 영흥(永興)과 백암(白岩) 등대 두 곳의 건설에 착수하였고, 19016월과 8월에 각각 준공되었다.

 

당시 설치된 등대는 조선정부와 협의없이 일본이 전쟁에 대비하여 임시로 일본이 자재와 비용을 부담하여 임의 설치한 등대로 생각되며, 크기, 규모, 등화의 부착 여부는 물론 위치까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청일전쟁에 즈음하여 설치된 전략적 목적의 등대 설치는 일본 해군성 등 군부에서 독단적으로 비밀리에 설치하고, 군사적 목적에서 이용한 것으로 생각되며, 공식적인 조선의 문서나 일본의 외교문서에는 기록되어있지 않다.

 

아마, 해군의 비밀 군사 문서에 보관되어있는 기록으로 추정되며, 관련 문서를 찾는 것이 대한민국의 등대 역사나 청일전쟁사 및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자료라고 생각되어,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공식적인 문서의 발굴 등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