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광복80주년에 보는 등대 역사

광복80주년에 보는 등대 역사

<광복80주년에 보는 일본이 기록한 등대역사>7. 해관등대국의 설치와 존 레지날드하딩 / 이시바시 아야히코

작성일 : 2025.10.26 07:44 수정일 : 2025.10.26 07:47

 

7. 해관등대국의 설치와 존 레지날드하딩 / 이시바시 아야히코

 

 

김민철(공학박사, 항로표지 전공) / 석영국(등대 역사가)

 

 

조선의 항로표지 설치 계획은 공식적 외교 문서상의 기록으로는 조선정부가 각국 공사와 영사의 요청에 따라 총세무사와 협의하여, 매년 관세수입에서 20만원을 지출하여 최우선 설치할 지역부터 순차적으로 등대를 설치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각국 공사와 영사에게 통고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구한국외교문서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정부는 연안에 등대 32기를 건설하기로 결정한 이후 영선사(營繕司) 관원을 시켜 장소를 선정하고 이를 총세무사 브라운에게 처리토록 하였다고 하며, 해관과 조선정부가 등대 건설을 추진하는 역할을 궁내부(宮內府) 영선사는 현지 답사와 장소선정을 하고, 해관은 등대 설계를 맡은 것으로 나타나지만, 당시의 영선사의 인력 구성과 선박의 운항과 등대 건설 관련 기술의 보유 측면에서 등대의 위치 선정에 영선사의 관리들이 동원되었다는 것은 신뢰하기 어려운 사항이며, 그 시대의 유일한 관영공사기구인 영선사를 형식적으로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총세무사 브라운이 주도하여 19023월에 창설된 해관등대국은 초창기에는 브라운이 일본의 입김에서 자주성을 가지기 위하여, 청국의 상해 해관에서 등대 건설 업무를 담당하였던 존 레지날드 하딩(G. R. Harding)을 등대 컨설던트로 고용하여 일본의 등대건설 계획 등을 전반적으로 검증하고, 등대 건설 계획 및 감독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브라운은 일본이 청일전쟁 전쟁 중인 1895년에 이미 한국 연안을 측량하여 등대 선설 후보지를 물색하는 등 주요 항로의 등대 건설문제에 큰 관심을 보여 왔으며, 1900년 전·후부터는 해관세의 일부를 등대건설 비용으로 지출하는 논의가 구체화되어 감에 따라 이를 전담할 해관측의 전문기술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하딩의 고용을 일찍부터 염두에 두었을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총세무사청에는 러시아인 건축기술자 사바틴이 있었지만 등대 건설업무에는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브라운이 하딩을 고용한 직접적인 계기는 목포해벽수축공사였다. 목포해벽수축공사를 맡은 일본 측이 공사비를 제일은행으로부터 대부를 받을 때 목포해관의 조세수입을 담보로 요청하였으나, 브라운이 반대하여 조선정부 예산에서 지출할 것을 다시 제안하여 약정을 보게된다.

 

이 약정에서 목포해벽은 조선정부가 축조할 것이며 공사비의 책정 및 지출의 방법은 해관에서 적정한 기사를 파견하여 조사 보고가 있은 후 결정하도록 하여, 브라운은 하딩을 초빙하여 일본이 입안한 해벽공사의 설계와 견적을 검토하도록 하였으며, 이외에도 하딩은 1897년부터 덕수궁 석조전의 사전조사와 설계를 위해 청국과 조선을 왕래하며 기술적 지원으로 브라운과 접촉을 계속해 왔으며, 브라운은 일본과의 등대 설치와 관련하여 도와 줄 수 있는 적임자로 보고, 한국 등대국의 컨설팅엔지니어 (Consulting Engineer)로 초빙하여 일본의 등대 설치 요청지 조사와 설계 등을 검증하고 등대 설치에 관여하도록 업무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하딩(1858~1921)1858년 영국 몬마우스(Monmouth)의 더 헨드르(The Hendre)에서 태어나 말보르(Marborough) 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하고 졸업 후 1880년부터 청국 세관 총세무사인 Hurd의 초청으로 1880년부터 청국 해관에서 시베이산등대 건립을 위해 영조사(營造司, Assistant Engineer)로 입사하여 1908년까지 총공정사(總工程師, Engineer -in-Chief)로 근무하면서 퉁충도(東湧島)등대, 옌타이산(煙台山)등대 등 9개의 등대 건설과 해관과 관련한 다양한 건물, 선박, 항만 등의 설계 건축을 한 기술자이다.

 

해관에 처음으로 설치된 상설공사기구인 해관등대국은 탁지부 관할로 하여 해관과 동등한 격의 위치에 두었으며, 업무의 범위는 등대건설과 궁정과 영선업무등으로 추정되고있으며, 해관등대국의 직원은 종전부터 해관에 근무해온 구미인과 청국인 직원들로 구성되었으나, 점차적으로 일본인으로 교체되었으며, 등대관게 부서의 직원은 등대건설기술자와 등대간수 그리고 등대 건설선의 선원으로 구성되었다.

 

일본에서 조선의 초기 등대 설치를 주도한 자는 일본 체신기사 이시바시 아야히코(石橋絢彦)라고 할 수 잇다. 이시바시1853년 일본 에도에 태어나서 1873년에 6년제인 공부성 공학기숙사(동경대학교의 전신인 공부대학교의 전신) 토목과에 입학하여 학업 중 요코하마 등대국에서의 실습과 수로부에서의 해상측량 및 기계공장 등에서의 실습 등과 함께 측량, 제도 등을 공부한 후 1878년에 졸업하고, 1979년에 서구에서의 기술 습득을 위한 유학생 11명 중 1명으로 선정되어 1880년 영국에 유학하여 영국 등대를 관리하는 트리니티 하우스의 제임스 니콜라스 더글라스 (Sir James Nicholas Douglass)에게 등대의 건설법을 배웠으며, 1758년에 설치되었다가 파손되어 개축 중이었던 유명한 에디스톤등대에서 등대 건축의 실체를 공부하고, 전기등대, 무신호 기기 등을 공부하고, 영국과 프랑스, 미국의 등대를 견학하고 귀국하여 공부성 등대국의 체신기사로 근무하면서, 1895년에는 해군본부에 파견되어 조선 연안의 항로표지 건설 위치를 측량하고, 등대 설치 예정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또한, 청일전쟁(1894-1895) 이후 육군성 내에 임시대만등표건설부에 파견되어 189611월부터 18974월까지 8개소의 등대를 잇달아 점등시키고, 이후 임시대만전신건설부 기사로서 해저전선 포설 업무 등을 담당하기도하였다,

 

이시바시가 1895년 조선 연안의 등대를 측량한 이후 1896년에 작성한 보고서를 토대로 조선정부에 한국 연안의 항로표지 설치 위치의 결정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이시바시는 1901. 12월 경에 총세무사 브라운의 초청으로 혼마 나카노스케(本間中良助)와 함께 조선에 와서 브라운의 등대설치 계획 수립과 해관 등대국 설치에 도움을 주고 파견 형식으로 근무를 하다가, 19022월에 병으로 귀국하고, 19033월에 이시바시의 역할을 위해 아오야마 하야노스케(靑山隼之助)가 래한하여, 혼마 나카노스케와 함께 4월부터 7월까지 조선 연안을 재 답사 하는 등 그해 12월까지 근무하였다

 

같은 달에 항로표지관리소 기수 야마나카 테츠(山中轍)와 항로표지 간수 가쓰카와 주지(勝川忠治)가 해관의 초청으로 입구하여 등대 건설과 간수로서 업무에 종사한다.

 

초기의 등대 건설을 주도한 일본인 기술자는 일본 체신성 항로표지관리소에서 파견된 이시바시 등 체신성의 관리라고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이시바시가 조선의 항로표지 측량 이전부터 일본은 조선의 침략과 중국과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조선에 등대 설치를 준비하여 조선의 연안 측량과 등대 설치를 준비하여 왔으며 대표적 인물로 등대 설계를 담당하였던 이노우에 사토시(井上敏)등의 해군 기술자와 등대 설치 위치 결정을 담당한 것으로 보이는 고베상선학교(神戶商船學校) 조교수 야마네 다다시(山根忠) 등의 많은 기술자가 투입되었다.

 

19023월 설립한 이후 브라운은 조선 연안의 등대 건설공사를 시작하여, 1903년 인천의 팔미도등대 등을 시작으로 인천, 군산, 목포, 진남포 등에 등대를 설치하여 항로표지의 기본 틀을 마련하였다.